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 「창에서 바라보다」/ 권도운
s#1. 나무가 있는 풍경
공원의 그네가 흔들리고 있고,
양산을 든 여배우와 작가가 나란히 걷고 있다.
작가 『옛날 인도에서는 말입니다. 남편이 멀리 일 때문에 떠나면 아내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네를 타고 시간을 보냈다고 그럽니다.』
여배우 『……』
작가 『그러니까… 아내는 그네가 필요했지만… 그것으로 슬픔을 달랠 수도 있었다는 얘깁니다. 아내는요. … 남편은 여전히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여배우 『여자는 단순하다는 얘긴가요?』
작가 『아니, 그네의 고독도 상당한 거 아닐까요? 사는 방법이 다르다는 거겠죠.』
여배우 『제 역할은 그네를 타고 있는 아내인가요?』
작가 『……』
여배우 『남편 역은?』
작가 『남편은 프로펠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1초 동안에 900회전 이상 하는 프로펠러를 말입니다. 펌프 안에서 그 프로펠러가 돌면 내부의 대기가 튕겨 나가 우주와 같이 엷은 대기가 됩니다. 하이테크 산업에서 이용도가 높은 것인 모양인데요. … 그 프로펠러의 연구를 20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배우, 걸음을 멈추고 앞에 보이는 낡은 아파트를 바라본다.
아내 『(소리) 그 남편이 3일 전의 소인으로 회사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여배우, 손에 들었던 양산을 편다.
s#2. 타이틀 <창에서 바라보다>
s#3. 아파트의 일 실
창 너머로 아내 명희(43)가 양산을 펴들고 숲길을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남편 『(소리) 명희, 당신에겐 별로 흥미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대기가 760토르라는 단위로 내가 만든 펌프는 그것을 0,00000007토르까지 끌어 내리는 데 성공했어요. 하지만 여기까지예요. 아무리 해도 제로라는 대기에는 가까이할 수 없어요. 날마다 공장에서 밤을 새우지. 집까지 가기엔 멀기 때문에 머무는 곳은 아파트이고, 앞으로 나흘은 이곳과 공장을 왕복할 뿐, 때로는 영화 구경도 하고 싶구려. 장모님께서 담그신 고추장아찌도 먹고 싶고. 요섭.』
창가 마루의 긴 타원의 레일 위를 장난감 화물열차가 묵묵히 달리고 있다. 그 옆 책상 위의 낙서처럼 쓰여 있는 수식(數式)과 프로펠러의 설계도. 출입문이 닫힌 화장실(목욕실)에서 라디오의 음악방송이 낮게 흐르고, 면도하는 듯 전기면도기의 모터 소리가 들린다.
별안간 현관에서 명희의 목소리
아내 『당신도 문을 열어 놓으니까, 개미가 들어가잖아요! 봐요. 방안까지…』
그러면서 접은 양산으로 발밑 개미를 쫓아내며 명희가 들어온다.
아내 『어머, 음식을 떨어뜨렸군요. 이따가 훔쳐야겠어요.』
개미는 점점(点点)이 안으로 이어져 있다.
명희, 화장실 쪽을 보면서
아내 『면도하고 있어요?』
양산으로 쿵쿵 화장실 문을 두드린다.
안에서 문을 가볍게 치는 반응이 있고, 약간 열리는 듯하다.
라디오의 경박한 아나운스
아내 『빨리해요. 전화했잖아요. 6시부터예요. 토요일이고 늦으면 서서 보게 된단 말이에요. 앞으로 5분이면 나갈 거예요.』
발밑에서 한 마리의 개미를 찾아내고,
아내 『몰라.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네. (양산 위로 기어오르게 한 다음 급히 창가로 버리러 가서) 내가 가끔 청소하러 오면 좋겠지만… 당신 자기가 하겠다고 그랬고, 나도 바쁘잖아요. 어제만 해도 민 선생이 내달 여행 준비 때문에 의논하자고 만나자고 했죠‥』
이웃 주부가 창밖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가볍게 인사하고,
아내 『그 전날엔 모임에서 바자를 했죠. 광견 예방주사에다 은행 지로라든가, 정말 무슨 일이 그렇게 많죠? 아이들이 있는 집은 더 요란해질 거예요.』
마루 위를 빙빙 돌고 있는 화물열차를 쪼그려 앉아 보고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아내 『어머… 전차, 또 두 칸이 늘었군요. 이만하면 정말 기차 같네요.』
열차, 묵묵히 건널목을 지나 다리를 건너, 남편이 있는 화장실로 향해 달려간다. (명희의 시각)
아내 『당신에게 이런 취미가 있다니 아무도 모르겠죠. 어머닌 말이에요. 당신은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 여자가 생기면 어쩌냐고 걱정하는 거예요. 작업실에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때로는 일찍 일어나 가서 아침이라도 지어 주라 나요.』
열차, 턴해서 명희 쪽을 향해 돌아온다.
