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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처사 기공 행장(處士奇公行狀)
공은 휘가 정룡(挺龍)이고 자가 현경(見卿)이니 행주(幸州) 사람이다. 그 선조는 기자(箕子)에서 나왔고 기씨(奇氏)는 대대로 이름난 이들이 많다. 판중추부사 건(虔)은 청백리에 녹훈되었는데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병을 핑계로 치사(致仕)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후손 물재(勿齋) 진(進)과 아우인 복재(服齋) 준(遵)은 기묘당적(己卯黨籍)에 들었는데, 복재가 세상을 떠나자 광주(光州) 고룡(古龍)의 골짜기에 은거하여 자손들이 그대로 거기에 살았다. 물재의 아들 대승(大升)은 세상에서 고봉(高峰) 선생이라 일컬어진 분인데 그의 형이 참봉 대림(大臨)으로 공의 5대조이다.
증조는 의헌(義獻)이고, 조부 침(琛)은 권지 승문원 부정자를 지내고 일찍 세상을 떠났고, 부친은 진성(震省)이니 모두 문행(文行)으로 가업을 계승하였다. 모친 평양 박씨(平陽朴氏)는 장령에 추증된 상현(尙玄)의 딸이다. 공은 숭정(崇禎) 후 경술년(庚戌年, 1670, 현종 11) 9월 16일에 고룡리(古龍里)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바탕이 도에 가까워 어려서부터 입으로 비속한 말을 하지 않았으며 기국과 도량이 우뚝하여 기쁘거나 성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과거공부를 하였으나 공의 뜻이 아니었다. 여러 번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모부인(母夫人)이 말하기를,
“네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거라.”
하니,
이때부터 문을 닫고 들어앉아 의리(義理)를 깊이 탐구하였으니, 견식이 정밀하고 분명하였고 문로(門路)가 매우 올바르게 되었다. 공의 장인 손재(遜齋) 광일(光一)이 공을 칭찬하기를,
“고봉(高峰) 이후의 단 한 사람이다.”
하였다.
공의 마음가짐은 겸허하여 세상의 모든 명리(名利)에 대해 나약한 사람처럼 물러나고 피하였으니, 어떤 이가 자신을 경학지사(經學之士)라 지목하면 그때마다 움츠려들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였다.
평소엔 아무 일 없는 듯이 편안하게 지내다가도 성리(性理)의 심오한 이치와 예가(禮家)의 차이나는 의견을 논할 적에는 거침없이 막히는 것이 없었으나 또한 묻지 않으면 응하지 않았다. 또 자기 얘기를 고집스럽게 주장하기 좋아하지 않아 그저 “나의 견해는 이와 같은데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다.”라고만 말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응당 자신의 심신(心身)에 진실한 공부를 한다면 차츰 의(義)가 정밀하고 인(仁)이 완숙해짐에 이르러 자연히 털끝만큼의 거짓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단지 문자를 통해 그 나머지를 내놓을 뿐이라면 어찌상채(上蔡)가 앵무새와 같다고 한 기롱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전적으로 실행에 힘쓴 것이 이와 같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친이 병을 앓을 적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려드렸으며, 상을 치를 적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다. 모친을 섬길 적에는 기쁘고 즐거운 모습으로 대하고 한결같이 뜻을 받드는 것을 위주로 하여 좌우에서 심부름을 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한번은 잠깐 외출했다가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지고 돌아오자 모부인이 걱정하였다. 그 후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이미 연로했음에도 상중에 얼굴빛이 검어지고 몸이 앙상해져 애통함이 고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제사는 검소하고 정갈하게 지냈으며 속기(俗忌)에 구애되어 제사를 폐하는 일이 없었다. 제삿날에는 바깥일을 보지 않았고 혹한에도 반드시 목욕재계하며 늙어서도 제사를 주관하였으니 그 진퇴가 볼 만하였다. 자신의 생일에도 부모님 생각에 종신토록 술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여러 아우들과 함께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르치고 보살핌에 각기 그 방도를 다하였다.
어린아이를 가르칠 적에는 한 번도 속이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으며,여러 자식들을 의리로 다스리고 동복(童僕)을 은혜로운 마음으로 대하였다. 〈규훈(閨訓)〉 15조목을 만들고 상례와 제례의 여러 예법에 이르기까지 또한 뽑아 적어 언해(諺解)하여 집안사람들이 익히게 하니, 규문(閨門) 안이 조정처럼 엄숙하여 무당, 여승, 중매쟁이 같은 부류가 감히 얼씬거리지 못하였다.
친족들 가운데 도리에 어긋난 일을 저지르면 자신에게 돌이켜 반성하였꼬 성내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끝내 모두 공에게 감복하였다.
허물어진 몇 칸의 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정도였고 종종 밥도 짓지 못하는 경우가 여러 날이었으나 태연하게 처신하며 한 번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고 입으로 ‘빈(貧)’ 글자를 말하지 않았다.
