텔레비전에서는 국제구호단체에서 아프리카 오지에서 영양실조로 고통을 받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방영한다. 작은 돈일지라도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므로 구호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솔직히 나는 한 번도 그들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한 일이 없다.
내가 왜 생면부지의 아이들을 도와야 하는지 그 당위를 생각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뉴스에는 우리나라에서 도움을 손길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수술비 마련이 어려운 환자도 있고, 부모를 잃은 안타까운 아이들도 있다.
물론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하루하루를 좁든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노인들도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 어린이라니. 거기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북극곰이 사라져가는 모습 역시 그저 남의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에 모금은 그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여겨졌다.
피터 싱어
그런데도 그런 일을 즐겨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일을 더 충실히 하기 위해 직업을 선택하기도 한다고 했다. 베푸는 일을 즐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일 텐데도 그런 일로 보람을 느끼는 이들의 이야기가 피터 싱어의 『효율적 이타주의자』에 가득했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각자 할 수 있는 한에서 선을 최대화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율적 이타주의란 ‘세상을 개선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이성과 실증을 통해 모색하고 실천하는 철학이자 사회운동’이라고 정의된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남을 위한 최선이 본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최상의 결과라고 본다. 그러므로 효율적 이타주의자란 “남들의 복지를 진중히 염려하고, 그들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선을 최대화하려면 그 나름의 조건을 갖출 필요가 있다. 어디에 베푸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를 생각한다는 것은 약간 이기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자기가 낸 돈이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변명 같지만 내가 지금까지 구호 단체를 외면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가 있다. 정말로 내가 낸 돈이 아프리카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아이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교직에 근무할 때 학급별로 아프리카 어린이 한명 돕기 운동을 벌였었다.
구호단체에서 어린이를 선정하고 그 어린이의 사진을 보내왔다. 학급마다 학생들의 드나들며 그 어린이들 볼 수 있도록 사진을 학급 문 앞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그 어린이만을 위해 매달 학급에서 용돈을 아껴 절약한 돈을 모아 보내주었다.
여기서 보냈다는 말은 구호단체를 말한다. 우리는 그 돈이 구호단체를 통해 제대로 아프리카의 어린이에게 전달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퇴임을 한 후로 그 학교에서는 그 활동을 그만 두었다. 교사들도 반신반의했던 모양이다.
이 책은 자선단체 또는 구호단체에 대한 나의 그런 우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모금 단체에 기부를 할 때는 사전에 면밀히 따져볼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효율적인 곳에 기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그런지에 대해 구호 단체들을 대상으로 철학적 논의를 진지하게 펼치고 있다. 그런 논의에는 인간의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는 듯하다. 그저 냉철한 계산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아프리카의 병약한 어린이나 내 아이나 동등하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내 아이를 팽개치고 남의 아이를 돌보겠다고 나설 이가 있을까 의문이다. 아마도 내 아이의 감기가 생면부지의 아프리카 아이의 굶주림보다 크게 와 닿을 것임이 분명하다. 내 좁은 식견인지 몰라도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동물 구호 단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리송하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비건주의자가 되어야 할 듯싶다. 물론 세상사람 모두가 채식이나 그에 준하는 식사를 한다고 하면 가축을 기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가축을 길러 잡아먹는 것도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약육강식의 한 형태일 것이다. 사자 같은 맹수는 배를 채우기 위해 초식동물을 사냥한다. 그렇다고 초식동물을 돕자고 사자를 사냥하지는 않는다. 가축을 기른다는 것은 자연 속의 먹이사슬을 헤치지 않는 한 방안이다.
만약 가축을 기르지 않는다면 인간은 육식을 위해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산이나 들로 사냥을 나서야할 것이다. 이 경우 오히려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피해가 더 커질 것은 분명하다. 급속한 생태계 파괴가 이루어질 것이고 결국 그 피해를 인간이 고스란히 받게 될 것이다.
책은 반려동물과 좁은 우리에 갇혀있는 가축이 무엇이 다른가 묻는다. 감정을 모두 배제하면 그런 구분은 분명히 의미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감정을 배제하면 인간이 동물을 돕는다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저 지구상에는 약육강식만 남을 뿐이다.
어떻든 이 책은 기부에 대한 통념을 깨는 매우 과감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책으로 인해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수많은 구호 또는 자선단체들 중 상당수는 이 책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효율적 이타주의라는 명쾌한 윤리적 논거는 이들을 거북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