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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4권 / 신도비(神道碑)
이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 난계 박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吏曹判書兼藝文館大提學蘭溪朴公神道碑銘 幷序)
외복(外服)의 나라에 악기가 있었던 것은 우리 조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명나라가 흥기할 때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와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가 모두 악기를 내렸으나 종경(鐘磬)이 음율(音律)에 맞지 않고 제악(祭樂) 팔음(八音)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헌왕(莊憲王 세종) 7년에 거서(秬黍)가 해주(海州)에서 나고, 8년에 경석(磬石)이 남양(南陽)에서 산생되자 왕이 이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吏曹判書兼藝文館大提學)이었던 박 선생에게 명하여 황조에서 내린 악기를 고찰하여 율려(律呂)를 만들라고 하였다.
10년 여름에 아악(雅樂)이 이루어졌다고 보고하니 종묘(宗廟) 헌가악(軒架樂)에 사용되는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이 모두 228개였다.
때마침 천자가 보낸 사자가 와서 선생이 제작한 아악을 듣고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아악이 바른 소리〔正聲〕을 얻었으니 동방에 이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선생은 율려로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장헌대왕의 성스러움이 있지 않았다면 선생이 비록 율려에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금석의 음악을 이룰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예기》에서 “성인이 음악을 만들어 하늘에 응하였다.”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순 임금 때에 벼슬자리에 있던 자들은 한낱 봉황이 와서 춤추고 모든 새와 짐승들이 너울너울 춤추는 것만을 보고 악관인 기(夔) 한 사람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상에서 명구를 두드리고 금슬을 타는 것과, 당하에서 도고를 펼쳐놓고 생황과 큰 종을 번갈아가며 쓰려한 것은 본래 순 임금의 생각이었다.
지금 거서가 해주에서 나오고 경석이 남양에서 생산됨에 장헌왕께서 처음 선생에게 명하여 오음을 바로잡고 12율을 화합하게 하여 종묘ㆍ사직ㆍ백신을 밝게 이르시게 한 것은 순 임금이 기에게 명하여 음악을 흥기시킨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장헌왕이 일찍이 선생에게 효유하기를 “자고로 음악을 제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위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아래에서 혹 따르지 않기도 하고, 아래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에서 혹 들어주지 않기도 하며 비록 위아래가 모두 이루고자 하더라고 천시(天時)가 이롭지 못한 경우가 있다. 지금 나라가 태평하여 일이 없어 내 뜻이 먼저 정해졌으니 경은 마음을 다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마라.”라고 하였다. 선생이 명을 받은 지 3년 만에 아악(雅樂)이 크게 갖추어졌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선생의 휘는 연(堧)이고 자는 탄보(坦父)이며 성은 박씨(朴氏)이고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고려 때에 휘 문빈(文彬)이라는 분이 있어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냈는데 강헌왕(康獻王 태조)이 개국을 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초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으니 시호가 문절(文節)이고 선생에게는 조고부가 된다.
증조 휘 신열(臣悅)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조부인 휘 시용(時庸)은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천석(天錫)은 삼사 좌윤(三司左尹)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경주 김씨로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 오(珸)의 딸이다.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덕기(德器)가 침착하고 진중하여 부모를 섬기며 효성을 극진히 하였고, 글을 엮으면 찬란히 문장을 이루었다. 개연히 전례(典禮)에 뜻을 두어 문헌을 널리 궁구하였으며, 악률에 더욱 정진하여,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격부(擊拊)의 형상을 가슴에 그리고 율려의 소리를 입으로 내어가면서 퍼뜩 스스로 깨닫는 묘리가 있었다.
영락(永樂) 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드디어 동진사(同進士) 1등으로 뽑혔다. 공정왕(恭定王 태종)이 불러서 보고 칭찬하고는 집현전 교리로 뽑아서 불러 들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유악(帷幄)을 출입하였는데, 매번 세자를 모시고 글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먼저 숙재(宿齋)하였고 반복하여 개진(開陳)하니, 장헌왕(莊憲王 세종)이 그 학술을 칭찬하고 매우 융숭하게 예우하면서 특별히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제수하고 음악 관련된 일을 맡겼다.
이에 선생이 거서를 취하여 분촌(分寸)을 쌓아서 황종관(黃鐘管) 하나를 만들어 불어 보니 그 소리가 중국 황종의 음보다 높았다. 그래서 거서 한 알을 다시 취하여 분(分)을 쌓아서 관(管)을 만들었는데, 대개 그 법은 거서 한 알로 분을 삼고 열 알로 촌을 삼아 구촌으로 황종의 길이를 하고 삼분손익하여 12율을 돕는 것이었다.
왕은 선생이 음률에 정교하고 능통하다고 하여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두고 의정부 영의정 황공(黃公) 휘 희(喜)와 우의정 맹공(孟公) 사성(思誠)ㆍ좌찬성 허공(許公) 조(稠)ㆍ총제 정초(鄭招)ㆍ신상(申商)ㆍ권진(權軫)에게 명하여 제조(提調)로 삼아 악률을 의정(議定)하게 하고는 선생도 거기에 참여시켰다.
이때는 조정이 청명하고 사방이 잘 다스려져 음악을 논하는 자들이 이루 셀 수 없었다.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례(周禮)》 〈춘관(春官)〉에서 태사(太師)가 육률(六律)과 육동(六同)을 관장하여 음양의 소리를 조화하였으니 황종(黃鍾)ㆍ태주(太簇)ㆍ고선(姑洗)ㆍ유빈(蕤賓)ㆍ이칙(夷則)ㆍ무역(無射)은 양성(陽聲)이고, 대려(大呂)ㆍ응종(應鐘)ㆍ남려(南呂)ㆍ함종(函鐘)ㆍ소려(小呂)ㆍ협종(夾鐘)은 음성(陰聲)입니다.
