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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현장에서 시가 탄생하다
진료 현장을 시로 그리는 것은 '의사시인'들에게는 비교적 수월한 작업이다. 온종일 몸담고 있는 진료실이야말로 시의 탄생 장소이기 때문이다. 일상이 되어버린 죽음을 시에 녹여내는 것도 의사시인이 해야 할 과제이자 숙명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있다는 사실을 늘 보아 왔기 때문이리라.
죽음이란 삶의 완결을 뜻하지만 예상치 못한 죽음은 서사의 중단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땐 무엇이 위로가 될까. 사회적 거대 담론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투명한 유리창이 하늘을 나는 새들에겐 치명적인 벽이 되는 것처럼 진심이 담기지 않는 의사의 처방은 우울한 쪽지일 뿐이다.
철학에서는 죽음의 네 가지 특성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반드시 죽으며(필연성, inevitability), 얼마나 살지 모르고 (가변성, variability),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다(예측불가능성, unpredictability),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편재성, ubiquity). 사실 이런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진료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에게 치유와 회복, 소생의 길로 인도하지만, 때로는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진료 현장과 죽음의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불가항력의 순간은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그들은 맞닥뜨리는 모든 현장을 사유의 공간으로 삼고 시에 접목한다.
이런 분위기가 잘 녹아있는 두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나를 깨워줘, 김기준』와 『바람의 이름으로, 한국의사시인회 제11시집』에 수록된 시와 산문을 읽으며 환자들과 함께한 슬픔을 펼쳐본다. 하늘에 청진기를 대는 심정으로.
나를 깨워줘, 김기준 산문집
『나를 깨워줘』는 의사로서의 고뇌와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진솔하게 드러낸 글 들이다. 많은 질병은 의료 현장을 벗어날 수 없지만, 의학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최근 눈부신 의학적 성과에도 환자와 의사 사이 대화와 설명 부족으로 불신의 벽은 오히려 높아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감을 전제로 한 적극적인 소통뿐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이해도 필요하다. 여기에 딱 맞춤한 시인이 바로 김기준 시인이다. 시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꼽고, 마취 의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역시 환자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공감이라고 말한 그의 시들을 따라가 본다.
삶이 뭔지 모르겠다는 이 친구야
중환자실 가본 적이 있니
삶과 죽음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그곳
하얀 조명에
밤도 낮도 구분 없이
씩씩 인공호흡기 돌아가는 소리
삑삑 모니터 깜박거리는 소리
하나 둘 셋 넷.... 여기저기 심폐소생술
의료진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소리
생로병사, 삼계제천三界諸天이 다 거기에 있어
-「회심」, 부분
회심(會心)이란 본디 마음에 흐뭇하게 들어맞거나 혹은 그런 상태를 뜻하지만, 위 시의 제목인 회심(回心)은 마음을 돌이켜 과거의 생활을 뉘우치고 신앙에 눈을 뜬 상태를 말한다. 삶이 뭔지 모르겠다는 친구에게 중환자실을 소개한다. 중환자실은 입원했다가 퇴원한 사람들이 "만약 지상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지옥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상상 그 이상이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그곳"이야말로 회심에 이르게 하는 가장 성스러운 장소라고 알려 준다."생로병사, 삼계제천三界諸天이 다 거기에" 있다고.
운구를 해 보면 안다
저 길이 곧 나의 길이라는 것을
운구를 하다 보면 철이 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언젠가
친구를 운구해 보면
이윽고
깨닫게 된다
먼 길 가는 길이 이미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공부」, 부분
공부는 교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모든 현장이 바로 교실이다. 친구를 운구하는 것은 자신을 운구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 앞, 차마 빈소에도 들어가지 못한 친구들이 땅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운구는 하늘이 주신 기회이자 참다운 공부이다" 그것은 마치 캄캄한 관속에 들어가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임사 체험과 같은 것이다. "날 때 나는 울었지만 주변사람들은 웃었다. 이제 내가 죽을 때 주변사람들은 울지만 나는 웃는다.”는 인디언 격언처럼 나도 죽을 때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선생님 제 병을 제가 잘 아는데
마취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요
(중략)
우리 모든 것 하늘에 맡기죠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저 성당 다니지만 냉담자인데요
나도 교회 다니지만 비슷해요
두 시간에 걸친 수술 후
회복실에서의 첫마디
나 살아있는 건가요
-「악성 고열증」, 부분
의사인 내게도 생소한 '악성 고열증'은 마취의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마취 관련 합병증이다. 이름처럼 악명 높아 체온이 분당 0,5도씩 상승하여 43도 이상으로 치솟기도 한다. 빨리 조처를 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기도 하는 위중한 질환이다.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서 다시 만난 환자와 마취의사. 둘은 손을 꼭 붙잡고 서로에게 마음속 말을 전한다. '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너로 하여 다른 어미들의 눈물이 마를 수 있다면
너에게는 또 다른 형제들이 생기는 것이고
나에게는 또 다른 너가 생기는 것이니까
-김기준, 「나의 천사 나의 아가야」 부분
의사라도 죽음 앞에서 마냥 초월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뇌사(腦死)는 외상과 같은 심각한 사고를 당해 뇌간을 포함한 전반적인 뇌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뇌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회복 및 소생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뇌사상태로 고생하다가 모든 것 다 내어주고 떠난 어린 영혼이 있다. 생후 9개월인 아이가 무슨 이유인지 하늘나라로 떠나려 한다. 그것도 모자라 심장과 폐, 간과 콩팥을 꺼내 다른 아이에게 주고 떠나려 한다. 묵묵히 지켜보는 의사는 하늘로 돌아가 다시는 아프지 말라고 기도하는 수밖에.