아내 『(어머니에게 말하듯) 하지만 말이에요. 그 사람도 밤새워 일했을 거고, 설계에 파묻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곁에 있으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는 아침엔 졸려요.』
어린아이처럼 뽀로통해져서 벌떡 반동을 붙여 일어나 갖고 온 고추장아찌를 쇼핑백에서 꺼내 냉장고가 놓여있는 쪽으로 간다.
아내 『(큰 소리로) 고추장아찌 갖고 왔어요. 맛이 좋아요. 이거. (냉장고에 넣고) 어머니 같으신 분과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거든요. 음식솜씨 좋으시고, 빨래 자주 해주시고, 나는 영화 구경이나 가고, 쇼핑이나 하고… 그래서 무슨 재미냐고 다들 그러는 거예요. 목표도 없이 빈둥빈둥 지내고…』
한숨을 쉬고 시계를 본 다음 양산으로 화장실 문을 두드린다.
아내 『빨리요! 시간 없어요!』
그리고 문득 앞에 있는 벽면을 본다.
아내 『……?』
벽 위쪽부터 아래쪽으로 빨간 그림물감으로 거대한 프로펠러가 멋대로 그려져 있다. 프로펠러의 축은 자세히 보니 거대한 페니스를 닮았다. 디스템퍼(Distemper)와 같은 끔찍한 난필이다.
명희, 어이없이 바라보고 서 있다. 창밖에서 어린이들이 놀며 떠드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흘러 들어온다.
아내 『(낮게) 이거 뭐예요? (눈길 돌리며) 나는 어머니 같은 걱정은 하지 않지만, 하지만 가끔 불안해질 때가 있어요.』
조용히 창가로 간다. 햇빛이 밝게 비치는 숲길. 명희, 응시하며
아내 『오늘 아침 강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있었어요. 당신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고요. 1초 동안 1,200회전하고 프로펠러의 날개가 산산이 흩어졌다고요. 대기 제로의 세계는 역시 하나님밖에 모르는 무서운 세계라고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당신이 아주 불행한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고 그랬어요. 걱정된다고. 나는 그랬어요. 불행이라뇨? 왜요? 까짓 프로펠러가 아닌가요!』
명희의 얼굴에 견딜 수 없는 공허가 스쳐 간다. 발밑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커브를 돌아가고 있는 화물열차의 바람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는 책상 위의 설계도와 수식(數式). 명희, 딱 눈을 감고 유리창에 얼굴을 댄다.
아내 『(큰 소리로) 여보! 돌아가요! 목표 같은 거 없어도… 대기가 얼마가 되어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어요! 저기 보세요. 모두 즐겁게 놀고 있잖아요. (멀리서 떠들며 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난 언제나 이렇게 생각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날씨가 좋으면 오늘은 하루 행복하구나… 라고요… 마당에 꽃이 피어 있고, 개가 벌렁 누워있고, 바람이 기분 좋게 불고, 별로 할 일은 없지만. 그래서 행복하구나! 라고요.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죠. 그것으로 행복해요.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닌가요? 내가 틀렸나요?』
바람으로 화장실 문이 약간 열린다. 좀 어두움 속에 남자의 두 다리가 늘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발밑에서 라디오가 낮게 일기예보를 고하고 있다. 명희, 꼼짝도 하지 않고 창가에 서서, 하늘 숲에서 햇빛이 밝게 내려 비추는 숲길을 바라보고 있다. 창밖의 햇빛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다.
<작가의 말>
이런 짧은 드라마에서는 자신의 에센스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들 수가 없고. 핵을 잡아내어 핵 그 자체를 제시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밖에 없다. 그러니까 의외로 자신의 빛깔이 나타나는… 쓰면서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짧은 것일수록 구성력이라든가 농축된 대사가 요구된다. 낭비가 허용되지 않는다. 어렵다. 더구나 끝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소설은 어느 단편(斷片)을 읽게 하고, 어떤 풍경을 엿보여 주면 끝나지만, 드라마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야 한다. 산수가 필요하다. 극본은 시와 수학의 합체(合體)와 같은 거다. 영화와 달라서 TV란 것은 시간을 어떻게 잘라 떼어놓아도 좋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매우 TV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이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쓰면서 애는 먹었지만, 매우 재미있었다. (1985 TV 드라마 작가 연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