대개 두병(斗柄)은 12진(辰)을 운행하되 왼쪽으로 도는데 성인이 이를 본떠서 육률을 제정하였습니다. 해와 달은 12차(次) 모이되 오른쪽으로 도는데 성인이 이를 본떠서 육동(六同)을 제정하였습니다. 육률은 양(陽)이어서 왼쪽으로 돌아 음과 합해지고 육동은 음이어서 오른쪽으로 돌아 양과 합해집니다.
그러므로 대사악(大司樂)이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황종(黃鐘)을 연주하고 대려(大呂)를 노래하여 조화시켰으며, 지지(地祗)에 제사 지낼 때는 태주(太蔟)를 연주하고 응종(應鐘)을 노래하여 조화시켰습니다. 사망(四望)에 제사 지낼 때는 고선(姑洗)을 연주하고 남려(南呂)를 노래하여 조화시켰고 산천(山川)에 제사 지낼 때는 유빈(蕤賓)을 연주하고 함종(函鐘)을 노래하여 조화시켰습니다.
선비(先妃)께 제사 지낼 때는 이칙(夷則)을 연주하고 소려(小呂)를 노래하여 조화시켰고 선조(先祖)께 제사 지낼 때는 무역(無射)을 연주하고 협종(夾鐘)을 노래하여 조화시켰습니다. 양률(陽律)은 당 아래에서 연주하고 음려(陰呂)는 당 위에서 노래하여 음양이 서로 화합하면서 번갈아 가며 창화하였으니 그런 연후라야 중성(中聲 중화(中和)의 소리)이 갖추어지고 화기(和氣)가 응하였습니다.
한(漢)나라의 악률은 모두 합성(合聲)을 사용하였고 당(唐)나라 제도에 와서 더욱 상세해졌는데, 오직 사직에 제사 지내는 경우에 한해서만 아래에서 태주(太蔟)을 연주하고 위에서 황종(黃鐘)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신언(趙愼言)이 황종(黃鐘)을 고쳐 응종(應鐘)으로 하자고 청한 것은 합성을 사용하자는 의미였습니다.
대개 태주는 양이어서 인방(寅方)에 위치하고, 응종는 음이어서 해방(亥方)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寅)과 해(亥)가 화합하게 되는 것은 두병(斗柄)이 해방(亥方)을 가리키는 달에는 해와 달이 인방(寅方)에 모이고 두병이 인방을 가리키는 달에는 해와 달이 해방에 모여, 좌우로 돌면서 짝이 되어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이 음양이 합하는 원리를 취하여 당상 당하의 음악에도 역시 반드시 합성을 사용한 것이니 음과 양을 조화시키고 신과 사람을 조화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직에 제사 지내는 당나라의 제도는 노래하고 연주하는 곡이 모두 양성인지라, 성인이 음악을 나눈 뜻에 맞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종묘악은, 당하에서 무역을 연주하고도 당상에서도 무역을 연주합니다. 단지 무역이 선조에게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음악이라는 것만 알고 협종이 양성이 된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종묘의 음악이 완전히 좋지 못한 것입니다.
사직의 음악은 당하에서 태주를 연주하고 당상에서 또 태주를 연주하니 이는 사직의 음악이 완전히 좋지 못한 것입니다. 석전(釋奠)의 음악은 지금 중국의 《대성악보(大成樂譜)》에는 아래에서 고선(姑洗)을 연주하고 위에서 남려(南呂)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관세(盥洗)를 할 때에는 고선을 사용하고, 전(殿)에 올라갈 때에는 남려를 사용하며, 조두를 올릴 때에는 고선을 사용하고, 초헌에는 남려를 사용하고, 종헌에 이르면 고선을 사용하고 변두를 철거할 때에는 남려를 사용하니, 음양의 소리를 화합하여 서로 번갈아 쓰는 것입니다.
오직 고선만은 본래 사망(四望)에 속해있지만 태학(太學)의 석전(釋奠)음악에도 역시 남려(南呂)와 함께 사용합니다. 그러나 관세를 할 때나 전에 올라갈 때의 음악이 없어 이미 잘못되었는데 변두를 철거할 때만 남려를 사용하니, 절차가 갖추어지지 않고 상하가 질서를 잃은 것이라, 이는 석전의 음악이 완전히 좋지 못한 것입니다.
산천단(山川壇) 제사의 제도는 유빈(蕤賓)을 연주하고 함종(函鐘)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지금 전폐(奠幣)부터 변두를 철거하는 절차에 이르기까지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대려를 사용하니 대려라는 것은 황종과 화합하는 것입니다. 천신을 산천신과 같은 자리에서 제사 지낼 수 없는 법인데 지금 같은 단에서 제악을 함께 연주하니 이는 산천단 제사의 음악 역시 완전히 좋지 못한 것입니다.
옛날에 사광(師曠)이 거문고를 탈 때에 봄이 되어 상현(商絃)을 타면 서늘한 바람이 따라서 이르렀고, 여름이 되어 우현(羽絃)을 타면 서리와 눈이 번갈아 내렸습니다. 가을이 되어 각현(角絃)을 타면 따뜻한 바람이 천천히 돌았고, 겨울이 되어 치현(徵絃)을 타면 햇빛이 뜨거워졌습니다.
지금 악공 가운데 일찍이 사광 같은 이가 없으니 감응의 묘리를 의의(擬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관(周官)》의 제도가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근본을 상고하여 닦아서 밝히는 것이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부(禮部)에 자문하여 고쳐 바로잡아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왕이 가납(嘉納)하고 자세히 살펴 의논하여 시행토록 하니 총우(寵遇)가 더욱 두터워졌다.