딸이 비단저고리를 지어 공에게 올리자 공이 말하기를,
“평소 어버이를 모시면서 가볍고 따뜻한 옷가지도 챙겨드리지 못했거늘 내 어찌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입으려 하지 않았다. 사양하고 받는 일은 오직 의리를 좇아 매우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취하지 않았고 남들 또한 감히 털끝만큼도 공에게 구하지 않았다.
한 수령이 관가의 곡식으로 구제하려고 했으나 공은 고사하고 받지 않았으니 그가 청렴하지 않음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똑 부러진 모난 행실과 과격한 논의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시비와 선악의 구분과 같은 경우에 있어선 단칼로 두 동강 내어 확고하게 뺏을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충담하고 화락하여 남들과 경쟁하지 않아화순한 기운이 밖으로 흘러넘쳤기에 보는 이들은 비린(鄙吝)한 생각이 절로 사라졌다.이 때문에 현명하거나 어리석은 사람, 존귀하거나 비천한 사람들에게 모두 환심을 얻었다. 고을 사람들에게는 더욱 공경을 다하여 자신이 나이가 많고 덕도 높다는 것도 생각지 않았다.
한번은 도적이 횃불을 들고 집에 쳐들어왔는데 공은 편안히 앉은 채로 동요하지 않았다. 도적이 떠나자 자제들을 나무라기를,
“어찌 이리도 놀라고 두려워하느냐.”
하였다.
남방의 풍속이 천연두를 몹시 기피하였다. 어떤 이와 손자의 혼사를 약조하였는데, 공이 그가 보낸 심부름꾼에게 말하기를,
“우리 손자가 아직 천연두를 앓지 않았는데, 그것을 모르셨소?”
하니, 혼사가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일을 통해 그 나머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관찰사와 어사가 번갈아 상소를 올려 공을 추천하였는데, 공은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두려워하며 망연자실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여러 아우들의 상례 때에 모두 후하게 염습(殮襲)하지 못했으니, 비록 재물이 있더라도 어찌 차마 나만 후하게 염습할 수 있겠느냐. 하물며 재물도 없는 경우에랴.그저 수족(手足)의 형체만 염습하더라도괜찮을 것이다.”
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738, 영조 14) 2월 16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원근의 인사들이 모두 탄식하며 말하기를,
“현인(賢人)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남방에는 사람이 없도다.”
하였다.
4월 8일에 집의 오른쪽에 있는 선영 아래에 안장하였다. 부인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남로(南老)의 딸이다. 아들은 제훈(齊勳), 홍훈(弘勳), 형훈(衡勳)이고 사위는 사인 양명호(梁命虎), 현명직(玄命直)이다. 계배(繼配)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만휘(萬輝)의 딸이니, 병훈(炳勳)과 표훈(彪勳)은 이씨 소생이다. 제훈이 요절하여 그의 아들 종순(宗淳)이 공의 제사를 실제로 주관하였다.
《낙암유고(樂菴遺稿)》약간 편이 집에 보관되어 있는데, 낙암은 고봉(高峰)의 옛 터로 공의 집 뒤에 있었다. 공이 늘 거기서 주위를 둘러보며 즐겼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공을 ‘낙암’이라고 불렀던 것이지 공 자신이 지은 호가 아니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공과 동시대에 살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상서이병상(李秉常)이 이 고을로 좌천되었다가돌아왔을 때 내가 그에게 묻기를,
“그대는 기(奇) 아무개를 만나보았습니까?”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기 아무개와 같은 현인을 가서 만나지 않았으니, 재상이 스스로를 낮춰 현인을 공경하는 의리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군요.”
하니, 이병상이 부끄러워하며 사죄하였다. 십수 년 이래로 공의 명성이 더욱 높아져 남방에서 온 자들은 공을 알든 모르든 모두 말하기를,
“독실하게 실천하는 군자이다.”
하였다.
나는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자를 공자께서 “아직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지 혼자서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공의 사적과 행실을 얻어서 천천히 살펴보니, 공이 이렇게 인정을 받은 것은 다만 하나의 겸(謙) 때문이었다. 겸은 매우 성대한 덕성으로 천지와 귀신도 모두 좋아하니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이른바 겸이라는 것은음성이나 웃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터럭만큼의 사욕과 거짓이라도 마음속에 섞여 있으면 필시 이처럼 깊이 남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공의 아름다운 자질과 깊은 수양으로 그 분수와 역량을 확충하여 위대한 업적을 다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내가 몹시 안타까워하는 점이다. 일찍이당인불양(當仁不讓)의 의리를 삼가 공에게 질정하고 싶었으나, 아 이제는 그럴 수가 없구나!
