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사집 제17권 / 서(序)
보성선씨족보 서(寶城宣氏族譜序)
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년) 6월 3일 ~ 1879년(고종 16년) 12월 29일
-------------------------------------------------------------------------------
선씨(宣氏)의 세보(世譜)를 내가 잠깐 보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이는 동국의 장원(將苑)입니다. 어떻게 국가의 무신(武臣)이 선씨 한 가문에만 모였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밀히 제공들이 세운 공의 처음과 끝을 살펴보고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며 존경심이 생겨 말하기를 “선씨를 어찌 장수의 집안으로만 말하겠습니까. 이 족보는 ‘소화충의록(小華忠義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우리 열성조(列聖朝)에 간혹 살아서 훈적(勳籍)에 오르고, 혹은 죽어서 증전(贈典)을 내리기도 하였다. 선조(先朝) 때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의론을 채집하여 전일의 공열(功烈)을 후하게 보상했으니, 오충(五忠)의 옛 사우(祠宇)는 사액 현판 글씨가 빛났고 애영(哀榮)에 유감이 없었다.
양사씨(良史氏)가 반드시 이미 거두어 명산의 곳집에 들였으리니, 굳이 한 집안의 문헌에 기대지 않아도 전해지리라. 하물며 정진(正鎭) 같이 구구한 사람이 붓을 적셔 그 수보(修譜)하는 일을 돕는다 하더라도 그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정진이 선씨의 족보에 감탄하며 남다르게 여기는 것으로 또 다른 한 가지가 있다. 청컨대 그 말을 기술하여 서문을 청함에 색책(塞責)하리라.
선씨가 동으로 온 이래로 가문의 명성이 어찌 중국의 대기수(大氣數)와 서로 부합되는 듯한 것인가. 선씨는 본래 중국 사람이다. 바야흐로 홍무(洪武 명나라 태조(太祖)의 연호)가 한번 다스리던 초기에 만물이 다 성군을 우러러보았는데, 문연공(文淵公)은 곧 해외의 먼 곳에서 힘을 쏟아 한 성씨가 비로소 터를 닦는 조상이 되었고, 평양공(平襄公)이 난을 평정했을 때는 성화(成化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의 태평한 즈음이었다.
그리고 부수공(副帥公)이 무력을 사용한 때는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의 운세가 성한 때였다.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의 사이에 이르러 만사가 속상할 때에 수사공(水使公)도 불행했으나 전대(專對)로 명성을 날렸고, 영장공(營將公)이 또 불행했으나 적을 무찌르다가 살신성인하였다.
이후로 중국이 망하자 선씨도 다시 드러난 사람이 없었으니, 어찌 영현(英賢)의 태어남과 가덕(家德)의 성쇠가 낱낱이 기수(氣數)에 관련되겠는가마는 이는 이상할 것이 없다. 《주역》에 이르기를 “천지가 변화하면 초목이 무성하고, 천지가 닫히면 현인이 은둔한다.[天地變化 草木蕃 天地閉 賢人隱]”라고 하였으니, 기기(氣機)가 서로 감화됨이 이와 같다.
구름이 일면 신룡(神龍)이 변하여 운수를 타 함께 기뻐하고, 솥이 가라앉고 소반이 꺾이면 시운(時運)과 함께 침몰하는 것은 실로 그 이치이다. 중국의 사대부로 공신(功臣)의 집이나 성한 문벌의 후예가 오늘날 옛적의 성세(聲勢)가 있던가. 선씨는 동방에서 살면서 바로 저 중국과 그 기수를 함께 했으니, 이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선씨가 다행히도 우리나라에서 살았고, 우리나라에는 춘추(春秋)의 의리가 지금까지 실추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선씨가 그들의 세덕(世德)을 공공연하게 세상에 말하였고, 기어코 계술(繼述)하여 감추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가령 중국에서 살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또 나는 향기로운 난초에는 뿌리가 있고, 맛이 단 샘물에는 근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대체로 뛰어난 사람이 있다 해도 반드시 때를 만난 뒤에 스스로 나타나는 법이다. 이러니 훗날 국가에 일이 생겨서 나라를 위해 죽고 국가의 원수를 갚을 사람이 어찌 선씨에 있지 않음을 알겠는가. 선씨는 자애(自愛)하시라. 또 숭정 말에 중국의 충의(忠義)의 집안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살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큰 이름을 이룬 사람이 없으니 훗날을 기대하는 바가 비로소 선씨와 같지 않음이 없다. 원컨대, 두루 이 말로 고하고 싶다. 병오년(1846, 헌종12) 5월에.....