병조와 형조 판서에 차례로 임명되었다가 이조 판서로 고쳐 임명되었고,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총제(摠制) 신상(申商)은 일찍이 박연의 악기가 미비한 점이 많기 때문에 영악학(領樂學) 맹사성(孟思誠)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왕이 말하길 “악기는 반드시 박 아무개에게 맡긴 연후라야 성음(聲音)과 절주(節奏)가 조화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달이 넘어 선생이 새 경(磬) 2가(架)를 올리며 말하기를 “중국의 경(磬)은 유빈(蕤賓)의 소리가 임종(林鐘)보다 높고, 이칙(夷則)은 남려(南呂)와 같으며, 응종(應鐘)은 무역(無射)보다 낮아서 당연히 높아야 할 것은 도리어 낮고 당연히 낮아야 할 것은 도리어 높습니다. 옛날 황종(黃鐘)의 법에 따라 12율을 만들고 그것을 기준으로 더하고 빼어 완성을 해야 마땅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새 경〔新磬〕 2가를 가져오게 하여 명나라에서 하사한 경(磬)과 협주해 보게 하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하교하기를 “중국 경은 과연 음이 맞지 않았는데 지금 새로 만든 경이 그 바른 소리를 제대로 얻었구나. 율을 제정하고 음을 바로잡은 것이 옛 음악보다 뛰어나니 내가 매우 기쁘다.
그런데 이칙 하나만이 음이 맞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하니, 선생이 자세히 살피고 아뢰기를 “금을 그어놓은 먹줄을 아직 다 갈아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이에 먹줄을 다 갈아내니, 소리가 제대로 조화되었다.
아악이 이미 이루어지자 선생이 말하기를 “태묘의 종경(鐘磬)이 이미 구비되었으니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라고 하고는 드디어 물러나 다시는 정사에 종사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전원 속에 난초가 많았다고 하여 학자들은 난계 선생(蘭谿先生)이라고 불렀다.
혜장왕(惠莊王 세조) 때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등 여섯 신하들이 공의왕(恭懿王 단종)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일이 발각되어 같은 날 저자거리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선생의 아들 계우(季愚)도 그 때 함께 죽었는데 혜장왕은 선생이 삼조(三朝)의 원로라고 하여 특명을 내려 연좌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천수를 다하고 천순(天順) 2년 무인년 모월 모일에 병으로 작고하니 향년 81세였다. 영동현(永同縣) 고당(高塘)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몇 년 뒤에 문헌(文獻)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학문을 좋아하고 백가(百家)에 두루 통하였다.
제자를 가르칠 때는 먼저 《소학(小學)》을 강하되 명륜(明倫)과 경신(敬身)의 도에 더욱 뜻을 기울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 3년을 하였고, 복을 벗고도 여전히 여막에서 또 3년을 살면서 예를 다하여 제사를 모셨다. 일찍이 부도의 가르침을 따른 적이 없었고, 정로(正路)를 부식(扶植)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천하 국가에 보탬이 되었던 적이 진실로 많았다.
저술 가운데 〈가훈십칠칙(家訓十七則)〉과 같은 것은 그 덕의(德意)가 신명과 통할만하고 옛날의 명유(名儒)들의 글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배필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여산(礪山) 송씨(宋氏)로 판서(判書) 윤(贇)의 딸이다.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맹우(孟愚)로 현감(縣監)을 지냈고, 차남은 중우(仲愚)로 지군사(知郡事)를 지냈으며, 막내아들은 계우(季愚)로 사육신과 더불어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
큰 딸은 목사(牧使) 조(趙) 아무개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사직(司直) 권치경(權致敬)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감찰(監察) 방순손(房順孫)에게, 그 다음은 최(崔)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기자(箕子)가 동방으로 온 이후부터 오기(五紀)가 바로잡히고 팔정(八政)이 닦아졌으나 율려(律呂)만은 고악(古樂)에 맞지 않았다.
송종(頌鐘)이 있으나 특경(特磬)이 혹 달려있지 않기도 하고, 특경이 있으나 화생(和笙)이 혹 갖추어지지 않기도 하였으며, 화생이 있으나 아금(雅琴)이 혹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춘추 시대 전쟁을 하던 때에 이르러 음악은 더욱 무너져, 고수인 방숙(方叔)은 하(河)로 들어가고, 소고잡이인 무(武)는 한(漢)으로 들어가고, 소사(少師)인 양(陽)과 경쇠 치던 양(襄)은 바다로 들어갔으니 중국의 정성(正聲)이 아마도 이미 끊어졌을 것이다. 하물며 바다 밖 황복(荒服)의 나라에서 12율을 누가 능히 화합할 수 있었을 것인가?
오직 선생만이 본조에서 태어나 인의를 닦고 도덕을 밝혀 우뚝이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고, 장헌왕을 보익하여 건명(建明)한 바가 많았다. 그리하여 패옥(佩玉)과 관면(冠冕)의 의례가 새로워지지 않음이 없었고, 음악에 있어서는 깊이 생각하고 홀로 깨우쳐 천 년 동안 전하지 못한 음을 터득하여 종경(鐘磬)ㆍ소관(簫管)ㆍ생황(笙簧)ㆍ훈지(壎篪)ㆍ간척(干戚)ㆍ우약(羽籥)을 만들어 신명(神明)의 덕에 이르도록 하였다.