『나를 깨워줘』는 생과 사가 교차하는 일촉즉발의 순간에도 아낌없이 자신을 불태우는 구도자의 기록이다. 죽음을 응시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구원의 손길이다. 말과 행동을 결코 가볍게 해서는 안 되리라는 신앙인의 다짐이다. 때론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며 통곡하는 한 인간의 고뇌이다. 읽을수록 따스함이 배어 있고 정갈함이 더해지는 영혼의 숨결이다.
바람의 이름으로, 한국의사시인회 제11시집
하나의 질환에 대해 병인과 치료, 예후까지 정확히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매뉴얼에 따라 진료 절차를 진행하더라도 각각의 단계마다 새로운 변수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와 환자 사이 질병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판이하기 때문에 텍스트에만 의존했다간 오히려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한권의 시집을 읽고 사조를 분류하고 시인의 언어를 정의하는 것 역시 애시당초 불가능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병을 분류하고 처방하는 일에 길들여진 탓에 턱없이 무모한 작업을 시도해 본다. 서툰 문진과 어설픈 메스로 시를 분석한다.
실컷 엄마에게 얻어맞고 벽장 속에 고립된 작은 섬은 무서움을 쫓기 위해 자신의 작은 고추를 세우고 발가벗은 그녀의 아랫도리 불러내곤 했다.
두렵고 징그럽기도 하지만 자꾸 만지고 싶은 그 금단의 화사花蛇, 밤마다 꿈속으로 기어 나와서 여기저기 꿈틀거린다
십 년을 넘게 그는,올 때마다 진료실에다 수많은 뱀들을 풀어놓고 간다.
-김승기, 「오이디푸스」 부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이가 부모에 대해 성적 욕구를 느끼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대타자의 부재나 어머니로 상징되는 사랑의 부재나 왜곡은 자아의 형성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격 장애나 다중 인격으로 발현하면 이를 마주하는 의사도 난감할 수밖에.
환자들은 안다.그녀의 처방을 삶의 책갈피처럼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그래서 고인의 원본 그대로 처방해 달라는 주문을 고수한다.의사들은 안다.조금만 고집이 있어도 안다.낯선 처방전을 옮겨 적는 일이 곤혹스럽다는 것을.그러나 그녀의 것은 아니다.오히려 반갑다.자작나무가 남긴 푸른 잎이니까.
-한현수, 「처방을 베끼다」 부분
의사들은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유명 의사의 처방을 가지고 와서 그대로 처방해 달라는 환자말이다. 환자의 요구에 응하는 때도 있겠지만, 대개의 의사는 불편함을 드러내고 만다. 그런데 오히려 반가운 때도 있다니. "자작나무가 남긴 푸른 잎"처럼 혈맥이 싱싱하고 "삶의 책갈피"처럼 감동이 묻어있는 처방전이라니. 이런 처방 하나 남기고 떠난 의사라면 먼길 떠나고도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불만에 찬 환자가 오면
마음이 삐그덕거린다
선한 의지가 뻑뻑한 문을 열고
나가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환자는 반대로 주장할 지도 모른다.
작용 반작용 심리의 물리학
누가 먼저 밀었을까?
-홍지헌, 「누가 먼저 밀었을까」 부분
의사와 환자 사이의 '라뽀'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믿음이 굳건하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라뽀가 깨지면 모두가 불편하고 속상해한다. 상호 불신의 원인이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곰곰 생각해보아도 딱히 떠오른 것은 없다. 환자는 병원을 옮기면 그만이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의사는 "작용 반작용 심리의 물리학"을 되뇌며 혼자서 속앓이를 하게 된다.