홍훈(弘勳)이 내게 와서 행장(行狀)을 부탁하였는데, 나는 우매하여 어찌 공을 제대로 알겠는가마는 삼가 손재(遜齋)의 문인 민사하(閔師夏)가 쓴 기록을 가지고 위와 같이 차례대로 서술한다. 또 감히 다음과 같이 총론한다.
“공과 같은 이는 옛 글에 이른바콩죽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도 그 기쁨을 다하는 자요,빈천(貧賤)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고 부귀(富貴) 때문에 안절부절 하지 않는 자요,자신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 자일 것이니 후세의 입언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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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처사 기공 행장:
저자가 기정룡(奇挺龍, 1670~1738)을 위해 쓴 행장이다.
[주02] 상채(上蔡)가 …… 기롱:
상채는 사양좌(謝良佐)의 호로, 송(宋)나라 정이(程頤)의 제자이다.《심경부주(心經附註)》권4에 사양좌가 당시 학자들을 평하기
를 “명리(名利)의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조금 쉴 수 있는 곳이니, 지금의 사대부야 어찌 말할 게 있겠는가. 말만 잘하는 것이 참으
로 앵무새와 같다.[透得名利關, 方是小歇處, 今之士大夫何足道? 能言眞如鸚鵡也.]”라고 하였다.
[주03] 어린아이를 …… 않았으며: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어린 자식에게 항상 속이지 않음을 보여주며 설 때에는 반드시 바르게 하며 머리를 기울여 듣지 않
는다.[幼子常視毋誑, 立必正方, 不傾聽.]”라고 하였다.
[주04] 화순한 …… 사라졌다:
황헌(黃憲)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후한(後漢) 때 황헌은 청수하고 총명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안자(顔子)에 비유되기까지 했는
데, 같은 고을 사람인 진번(陳蕃)과 주거(周擧)는 항상 말하기를 “두어 달만 황생(黃生)을 보지 못하면 마음속에 비린(鄙吝)한 생
각이 다시 싹터 버린다.[時月之間不見黃生, 則鄙吝之萌, 復存乎心.]”라고 하였다.《後漢書 卷53 黃憲列傳》
[주05] 그저 …… 염습하더라도: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일찍이 말하기를 “슬프다, 가난이여. 어버이가 살아계실 적에는 봉양할 수가 없고 돌아가신 뒤에
는 예를 행할 수가 없도다.”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콩죽을 먹고 물만 마실지라도 그 기쁨을 다해드리면 그것을 효도라 하는 것
이요,
수족(首足)의 형체만 염습하여 반장할 때에 덧널이 없더라도 자기 형편에 맞게만 하면 그것을 예라 하는 것이다.[啜菽飮水, 盡其
歡, 斯謂之孝. 斂首足形, 還葬而無槨, 稱其財, 斯謂之禮.]”라고 하였다.《禮記 檀弓下》
[주06] 이병상(李秉常)이 …… 좌천되었다가:
이병상이 계속해서 내직을 사양하자 1733년(영조 9)에 그를 외직인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보임시켰다.
[주07] 고을 …… 것:
《논어》〈자로(子路)〉에 나오는 내용이다. 자공(子貢)이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께서 “아직
안 된다.[未可也]”라고 대답하였다. “지방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면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께서 “아직 안 된다. 고을 사람 가
운데 선한 자가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자가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주08] 음성이나 웃는 모습:
《맹자》〈이루 상(離婁上)〉에 “공손한 자는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검소한 자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남을 업신여기고 빼앗는
군주는 남들이 자신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까 두려워 하니, 어찌 공손하고 검소할 수 있겠는가. 공손함과 검소함을 어찌 음성이나 웃
는 모습으로 꾸며서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09] 당인불양(當仁不讓):
인(仁)을 행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논어》〈위령공(衛靈公)〉에 “인을 당하여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當仁, 不讓於師.]”라고 하였다.
[주10] 콩죽을 …… 자: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일찍이 말하기를 “슬프다, 가난이여. 어버이가 살아계실 적에는 봉양할 수가 없고 돌아가신 뒤에
는 예를 행할 수가 없도다.”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콩죽을 먹고 물만 마실지라도 그 기쁨을 다해드리면 그것을 효도라 하는 것
이요,
수족의 형체만 염습하여 반장할 때에 덧널이 없더라도 자기 형편에 맞게만 하면 그것을 예라 하는 것이다.[啜菽飮水, 盡其歡, 斯謂
之孝. 斂首足形, 還葬而無槨, 稱其財, 斯謂之禮.]”라고 하였다.《禮記 檀弓下》
[주11] 빈천(貧賤) …… 자:
《예기(禮記)》〈유행(儒行)〉에 “선비는 빈천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고 부귀 때문에 안절부절 하지 않는다.[儒有不隕穫於貧賤, 不
充詘於富貴.]”라고 하였다.
[012] 자신의 …… 자: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자기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君子病
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라고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