옛날에 도가 있고 덕이 있는 자를 악조(樂祖)로 삼아 고종(瞽宗)에서 제사 지냈으니. 선생과 같은 분이 어찌 악조(樂祖)가 아니겠는가? 금년 2월에 선생의 후손 아무개가 우리 집으로 와서 선생의 비문에 명을 지어달라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거서를 내리시어 / 天降秬黍
아악을 열어주셨네 / 以開雅樂
진실로 지극한 사람이 없다면 / 苟無至人
누가 그 학문을 전하리오 / 孰傳其學
훌륭하신 선생께서 / 顯允先生
후복에서 나시어 / 起於侯服
가슴속에 경의 형상을 그리니 / 胸畫磬形
대장이 이에 회복되고 / 大章是復
입으로 생황의 소리를 익히니 / 口習笙聲
함지가 이에 이어졌네 / 咸池是續
장헌왕 때 / 維時莊憲
율관을 맡기니 / 律管以屬
소인이 질투하고 / 宵人嫉之
헐뜯는 말이 오갔네 / 毁言交積
장헌왕 의심치 않으시고 / 莊憲不疑
총명을 더하셨으니 / 寵命有奕
이에 전형을 내리시어 / 乃予銓衡
천직을 다스리게 하시고 / 俾治天職
이에 문병을 내리시어 / 乃授文柄
나라를 빛나게 하시었네 / 以光王國
선생이 머리를 조아리고 / 先生稽首
더욱 감격해 하며 / 愈自感激
밤낮으로 애써 / 夙夜兢兢
드디어 그 업적을 고하였네 / 遂告厥績
종걸이가 완성되니 / 鐘簴旣成
질서가 어긋나지 않았고 / 倫理不錯
생황과 거문고가 조화되니 / 笙瑟旣和
제멋대로 치우침이 없었네 / 敖辟不作
청묘에 제사를 드릴 제 / 享于淸廟
열조께서 이르러 흠향하시고 / 烈祖來格
대사에 제사를 드릴 제 / 祀于大社
구룡이 기쁘게 맞이하며 / 句龍歡逆
밖으로 산천신까지 미치니 / 外曁山川
백신이 기뻐하네 / 百神踊躍
곡조가 비로소 바로잡히니 / 宮商始正
이 누구의 힘인가 / 是誰之力
명나라 사신(使臣)이 음을 살피고는 / 天使審音
감탄을 하는구나 / 爲之歎息
사신이 명을 지어 / 史臣作銘
그 업적 영원히 드리우리 / 永垂無極
<끝>
[註解]
[주01] 이조판서 …… 박공 : 박연(朴堧, 1378~1458)으로, 초명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이다. 집현전 교리ㆍ사간원
정언ㆍ사헌부 지평ㆍ세자시강원 문학ㆍ봉상판관 겸 악학별좌(奉常判官兼樂學別坐)ㆍ관습 도감사(慣習都監使)ㆍ공조 참의(工
曹參議)ㆍ중추원사(中樞院使)ㆍ보문각 제조(寶文閣提調)ㆍ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특히 율관 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 시대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주02] 외복(外服) : 복(服)이란 천자의 일에 복무한다는 의미로써, 사방 천리의 왕기(王畿) 이내의 지역을 내복이라 하고, 왕기 이외의 지
역을 외복(外服)이라 하였다. 흔히 중원(中原)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을 외복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가 중국에 대해서 겸
사로 자주 사용하였다.
[주03] 팔음(八音) : 금(金)ㆍ석(石)ㆍ사(絲)ㆍ죽(竹)ㆍ토(土)ㆍ목(木)ㆍ혁(革)ㆍ포(匏) 등 여덟 종의 악기에서 나는 소리를 말한다.
[주04] 헌가악(軒架樂) : 조선 시대 제례(祭禮)나 대례(大禮) 등의 궁중의식 때 섬돌 아래인 당하(堂下)에서 연주하던 궁중음악이다. 당상
(堂上)에 위치하는 등가(登歌)와 짝을 이루는 음악으로 종(鐘)ㆍ경(磬)ㆍ고(鼓) 등 아악기를 가(架)에 걸어 놓고 사죽(絲竹)과 함
께 연주했다.
[주05] 거서(秬黍)가 …… 228개였다 : 거서(秬黍)는 검은빛 기장인데, 옛날에 중간 크기의 것을 골라 척도의 표준으로 삼았다. 경석(磬
石)은 안산암(安山岩)의 하나로 옥돌이라고도 한다. 세종 때 해주에서 거서(秬黍)가 나고 남양에서 경석(磬石)이 나자 세종은 박연
(朴堧)에게 거서를 가지고 적분(積分)해서 황종(黃鍾)이란 관(管)을 만들고, 경석으로 편경(編磬)을 만들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9년 5월 15일》 《세종실록 9년 9월4일》 《세종실록 15년 1월 1일》
[주06] 성인이 …… 응하였다 : 《예기》 〈악기(樂記)〉에 “성인이 악을 만들어 하늘에 응하고, 예를 제정해서 땅에 짝지으니, 예악이 밝게
갖추어져 천지가 마땅함을 얻게 되었다.〔聖人作樂以應天, 制禮以配地, 禮樂明備, 天地官矣.〕”라는 말이 나온다.
[주07] 순 임금 …… 것 :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악관(樂官)인 기(夔)가 “명구를 치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노래하니, 조고가 와
서 이르시며 우빈이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제후들과 덕으로 사양합니다. 당(堂) 아래는 관악기와 도고를 진열하고 음악을 합하고 멈
추되 축과 오로써 하며 생과 용을 번갈아 연주하니 새와 짐승이 너울너울 춤추고 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춥니다.
[戛擊鳴球, 搏拊琴瑟, 以詠, 祖考來格, 虞賓在位, 群后德讓. 下管鼗鼓, 合止柷敔, 笙鏞以間, 鳥獸蹌蹌, 簫韶九成, 鳳凰來 儀.]
”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주08] 격부(擊拊) : 석경(石磬)을 치고 어루만진다는 격석부석(擊石拊石)의 준말이다. 《서경》 〈익직(益稷)〉에 “아, 제가 석경을 치고
어루만지자, 온갖 짐승들이 모두 따라서 춤을 추며 서윤(庶尹)이 진실로 화합합니다.[於予擊石拊石, 百獸率舞, 庶尹允諧.]”라는
말이 있는데 주에 의하면 ‘격(擊)’은 무겁게 치는 것이고, ‘부(拊)’는 가볍게 치는 것을 말한다.
