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직선 기둥에 지붕 얹어 사찰 초입에 세워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예비적 공간
범어사.선암사.송광사.태안사.쌍계사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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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동래 범어사 일주문(허예내 사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하고 있는데, 문 이쪽은 이승, 문 저쪽은 저승으로 상정(想定)되어
있다.
문설주에 매달린 숭어는 바다와 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특성을 가진 물고기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영혼의 상징물로 취급되었다.
‘다시라기’의 일주문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이자 두 세계를 잇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으며, 숭어는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징 원리가 사찰의 일주문에도 적용되어 있다. 일주문 바깥쪽은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고, 문 안쪽은
현실 세계와 구별되는 신성하고 이상적인 공간인 것이다. 이것을 불교적 개념으로 해석한다면 일주문 밖은 차안(此岸), 또는 사바세계에 해당되고,
문 안쪽은 피안(彼岸), 또는 극락세계가 된다.
문(門)의 사전적 정의는 ‘두 영역을 드나들 때 사용하는 건축 구조물로서 기둥과 문틀을 세우고 한 짝 혹은 그
이상의 문짝을 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찰에는 반드시 그런 모양의 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짝 없이 기둥만 일렬로 서있는 문이 있는가
하면, 인왕이나 사천왕과 같은 신중상을 봉안키 위해 특별히 조성한 집 모양의 문도 있고, 불이문, 해탈문 등 문 이름 자체에 의미를 둔 문도
있다. 이 가운데서 일주문(一柱門)은 사찰의 관문으로, 그 핵심적 의미는 문의 모양이나 이름보다 서있는 위치에 있다.
<☜ 사진설명>
순천 선암사 일주문.
사찰 초입에 세워져 있는 문을 보통 일주문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 어떤 문도 ‘一柱門’이라고 쓴 현판을 달고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사찰의 위치와 이름을 알리는 ‘○○山 ○○寺’ 등의 현판만 걸려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일렬로
서있는 문’이라는 뜻을 새긴 것으로, 문의 모양을 근거로 해서 지은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홍살문도
일주문이고, 충렬효행(忠烈孝行)을 기리는 정문(旌門)도 일주문이며, 조선시대 어용(御容) 봉안소인 집경전(集慶殿) 입구에 세운 문도 일주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일주문 형식의 문은 우리나라 사찰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중국에도 비루(碑樓), 또는 패루(牌樓)라고 하는
일주문 형식의 문이 있고, 일본에도 도리이(鳥居)라고 불리는 일주문 형식의 신문(神門)이 있다.
패루는 왕릉 또는 사묘(祀廟) 입구에 세우는
문으로, 3칸 일주문, 5칸 일주문 등이 있다. 대부분 중앙 칸을 양쪽보다 높게 되어 있고 화려한 장식 조각이 베풀어져 있다. 패루는
능.묘(陵廟) 영역임을 알리는 표지(標識) 기능과 함께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성역임을 나타내는 역할도 한다. 북경 근교의 명13능의 패루와
산동성 곡부 주공(周公) 묘(廟)의 패루가 유명하다.
일본의 도리이는 신사(神社) 입구에 세워지는 상징적인 관문으로 신성한 공간과 일상의 평범한 공간의 경계를
나타낸다. 도리이는 보통 두 개의 둥근 기둥 위에 두 개의 직사각형 보를 가로로 올려놓은 형태로 되어 있다.
위쪽의 가로대는 기둥의 양쪽 끝을
지나 바깥쪽으로 뻗으면서 약간 위로 반전하고, 아래쪽 가로대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이 있는 것을 패루라 하고 지붕이 없는
것을 패방(牌坊)이라고 하므로 도리이는 패방에 속하는 일주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전남 진도에 전해오는 독특한 장례풍습인 ‘다시라기’ 현장에서 우리는 말린 숭어를 매단 간단한 목조
구조물을 볼 수 있다. 문짝은 없고 두 기둥과 문설주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모양으로만 볼 때 이 또한 일주문이다. 이 문은 굿마당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하고 있는데, 문 이쪽은 이승, 문 저쪽은 저승으로 상정(想定)되어 있다.
문설주에 매달린 숭어는
바다와 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특성을 가진 물고기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영혼의 상징물로 취급되었다. ‘다시라기’의 일주문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이자 두 세계를 잇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으며, 숭어는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징 원리가 사찰의 일주문에도 적용되어 있다. 일주문 바깥쪽은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고, 문 안쪽은
현실 세계와 구별되는 신성하고 이상적인 공간인 것이다. 이것을 불교적 개념으로 해석한다면 일주문 밖은 차안(此岸), 또는 사바세계에 해당되고,
문 안쪽은 피안(彼岸), 또는 극락세계가 된다.