[註解]
[주01] 선조(先朝) …… 없었다 : 선조는 순조(純祖)를 말한다. 이 내용은 순조 때 오충사(五忠祠)를 사액한 경위와 오충사에 대한 기정진
의 생각을 적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순조30년 10월 9일자 기록에 “고 감사(監司) 선윤지(宣允祉) 등 5세(世)의 사액을 ‘오충
(五忠)’이라고 내렸는데, 예조에서 그 후손들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청하였기 때문이었다.”라고 한 내용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0 〈전라도 보성군〉의 사원 조에서 오충사가 1830년에 사액되었다고 하며, 안렴사(安廉使)를 지낸
선윤지(宣允祉, ?~?)ㆍ공신(功臣) 유성군(楡城君)인 선형(宣炯, 1434~1479)ㆍ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 1550~1598)ㆍ안동
영장(營將) 선세강(宣世綱, 1576~1636)ㆍ수사(水使) 선약해(宣若海, 1579~1643)를 배향했다는 것을 말하였다.
오충사는 현재 전남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751에 소재해 있다. 한편, 애영(哀榮)은 임금이 신하에 대해서 생전과 사후 모두 영광스
럽게 되도록 해 주었다는 말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살아서는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죽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애통하게 여
긴다.[其生也榮, 其死也哀.]”라는 말이 있다.
[주02] 바야흐로 …… 살신성인하였다 : 이는 보성선씨의 시조(始祖)인 선윤지를 비롯한 선형ㆍ선거이ㆍ선세강ㆍ선약해 등의 활약상을
간략히 적은 것이다. 문연공(文淵公)은 선윤지를 말한다. 선윤지는 원래 명나라의 문연각(文淵閣)의 학사(學士)로 사신의 명을 받
들고 고려에 왔다가 귀화하였다.
그 후 고려에서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어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우거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조선
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남 보성에서 ‘퇴휴당(退休堂)’이라 자호(自號)하며 은거하였다. 평양공(平襄公)은 선형을 말한다.
선형의 자는 명여(明汝)이고, 평양은 시호이다. 1451년(문종1)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467년(세조13)에 비
록 무장이지만, 성품이 염간(廉簡)하다고 하여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고, 그해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녹훈되고 황해도 병마사ㆍ수군절도사에 임명되는 동시에 유성군(楡城君)에 봉해졌다.
1477(성종8)년에는 지중추 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사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수공(副帥公)은 선거이를 말한다. 선거
이의 자는 사신(思愼)이요, 호는 친친재(親親齋)이다. 1569년(선조2)에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다음 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7년(선조20)에 당시 조산 만호(造山萬戶)였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녹둔도(鹿屯島)에서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막아 공
을 세웠고, 이듬해에는 거제 현령ㆍ진도 군수를 역임하고 이어 청백(淸白)으로 성주 목사를 거쳐 1591년에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
었다.
임진란 때는 한산도 해전에 참가하여 전라 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또한 1593년 행주산성 전투 때 참가하여 권
율이 적을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ㆍ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에는 울산 전투에 참가, 명
장 양호(楊鎬)를 도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순신과 절친한 사이로 전투에서도 서로 도와 이름이 높았다.
1605년(선조38) 선무 원종공신 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었다.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이 쓴 선거이의 행장이 있다.
수사공(水使公)은 선약해를 말한다. 선약해의 자는 백종(伯宗)이다. 1605년(선조38)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
다.
1631년(인조9) 비변사 낭청(備邊司郞廳)을 역임할 때 문무를 겸비했다고 하여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행(使
行)하였다. 이때 숭명 배청(崇明排淸)의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품계
가 승진되고 진귀한 하사품도 받았다. 뒤에 평산 부사ㆍ경상 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영장공(營將公)은 선세강을 말한다. 선세강의 자는 사거(士擧)요, 호는 매곡(梅谷)이다. 1603년(선조36)에 무과에 급제하여 1618
년(광해군10)에 평안도 벽단진 첨사(碧團鎭僉使)를 제수 받았다. 그 뒤 홍주 영장(洪州營將)ㆍ안동 영장(安東營將)을 역임하였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함께 경기도 쌍령(雙嶺)에서 우세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죽였
으나 끝내 패전, 전사하였다.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한편, 원문의 ‘전대(專對)’는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로(子路)〉에 “시경 삼백 편을 외우면서도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혼자 처리해 내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웠다 한들 어
디에다 쓰겠는가.[誦詩三百,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亦奚以爲.]”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또한 ‘성인(成仁)’과 관련해서는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해서 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루는 일이 있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라고 하였다.