팔음 중에서 석경 치는 것을 말한 것은 석경의 소리는 화합하기 어렵고, 석경의 소리가 조화로우면 다른 악기의 소리도 조화로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소리의 조화를 연구한다는 의미로 썼다.
[주09] 동진사(同進士) : 문과(文科)에서 갑(甲)ㆍ을(乙)ㆍ병(丙)의 등급에 속하지 못한 등외(等外)의 급제자를 말한다.
[주10] 숙재(宿齋) : 의식(儀式) 등의 기일에 앞서서 목욕재계하는 것을 이른다.
[주11] 삼분손익 : 중국계 아악의 12율을 산출하는 방법이다. 기본음(基本音)인 황종(黃鍾)의 음높이를 먼저 정한 다음, 한 번은 삼분손일
(三分損一)하여 완전 5도 위의 음인 임종(林鐘)을 얻고, 이 임종을 삼분익일(三分益一)하여 전회 5도(轉回五度), 즉 완전 4도 아
래의 태주(太簇)를 얻는 방법을 차례로 거듭하여 12율을 모두 얻게 된다.
[주12] 선생이 …… 것이었다 : 《국조보감》 6권 1433년(세종15)의 기록에 의하면 박연이 해주의 검은 기장을 가져다가 그 분촌을 쌓아가
지고 고설(古說)대로 황종(黃鐘) 1관(管)을 만들어 불어보니 중국의 황종보다도 조금 높은 소리가 났다. 토질에 비옥하고 척박한
차이가 있고 기장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서 소리의 높낮이가 시대마다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연은 우리나라의 풍토가 중국과 다르다는 것에 착안하여 해주의 검은 기장알 모양으로 밀랍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서 분을 쌓아
관(管)을 만들었다. 한 알을 1푼으로 하고 열 알을 쌓아 1촌으로 하는 것을 법으로 삼고 9치를 황종(黃鐘)의 길이로 삼은 다음, 3푼
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여 12율(律)을 완성하였다.
[주13] 왕은 …… 참여시켰다 : 이 내용은 《연려실기술》 권3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에서 볼 수 있다.
[주14] 육률(六律)과 육동(六同) : 육률(六律)은 십이율(十二律) 중 양성(陽聲)에 속하는 여섯 가지 음(音)이고, 육동(六同)은 십이율(十
二律) 중 음성(陰聲)에 속하는 여섯 가지 음(音), 즉 육려(六呂)를 말한다.
[주15] 대사악(大司樂) : 중국 주(周)나라 때 악관(樂官)의 장이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주나라의 통치조직은 육관(六官)으로 이루어
졌는데, 그 가운데 춘관(春官)은 그 장관이 대종백(大宗伯)으로 제사와 조빙 및 회합 등의 예의를 관장했고, 대사악은 이 춘관에 소
속되어 있었다.
[주16] 사망(四望) : 해〔日〕ㆍ달〔月〕ㆍ별〔星〕ㆍ바다〔海〕를 말한다.
[주17] 조신언(趙愼言) : 대사헌 조박(趙璞)의 아들이자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의 사위이다.
[주18] 단지 …… 것입니다 : 이 부분은 황경원이 박연의 논의를 요약하여 정리하였으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상소의 내용을 중심으로
수정 보완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협종은 ‘음성’으로 고쳐 이해해야 한다. 박연의 주장에 의하면 주나라 제도에서는 종묘의 음악은
무역(無射)을 연주하고 협종(夾鍾)을 노래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종묘의 제사를 보면 당하에서 양성인 무역을 연주하는 것은 맞지만 당상에서는 마땅히 음성인 협종을 노래해야 될
것인데도 도리어 무역을 연주하고 있다. 이것은 무역만이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음악인 줄만 알고 협종이 무역과 합하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여, 당상과 당하에 모두 양성인 무역을 사용한 셈이니 잘못이라는 것이다.
[주19] 대성악보(大成樂譜) : 원(元)나라 때 임우(林宇)가 찬한 석전악보(釋奠樂譜)이다. 세종 때 《대성악보》 16곡(曲) 중에서 12곡만
을 채택하여 제사(祭祀)의 아악보(雅樂譜)로 사용했다.
[주20] 관세(盥洗) : 제사 의식을 거행하면서 제관(祭官)이 손을 씻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주21] 석전의 …… 것입니다 : 이 부분은 박연이 올린 상서의 내용을 통해 좀 더 내용을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박연은 《대성악보》의
내용이 《주례》에서 추구하는 합성(合聲)의 제도에 대체로 부합하지만 석전의 음악의 경우에는 좀 특이하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고선과 남려는 본래 사망(四望)에 속한 것인데 석전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성(先聖)의 사묘(祠廟)가 대대로 노(魯)나라에 있어, 자손들이 계승하여 제사 지내어 끊어지지 않았다면 먼 곳의 제사는 마땅히
사망의 예와 같이 해야 되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박연의 추측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석전 음악은 잘못된 점이
많다고 주장한다. 우선 관세(盥洗)ㆍ승전(升殿)의 음악은 없고, 다만 초헌ㆍ종헌과 변두를 철거하는 때만 음악이 있는 것이 잘못이
라는 것이다.
또 초헌을 할 때와 변두를 철거할 때 당상에서 남려의 율(律)을 사용하여 노래하는 것은 맞지만, 아헌과 종헌의 경우에는 모두 당하
에서 고선의 율을 사용해야 마땅한데, 아헌에서는 아래에서 남려를 연주하고, 종헌에도 당상에서 남려를 노래하니, 노래와 주악이
순전히 남려만 사용하고 합성을 사용하지 않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박연은 우리의 석전 음악이 절차도 갖추지 못하고, 상하가 차례를 잃어 심히 미안한 일이라고 하면서 일찍이 공성(孔聖)의 사
당에 이러한 근거 없는 음악을 설치했겠느냐고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주22] 전폐(奠幣) : 제사 때 헌관(獻官)이 집사자에게 폐백을 받아서 신위(神位) 앞에 드리는 일을 말한다.