할머니도 아기처럼 손을 꽉 잡는다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인지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담에 또 뵈요 할 때 마다
꼭 잡는다
-박권수, 「기억이 닿는 곳까지 -나리 요양원」 부분
뇌졸중, 파킨슨병,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들이 입소하는 요양원에 치매 할머니도 누워있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마지막 자신의 정체성까지 상실하고 말 테니까. "봄꽃 같은 날들 재차 며칠이냐고 물어보지만 입만 오물거리고" 만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와상인 할머니도 병문안 온 손자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눈을 깜박이거나 손을 꼭 잡는 것으로 마지막 의사를 표현한다. 생의 종말을 향해 기억이 닿는 곳까지 슬픔이 동행한다.
710호 병실 기둥 뒤 3시 방향
푸른 하늘이 비추는 곳
부부 다툼 직후 목을 맨 남자
혼수상태로 3년이었네
-서화, 「신(神)의 노래」 부분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자살이란 단어를 순화한 것이겠지만, 어느새 혐오 단어가 되고 말았다. 자살 행위는 사건을 미화하지도 일탈에 대해 어떠한 빌미도 제공하지 못한다. 자살은 두 가지 측면의 고찰을 요구한다. “자살은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는가”이며, “자살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인가”다. 자살은 결코 낭만적 행위가 아니다. 끔직한 선택이 주위 사람들에겐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아버지 삼우제에
어머니마저 따라가자 눈물 한방울 남지 않았다
슬픔을 봉합하고도
눈알은 더욱 뻑뻑해 졌다
인공 누액을 가지고 다니며
우는 법을 다시 배웠다
-김연종,「우는 법을 다시 배우다」 부분
천붕(天崩)이라 했던가. 부모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만큼 큰 충격이리라. 더군다나 아버지 삼우제에 어머니마저 따라갔다면 슬픔의 농도는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슬픔을 봉합하고도 눈알은 더욱 뻑뻑해"졌지만, 세상의 풍파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앓아눕지도 않고
침대 식탁에 앉은 자세로
조는 듯
자는 듯
넋 나간 남편 앞에서
마지막 한 마디
“출근해야지”
“출근해”
-권주원, 「안해의 임종」 부분
인생에서 가장 근 슬픔을 꼽으라면 단연 배우자의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남편의 출근을 걱정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하직했다면, 그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슬픔은 우리에게 부단한 망각을 요구한다. 애도 작업이란 상실의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새로운 대상으로 옮김으로 슬픔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다. "3년이 지난, 아니 33년 쌓인 추억들 고이 접어서 내 가슴 한켠에 묻어놓고 이제 새 안주인 맞이하고 싶네."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보내며, 슬픔을 극복하려는 화자의 의지가 갸륵하고 단호하다.
하늘에 청진기를 대다
삶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부조리와 모순들로 가득하다. 이런 모순들은 무의식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원형은 집단 무의식 안에 존재하는 보편적이고 상징적인 패턴이자 이미지이다. 이런 무의식은 여러 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 유형이며 신화와 종교의 원천이기도 한 원형은, 때로는 시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시 쓰기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기억의 반추이고 기억의 확대 재생산이다. 의사시인의 시 쓰기 역시 수없이 맞닥뜨린 환자의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문학적 표현의 극대화로 더욱 많은 사람과 공감을 공유하는 것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시야도 그만큼 넓어진다. 그러나 생의 가능성은 그만큼 더 작아진다. 최후에 남는 것은 단 한 번 쳐다보고 단 한 번 숨을 쉬는 것이다. 그 순간 인간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 생애를 바라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이렇게 말하는 카프카가 다정해 보인다. 그의 말대로 나이 들수록 시야가 넓어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생의 가능성이 작아지는 것은 확실하다. 마지막 순간 전 생애를 바라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생애를 바라본다면 생의 어떤 장면이 떠오를까.
언제부터일까, 가끔 진료실에서 길을 잃는다. 꽉 막힌 진료실이 죽음의 고도처럼 고독해지면서 그 증세는 더욱 깊어진다. 그곳은 심해처럼 깊고 아득하다. 그 무엇도 그립지 않고 모든 게 부질없어 보인다. 그럴 때, 눈을 감고 내면의 풍경을 그린다. 진료실에서 길을 잃거나 미궁에 빠질 때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늘에 청진기를 대어" 보는 것이다.
< 문학청춘>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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