[주03] 중국이 망하자 : 원문의 ‘적현(赤縣)’은 중국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 추연(鄒衍)이 화하(華夏)의 땅을 적현신주(赤
縣神州)라고 칭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74 孟子荀卿列傳》 또한 ‘육침(陸沈)’은 물이 없는데도 육지가 그대로 가라앉아 버
리는 것으로, 전하여 나라가 완전히 망해 버리는 것을 뜻한다.
[주04] 주역에 …… 은둔한다 :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천지가 변화하면 초목이 무성하고, 천지가 닫히면 현인이 은둔하니,
역(易)에 이르기를, ‘주머니 끈을 묶듯이 하면 허물도 없고 칭찬도 없다.’라고 하였으니, 삼가야 함을 말한 것이다.[天地變化, 草木
蕃, 天地閉, 賢人隱, 易曰括囊, 无咎无譽, 蓋言謹也.]”라고 하였다.
[주05] 구름이 …… 것 : 원문의 ‘운증 용변(雲蒸龍變)’은 구름 기운이 성대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신룡(神龍)이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는
것으로, 영웅호걸이 자신의 뜻을 활발히 펼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정침 반절(鼎沈盤折)’의 정과 침은 각각 솥과 소반을 뜻하며, 한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이 둘이 ‘가라앉고’, ‘꺾였다’는 것은 결국 나라가 망했다는 의미이다.
솥과 관련해서는 주(周)나라가 망한 뒤에 국보(國寶)인 구정(九鼎)이 사수(泗水)에 빠졌다 하였는데 진 시황이 사람을 시켜 건지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소반과 관련해서는 한 무제(漢武帝)가 백량대(柏梁臺)에 20길이나 높은
승로반(承露盤)을 구리쇠로 만들었는데, 위(魏)가 한(漢)을 빼앗아 승로반을 꺾어서 위의 수도로 옮기려다가 무거워서 옮기지 못했
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주06] 공신(功臣) : 원문의 ‘대려(帶礪)’는 산려하대(山礪河帶)의 준말이다. 이는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개국 공신들을 책봉
하면서 “황하가 변하여 끈처럼 되고, 태산이 바뀌어 숫돌처럼 될 때까지, 그대들의 나라가 영원히 존속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도
록 할 것을 맹세한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家永寧, 爰及苗裔.]”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
寶城宣氏族譜序
宣氏世譜。予乍閱之。卽愕然曰。此東國將苑也。何 王家虎臣。萃于宣氏一門也。旣而細考諸公所立之首末。不覺斂衽而起敬曰。宣氏豈但以將家論乎哉。此譜雖謂小華忠義錄。非過言也。我列聖朝。或生而勳籍。或沒而贈典。及至先朝。採朝論篤前烈。五忠舊祠。玉索輝暎。而哀榮無遺憾矣。良史氏必已收入名山之藏。不必有賴於一家之文獻而後傳。况如正鎭之區區。雖欲泚筆以相其修譜之役。其奚以有無。雖然正鎭之所咨嗟嘆異於宣氏之譜者。又別有一焉。請述其語。以塞弁卷之請可乎。宣氏東來。家聲何其與中州大氣數。若相符會也。宣氏本中州人。方 洪武一治之初。萬物咸覩。而文淵公乃効力於海外遐遠之地。爲一姓始基之祖。平襄勘亂。則成化亨泰之際也。副帥用武。則萬曆崇極之運也。曁乎 崇禎之間。萬事傷心。則水使公不幸而以專對有聲。營將公又不幸而以鏖賊成仁。自是之後。赤縣陸沈。則宣氏亦不復有聞。豈英賢之挺生。家德之興替。一一有關於氣數耶。此無足怪者。易曰。天地變化。草木蕃。天地閉。賢人隱。氣機之相感如此。雲蒸龍變。乘運而同休。鼎沈盤折。與時而沈淪者。固其理也。中州士大夫帶礪之家。華閥之後。今日有昔時聲乎。宣氏居東。而乃與彼中州者。同其氣數。則此爲異事。然宣氏幸居東土。東土春秋之義。至今有不墜者。是以宣氏得以其世德公誦於世。期於似述。而不欲掩蔽。若使遂居中土。烏能如是。且吾聞芳蘭有根。醴泉有源。蓋雖有英賢。必遇時而後。有以自見。他日國家有事。死綏而敵愾者。安知不在於宣氏乎。願宣氏自愛。又聞崇禎之末。中州忠義之家。多有來居東土者。於今雖未有顯聞。所期於異日者。未始不與宣氏同。願徧以此諗之。丙午五月。<끝>
노사집 제17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