[주23] 사광(師曠) :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야(子野)이고, 진평공(晉平公) 때 악사(樂師)를 지냈다. 태어날 때부터 장님
이었는데, 음률(音律)을 잘 판별했고 소리로 길흉(吉凶)까지 점쳤다고 한다. 제(齊)나라가 진나라를 침공했는데, 새소리를 듣고 제
나라 군대가 이미 후퇴한 것을 알아냈다.
평공이 큰 종을 주조했는데 모든 악공(樂工)들이 음률이 정확하다고 했지만 그만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사연(師涓)이 이
사실을 확인했다. 《금경(禽經)》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주24] 의의(擬議) : 말하기 전에 의논하는 것을 의(擬)라 하고, 실행하기 전에 의논하고 평가하는 것을 의(議)라 하니, 의의(擬議)는 어떤
일의 계획이나 실행에 앞서서 토의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주25] 신상(申商) : 1372~1435. 본관은 은풍(殷豊), 자는 득지(得止),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생원ㆍ진사를 거쳐 1390년(공양왕2)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정랑ㆍ경력(經歷)ㆍ연안(延安) 부사를 역임하고, 1405년(태종5) 상호군이 되어 동북면의 국경경비를 맡았
다.
1419년(세종1)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후 대사헌ㆍ이조 참판ㆍ형조 판서ㆍ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추서되었다.
[주26] 영악학(領樂學) 맹사성(孟思誠) : 악학(樂學)은 조선 초기에 음악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던 기관이고, 그곳의 으뜸벼슬을 영악학(領
樂學)이라고 하였다. 연주활동의 행정적 지원과 음악 관련의 학문적 연구를 담당한 음악기관으로 재랑(齋郞)ㆍ무공(武工)ㆍ악공
(樂工)의 취재와 습악(習樂)을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이외에도 악서와 악보의 편찬, 음악이론과 역사연구 또는 악복(樂服)과 의례
(儀禮)의 고증, 그리고 율관제작과 악기제조의 감독 등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ㆍ성지(誠之), 호는 동포(東浦)ㆍ고불(古佛)이다. 세종 때 이
조 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에 올라 관습도감(慣習都監)과 악학(樂學)에 관여하여 음악지도자의 능력을 발휘했으
며, 1427(세종 9) 악학의 책임자 직무를 수행하면서 악학별좌(樂學別坐) 박연(朴堧)을 거느리고 12율관(律管) 제작과 악기개량,
신정아악(新定雅樂)의 창제를 지도하였다.
[주27] 총제(摠制) …… 생각하였다 : 당시 세종이 “거서(秬黍)로 율관을 만드는 일은 박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 만든 황
종(黃鐘)을 박연이 만든 율관을 가지고 그 소리를 살펴보면 맞고 아니 맞는 것을 누구든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신상(申商)
은 “이는 다만 박연이 혼자 알아낸 것이 아니요, 영악학(領樂學) 맹사성(孟思誠)의 도움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세종실록 9년 9월 4일》 《練藜室記述 卷3 世宗祖故事本末》
[주28] 혜장왕(惠莊王) …… 당하였다 :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자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복위를 시도했던 거사, 즉 단종 복위운동을 말한다.
[주29] 계우(季愚) : 박계우(朴季愚, 14??~1454)로, 박연의 셋째 아들이다. 세종조 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한림학사를 역임하였다.
계유정난 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처형당했다. 1791년 정조 15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
총관(吏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總管)에 추증되었다.
[주30] 소학(小學)을 …… 기울였다 : 어린 아이들이 배우던 수신서(修身書)인 《소학(小學)》은 총 6편으로, 내편은 〈입교(入敎)〉ㆍ〈명
륜(明倫)〉ㆍ〈경신(敬身)〉ㆍ〈계고(稽古)〉로 이루어져 있고, 외편은 〈가언(嘉言)〉ㆍ〈선행(善行)〉으로 구성되었다.
[주31] 가훈십칠칙(家訓十七則) : 박연의 문집 《난계유고》의 〈잡저〉편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계유정난에 셋째 아들 계우(季愚)가 연
루되어 박연 역시 유배를 가게 되어 있을 때 후손들에게 모범이 될 생활을 당부하기 위해 썼다고 알려져 있다.
[주32] 오기(五紀)가 …… 닦아졌으나 : 오기와 팔정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한 뒤 기
자를 방문하여 이륜(彛倫)을 펴는 이치에 대해 물었을 때 기자(箕子)가 내린 가르침인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하나이다.
오기는 세월과 자연의 흐름인 세(歲)ㆍ월(月)ㆍ일(日)ㆍ성진(星辰)ㆍ역수(曆數)이고 팔정은 나라 정사(政事)의 8가지 일, 곧 식
(食 식생활)ㆍ화(貨 재화)ㆍ사(祠 제사)ㆍ사공(司空 농지개간)ㆍ사도(司徒 교육)ㆍ사구(司寇 치안)ㆍ빈(賓 외교)ㆍ사(師 국방)를
가리킨다. 《書經 洪範》
[주33] 고수인 …… 들어갔으니 : 방숙(方叔)ㆍ무(武)ㆍ양(陽)ㆍ양(襄) 모두 주나라 때의 악공(樂工)으로, 주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세상
을 피해 숨었던 사람들이다. 《論語 微子》
[주34] 황복(荒服) : 옛날 중국 오복(五服) 가운데 가장 먼 변두리에 있는 구역으로, 왕기(王畿)에서 멀리 떨어진 2000리에서 2500리 사
이의 지역을 말한다. 제왕의 감화가 미치지 못하는 먼 나라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이자, 중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겸칭으로 쓰였다.
