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브리튼 화가 브리턴 리비에르(Briton Rivière, 1840~1920)의 1892년작 〈키르케와 율리시스(오디세우스; 오뒤세우스; 오뒷세우스)의 친구들(Circe and the Friends of Uly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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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한반도 휴전선 이남지역에는 이른바 “말하듯이 글써야 한다; 말들리듯이 글읽혀야 한다”고, 때때로 키르케(Circe; Kirke)의 주술(마법; 요술; 사술; 환술; 마술)에 홀린 듯이 무분별하게 맹목적으로 지독하게, 미신하거나 맹신하는 입말주의(구어주의; 口語主義)에 강박된 작가, 지은이, 필자, 저자, 학자, 지식인, 편집자, 출판언론인, 독자, 글선생, 글학생이 아주, 워낙, 바글바글하게 많은 듯이 보인다. 그들은 심지어 엄밀하고 정연하며 정확하다고 자랑되는 논문(여태껏 이른바 “수필” 따위라고 비일비재하게 오인된 에세이)과 논저(논픽션; nonfiction)마저 소설처럼 쓰이고 읽혀야 한다고 미신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마혼은 오히려 “글쓰듯이 말해야 한다; 글읽히듯이 말들려야 한다”고 (정확하게 정밀하게) 상기하며 강조하는 손글주의(글말주의; 문어주의; 文語主義)를 제안하고프다. 왜냐면, 일례로, “손글”은 “입말”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낱말일뿐더러 “모든 글을 입력하는 자판(字板)”도 결국 “인간의 손(手)”으로써 작동되는 기계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컨대, 창조성이나 창의성을 금과옥조로 삼거나 뻔질나게 강조해대는 예술가, 철학자, 과학자, 인문학자로 자처하거나 타처(他處)된는 작자들이 입말주의(구어주의)를 미신하거나 맹신한다면, 그들의 창조결과들이라고 자인타인(自認他認)되는 것들은 입말(구어)만큼이나 엉성하고 허술하며 조잡하고 무분별해서 이른바 술술 휘리릭 읽히고 이른바 “명쾌하게! 그러니까 맹쾌하게!” 후루룩 뚝딱 이해되리만치 진부하고 식상한 것들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그런데 그토록 술술 매끄럽게 휘리릭 읽히니까 맹쾌하게 후루룩 뚝딱 이해된다고 착각되는 진부하고 익숙한 상투적인 것들이 과연, 정녕, 설마 “창의(創意)되고 창조된”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것들일까? 술술 쉽게 후루룩 이해된다고 얼렁뚱땅 착각되는 해묵은 것들이 새롭게 창조된, 창의된 참신한 것들일 확률은 얼마일까?
술술 후다닥 쉽게 읽혀서 헐레벅떡 버럭버럭 이해된다고 착각되는 것들이야말로 뇌세포에 바락바락 주입되고 허겁지겁 각인되어 달달달 암기된 얼렁뚱땅한 것들, 입시용·시험용·멜로드라마용 지식들, 통념·편견·고정관념들, 자장가들, 앓는소리들이 아니련가.
그래서 법조계, 법학계, 과학계, 철학계를 위시한 각종 인문학계에서 전용되는 안이하고 엉성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전문용어들과 지독하게 무분별한 비문(非文)들을 어려워하고 심지어 존경하거나 경외하기마저 하는 미신도 만연한다.
더구나 그따윗것들만 겨우 술술 찔끔 읽었다고 맹쾌하게 벌컥 발끈 이해하는(그러니까 이해하지도 못하고 암기한 것들을 역시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술술 대충 읽었으니 맹쾌하게 이해한다고 어영부영 착각하는) 미신.
미신은 본디 미개하고 동물적이며 원시적인 것이다.
유인원 일족이 이윽고 입말하면서부터 비로소 인간의 길로 들어서기 직전에 그들의 입말은 아직 컹컹 짖어대는 개소리나 꿀꿀거리는 돼지소리나 꼬꼬댁거리는 닭소리나 아기의 옹알이처럼 유치하고 모호한 음향신호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인원 일족은 어느 날 동굴벽에나 암벽에 그림을 새기고 점토판에 문자를 새기면서부터 비로소 인간의 길에서 가까스로 걸음마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입말주의(구어주의)는 동물주의(animalism), 미개주의(savageism), 원시주의(primitivism), 유아주의(infantilism), 퇴행주의(degenerativism), 의고주의(archaism)일 가능성이 지극하게 짙디짙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직장인은 딱정벌레로 변신한다. 이런 변신과정이 과연 입말로써 묘사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입말주의(구어주의)는 원시주의나 퇴행주의와 다르지 않다. 엉성하고 무분별하며 막연하고 동물적인 것이 입말이다. 오히려 그래서 입말주의자(구어주의자)들에게는 여태껏 입말(구어)이 손글(글말; 문어)보다 더 쉽게 더 맹쾌하게 이해된다고 착각되었다.
그러나 인간다움은 (인간다움의 개념과 기준조차 아직 엉성해서 지극히 석연찮거늘) 입말로 씨불리기보다는 손글로 쓰여야 더 확연해진다.
그러니까, 에혀~ 여전히, 고속생활도 모자라 초고속생활을 (대관절 누구로부터, 누구“들”로부터, 무엇으로부터, 무엇“들”로부터?) 재촉당하고 강요당하는, 이토록 초좃한 마혼은, “잠정적인” 결론부터 술술 후르륵 글써버리련다, 글써야 한다.
인간이 티끌만치라도 더 나아지려면 인간의 언어는 입말을 닮아가지 말고 손글을 닮아가야 한다. 왜냐면 특히 입말은 인간의 어휘를 빈약하고 무분별하게 졸여버리지만 손글은 어휘를 풍부하게 정확하게 정밀하게 활성화시키므로, 인간은 손글쓸수록 더 정확하게 더 정연하게 더 풍부하게 더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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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그림은 스위스 화가 쥘 퐁타네(Jules Fontanez, 1875~1918)의 〈까막잡기(Colin-maillard)〉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