일주문 밖이 성역에 포함되지 않은 평범한 일상적 공간이라고는 하나 문 전방의 일정 범위는 근신(謹身)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 증거가 하마비(下馬碑), 또는 하마석(下馬石)인데, 하마비나 하마석이 있는 곳에서부터 일주문에 이르는 이
범위 안에서는 말 타고 온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 하고, 잡담을 삼가고 의관을 정제하는 등의 바른 몸가짐을 가져야 한다.
지금은 위치가 바뀌었지만 조선말까지만 해도 광화문 앞 해치(해태)상은 광화문 남쪽 약 80미터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에는 해치상이 있는 곳에서부터 광화문에 이르는 구역 내에서는 말을 타고 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마석을 해치상 옆에
놓아두었는데, 그것은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강력한 암시였다.
조선 고종 때 어떤 신하가 관례를 어기고 말을 탄 채 이 구역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고종 임금이 그
신하를 발견하고 엄히 꾸짖었다. 그런 사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고종실록〉 권7 경오 10월 조), 사소한 것일 수도 있는 그 일이
실록에까지 기록된 것은 그것이 당시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이 분명하다.
궐문 전정(前庭) 구역이 성역 진입을 위한 예비 공간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일주문 정전구역 또한 부처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예비 공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안에서는 경건한 마음과 바른 몸가짐으로 근신하는 태도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근신의 공간이 되어야 할 일주문 주변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어떤 사찰에 가보면 기념품점이나 음식점 등이
일주문 턱밑에서 성업 중이고, 불고기 굽는 냄새가 일주문을 넘나든다. 그런가하면 승용차를 탄 채 일주문을 통과하는 불자들이 눈에 띄고, 때로는
수도하는 스님조차 승용차를 타고 거리낌 없이 일주문을 드나드는 광경도 목격된다.
세태가 이렇게 변해버렸지만 몇몇 일주문 유적은 아직도 전통 건축미와 문화재적 가치를 잃지 않고 있어 다행이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일주문 유적 가운데서 볼만한 것 몇 개를 골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동래 범어사 일주문이다. 범어사 일주문은 주법당과의 거리가 멀지 않은 사찰 초입에 서있는데, 일주문 뒤로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 보제루가 일정 간격을 두고 도열해 있다.
삼칸 일주문(三間一柱門) 형식으로 된 범어사 일주문은 기둥처럼 긴 화강석 주춧돌 위에 결구(結構) 없이 공포와
지붕을 얹은 것이 특징이다. 한 칸 일주문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을 감안 할 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문이라 할 것이다.
현재 일주문 중앙에
‘조계문(曹溪門)’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 칸에 ‘禪刹大本山(선찰대본산)’, 오른쪽 칸에 ‘金井山梵魚寺(금정산범어사)’라고 쓴
비교적 큰 현판이 걸려있다.
순천 선암사 일주문(시도유형문화재 제96호)은 조선시대 건축으로 수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두 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맞배지붕을 올린 구조로 된 일주문이다. 화려하고 복잡한 귀공포 사이에 세 개의 공포를 더 두어 공예미를 한껏 높였다. 앞쪽에
‘曹溪山仙巖寺(조계산선암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조선시대 일주문의 양식을 잘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완주 송광사 일주문(시도유형문화재 제4호)은 조선 중기 건물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사찰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일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공포에 용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앞면 중앙에는
‘終南山松廣寺(종남산송광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전체적인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원숙한 비례감이 돋보인다.
끝으로, 곡성 태안사 일주문(시도유형문화재 제83호)을 살펴보자. 이 문은 조선 숙종 9년(1683)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맞배지붕을 올린 다포식 구조로, 양쪽 기둥 앞뒤에
보조기둥이 세워져 있다. 내부의 천장 아래에 용두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문 앞쪽에 ‘桐裏山泰安寺(동리산태안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들 일주문 외에도 함양 용추사 일주문(시도유형문화재 제54호), 하동 쌍계사 일주문(시도유형문화재 제86호),
불곡사 일주문(시도유형문화재 제133호) 등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허 균
/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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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로 편집을 다 해서 올리셨네요. 감사히 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 사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