[주35] 건명(建明) : 정사(政事)를 밝게 일으켜 세우거나 의견을 제시하여 명확하게 밝히는 것을 말한다.
[주36] 종경(鐘磬) …… 우약(羽籥) : 종경(鐘磬)ㆍ소관(簫管)ㆍ생황(笙簧)ㆍ훈지(壎篪)는 악기 이름이다. 간척(干戚)은 방패와 도끼를
손에 들고 추는 무무(武舞)이고, 우약(羽籥)은 깃털을 잡고 약(籥)이라는 피리를 불면서 추는 문무(文舞)이다.
[주37] 고종(瞽宗) : 중국 은(殷)나라 때 학교(學校) 이름이다. ‘고(瞽)’는 아는 것이 없이 무지몽매하다는 것을 이르며, ‘종(宗)’은 높인다
는 뜻이다. 《廣雅 釋宮》
[주38] 후복 :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를 매복(每服) 500리씩 나눈 다섯 구역을 오복(五服)이라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고
대에는 전복(甸服)ㆍ후복(侯服)ㆍ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이라 했고, 주대(周代)에는 후복(侯服)ㆍ전복(甸服)ㆍ남
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이라 했다.
[주39] 대장(大章) : 요(堯) 임금 때 만든 악명(樂名)이다. 천(天)ㆍ지(地)ㆍ인(人)의 도리를 크게 밝힌 것으로서, 순 임금의 대소(大韶)와
함께 유명하다.
[주40] 함지(咸池) : 요 임금 때의 음악 이름으로, 황제(黃帝)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주41] 천직(天職) : 타고난 임무나 직분, 또는 하늘이 부여해 준 직분으로 정치를 하는 것을 이른다.
[주42] 대사(大社) : 고려, 조선 시대에 임금이 토지신(土地神)인 후토씨(后土氏)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주43] 구룡(句龍) : 토지신을 말한다. 원래 공공씨(共工氏)의 아들이었는데, 수토(水土)를 잘 다스려서 뒤에 후토지신(后土之神)이 되었
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 29年》 <끝>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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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吏曹判書兼藝文館大提學蘭谿朴公神道碑銘 幷序
外服之國有樂器。自本朝始。明興。太祖高皇帝與成祖文皇帝。皆賜樂器。然鐘磬不中於律。而祭樂八音未備。莊憲王七年。秬黍生於海州。八年。磬石産於南陽。王乃命吏曹判書兼藝文館大提學朴先生。按皇朝所賜樂器。爲律呂。十年夏。雅樂告成。宗廟軒架編磬特磬共二百二十八枚。會天子遣使者。來聽先生所制雅樂。歎曰。雅樂能得正聲。毋乃東方有異人乎。由是先生以律呂知名天下。然不有莊憲之聖。則先生雖通律呂。烏能成金石之樂哉。故記曰。聖人作樂以應天此之謂也。當舜之時。在位者。徒見鳳皇皆來儀。而鳥獸無不蹌蹌。遂以爲一夔之功。然堂上戛其鳴球。拊其琴瑟。而堂下陳以鼗鼓。間以笙鏞。本舜之心也。今秬黍生於海州。而磬石産於南陽。莊憲王始命先生。正五音和十二律。以昭假於宗廟社稷百神。與舜之命夔興樂。何以異哉。莊憲王嘗諭先生曰。自古制樂爲最難。上之人所欲成者。下之人或不從之。下之人所欲成者。上之人或不聽之。雖上下皆欲成之。而天時有不利者。今國家昇平無事。予志先定。卿其盡心無忽焉。先生受命凡三年。雅樂大備。豈不休哉。先生諱堧。字坦父。姓朴氏。密陽人也。高麗時。有諱文彬。爲寶文閣學士。康獻開國。以成均館大司成徵。不起。謚曰文節。於先生。爲高祖考。曾祖諱臣悅。擧生員。贈議政府左贊成。祖諱時庸。集賢殿校理贈議政府左贊成。父諱天錫。三司左尹贈吏曹判書。母曰慶州金氏。通禮門副使珸之女也。先生自爲童子時。德器凝重。事父母能盡其孝。爲文辭蔚然成章。慨然有志於典禮。博究載籍。尤精於鐘律。每坐卧。畫於心胸。爲擊拊之形。發於口唇。爲律呂之聲。犂然有自得之妙。永樂三年。中生員。遂擢同進士第一。恭定王召見嘉賞。選入爲集賢殿校理。由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世子侍講院文學。出入帷幄。每侍讀。必先宿齋。反復開陳。莊憲王褒其學術。禮貌甚隆。乃特拜中樞院使。委以樂事。於是先生。取秬黍。積其分寸。爲黃鐘一管。吹之其聲差高於中國黃鐘之音。乃復取秬黍一粒。積分成管。盖其法以黍一粒爲分。十粒爲寸。九寸爲黃鐘之長。三分損益。以協于十有二律。王以先生精通音律。乃置儀禮詳定所。命議政府領議政黃公諱喜,右議政孟公思誠,左贊成許公稠,摠制鄭招,申商,權軫。爲提調。議定樂律。先生預焉。方是時。朝廷淸明。四方乂安。論樂者不可勝數。先生言周禮春官太師。掌六律六同。以合陰陽之聲。黃鐘,太蔟,姑洗,蕤賓,夷則,無射。陽聲也。大呂,應鐘,南呂,函鐘,小呂,夾鐘。陰聲也。盖斗柄運於十二辰而
左旋。聖人制六律以象之。日月會於十二次而右轉。聖人制六同以象之。六律陽也。左旋以合陰。六同陰也。右轉以合陽。故大司樂祀天神。則奏黃鐘。歌大呂以合之。祭地祗。則奏太蔟。歌應鐘以合之。祀四望。則奏姑洗。歌南呂以合之。祭山川。則奏蕤賓。歌函鐘以合之。享先妃。則奏夷則。歌小呂以合之。享先祖。則奏無射。歌夾鐘以合之。陽律奏於堂下。陰呂歌於堂上。陰陽互合。迭相唱和。然後中聲備。而和氣應矣。漢樂律。皆用合聲。至唐制度。尤詳悉。唯祭社稷。下奏太蔟。上歌黃鐘。故趙愼請改黃鐘爲應鐘用合聲也。盖太蔟陽也。位於寅。應鐘陰也。位於亥。寅亥之所以爲合者。斗柄建亥之月。日月會於寅。斗柄建寅之月。日月會於亥。左右旋轉。交相爲配。不得相離。是聖人取合陰陽。而堂上堂下之樂。必用合聲。所以調陰陽而和神人者也。唐制歌奏俱陽聲。非聖人分樂之意也。今宗廟樂於堂下。旣奏無射。而堂上亦奏無射。徒知無射爲祭祖之樂。而不知夾鐘之爲陽聲。此宗廟之樂。未盡善也。社稷之樂。於堂下旣奏太蔟。而堂上亦奏太蔟。此社稷之樂。未盡善也。釋奠之樂。今中國大成樂譜。下奏姑洗。上歌南呂。而盥洗。用姑洗。升殿。用南呂。薦俎。用姑洗。初獻。用南呂。至終獻。用姑洗。徹籩豆。用南呂。陰陽合聲。迭相爲用。惟姑洗。本屬四望。而太學釋奠之樂。亦用南呂。無盥洗升殿之樂。已失之。而徹籩豆。用南呂。節次不備。上下失倫。此釋奠之樂。未盡善也。山川壇祭祀之制。奏蕤賓歌函鐘。今自奠幣。至徹籩豆。堂上堂下。皆用大呂。大呂者。黃鐘之合也。故天神不與山川同位祭之。今一壇。幷奏祭樂。此山川壇祀之樂。亦未盡善也。昔師曠鼓琴。當春而叩商絃。凉風隨至。當夏而叩羽絃。霜雪交下。當秋而叩角絃。溫風徐回。當冬而叩徵絃。陽光熾烈。今工人曾無師曠。則感應之理。未可擬議也。周官制度。布在方策。按本修明。實非難事。乞咨禮部釐正。幸甚。王嘉納。覆議施行。寵遇益厚。命判兵刑二曹。改吏曹。自寶文閣提學。進藝文館大提學。摠制申商。嘗以爲朴堧樂器多未備。故領樂學孟思誠。與有助焉。王曰。樂器必委之朴某。然後聲音節奏可諧也。逾月。先生作新磬二架以進曰。中國之磬。蕤賓高於林鐘。夷則同於南呂。應鐘下於無射。當高者反下。當下者反高。宜遵古黃鐘之法。爲十二律。因而損益。以成之。王命取新磬二架。協中國所賜之磬。大悅。下敎曰。中國之音果不協。今新磬甚得其正。制律較音。出於古樂。予甚喜焉。惟夷則一枚。不諧何也。先生審視。乃啓言。限墨猶未盡磨也。於是磨之。聲乃諧。雅樂旣成。先生曰。太廟鐘磬已具矣。吾何不歸乎。遂退居。不復從政。其所居田園之中。多蘭草。故學者稱蘭谿先生。及惠莊王時。忠正公朴彭年等六臣。謀復恭懿王。居未幾。事發覺。同日棄市。先生子季愚從死。而惠莊王以先生三朝元老。特命勿坐。故先生得終天年。天順二年戊寅某月某日。以疾卒。享年八十一。葬永同縣高塘原。後幾年。賜謚文獻。先生少孤。好學問。旁通百家。敎弟子。先講小學。於明倫敬身之道。益致意焉。丁內艱。廬墓三年。服旣除。猶居廬者又三年。祭祀以禮。未嘗用浮屠之敎。扶植正路。觝排異言。有益於天下國家者。誠多矣。所著之書。如家訓十有七則。其德意可通神明。不媿於古之名儒也。其配曰貞敬夫人礪山宋氏。判書贇之女也。有子三人。女四人。子長曰孟愚。縣監。次曰仲愚。知郡事。季曰季愚。與六臣俱死於節。女長適牧使趙某。次適司直權致敬。次適監察房順孫。次適崔某。自箕子東來以後。五紀正而八政修。獨律呂不協古樂。有頌鐘焉。而特磬或未之懸也。有特磬焉。而和笙或未之具也。有和笙焉。而雅琴或未之諧也。至春秋戰爭之世。樂愈壞。方叔入河。武入漢。襄與陽也。皆入海。中州正聲。盖已絶矣。况海外荒服之國。十二律。孰能協乎。惟先生出於本朝。修仁義而明道德。鬱然爲學者之師。輔翼莊憲。多所建明。故佩玉冠冕之儀。無不更新。而於樂沉思獨悟。得千載不傳之音。爲之鐘磬,簫管,笙簧,壎簴,干戚,羽籥。以達其神明之德也。古者有道有德者。以爲樂祖。祭于瞽宗。若先生者。豈非所謂樂祖邪。今年二月。先生後孫某造余之門。請銘于先生之碑。余何敢辭。其銘曰。
天降秬黍。以開雅樂。苟無至人。孰傳其學。顯允先生。起於侯服。胸畫磬形。大章是復。口習笙聲。咸池是續。維時莊憲。
律管以屬。宵人嫉之。毁言交積。莊憲不疑。寵命有奕。乃予銓衡。俾治天職。乃授文柄。以光王國。先生稽首。愈自感激。
夙夜兢兢。遂告厥績。鐘簴旣成。倫理不錯。笙瑟旣和。敖辟不作。享于淸廟。烈祖來格。祀于大社。句龍歡逆。外曁山川。
百神踊躍。宮商始正。是誰之力。天使審音。爲之歎息。史臣作銘。永垂無極。<끝>
江漢集卷之十四 /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