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요약]
■정엽(鄭燁)
1563년(명종 18) - 1625년(인조 3)
조선 후기에, 대사성,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정희년(鄭熙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선(鄭璇)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유성(鄭惟誠)이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증찬성 윤언태(尹彦台)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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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집 제47권 / 묘지명(墓誌銘)
식호와 정엽(鄭燁) 공 묘지명 병서(式好窩鄭公墓誌銘 幷序)
경주(慶州) 하계동(霞溪洞)에 본래 예를 좋아하는 군자가 있었으니 식호와(式好窩) 정공이다. 휘는 엽(燁)이고 자는 여장(汝章)이며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고려 지주사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선조인 정광후(鄭光厚)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숙조(叔祖)로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몇 대 지나 정극후(鄭克後)에 이르러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지내고 호를 쌍봉(雙峯)이라 하였으니, 이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는 참봉 정취(鄭취)이고, 증조는 정시석(鄭時錫)이고, 조부는 군수 정연(鄭沇)이고, 선고는 통덕랑 정상문(鄭相文)이다. 선비는 흥양 이씨(興陽李氏)로 통덕랑 이재륭(李在隆)의 따님이자 월간(月澗) 이전(李㙉)의 증손이다.
공은 명릉(明陵) 을해년(1695, 숙종21) 7월 17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라서는 옛날 예서(禮書) 보는 것을 좋아하여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에게 나아가 질정하니, 매우 추중을 받았다. 경자년(1720, 숙종 46) 국휼(國恤) 때 고을 수령이 마을 선비들에게 의절을 물었는데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공이 이르러서는 매우 상세하게 근거를 대 가며 조리 있게 대답한 덕분에 예에 차질이 없었다. 이해에 부친 통덕랑공이 졸하였는데, 슬픔과 예를 모두 지극히 하였다. 상을 벗은 뒤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배례하고 모친에게 문안하여 그 환심을 얻는 데 진력하였다.
동생 매헌공(梅軒公)과 우애가 깊어서 학문에 힘을 다하게 해서 성취가 있었다. 병오년(1726, 영조 2)에 모친상을 당하자 전의 부친상과 마찬가지로 예를 극진히 하였다. 임신년(1752)에 두 아들을 잃었는데, 슬픔을 억누르고 도리가 우선하게 해서 무익하게 슬퍼하지 않았으며, 손자들을 잘 양육하여 모두 성취할 수 있게 하였다.
만년에 집을 옮겨 살았는데 당재(堂齋), 마구간, 창고가 질서 정연하니 법도가 있었다. 그 방을 ‘식호(式好)’라 일컫고 헌을 ‘첨모(瞻慕)’라고 하였으니, 이는 형제간에 우애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것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날마다 일어나 그 가운데서 처하고 출입을 간소히 하여 일이 없으면 성시(城市)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백발의 동안으로 우뚝이 한 고을의 큰 어른이 되었다.
갑오년(1774)에 나이 80으로 규례에 따라 절충 호군(折衝護軍)을 제수받았다. 을미년(1775) 4월 7일에 병으로 누웠다가 졸하였으니 향년 81세였다. 그해 아무 월 아무 일에 고을 북쪽 청령(靑嶺)의 술좌(戌坐)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은 기국(器局)이 준엄하고 단정하였으며 신색(神色)이 고결하고 몸가짐을 단속하여 남들이 범할 수 없는 면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화평하고 즐겁고 온화해서 가까이할 만하였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럽고 아우들과 우애하고 제사에 그 정성을 극진히 하였으므로 종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더욱이 예에 공력을 쏟아서 병와의 저서 중 미처 일을 마치지 못한 글이 있었는데 공이 그 자제들과 함께 수정하여 정본(淨本)을 만들었고,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예문(禮文)이나 변례(變禮)를 만나면 모두 공의 의견을 귀결처로 삼았다.
공과 같은 분이 어찌 이른바 예 안에서 몸을 마치고 예가 잠시도 몸에서 떠나지 않은 자가 아니겠는가. 공의 부인은 여강 이씨(驪江李氏)로 직장 이성중(李誠中)의 따님이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후손이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종필(宗弼)과 형필(衡弼)이다.
효성과 근면으로 그 가업을 이었는데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하나뿐인 딸은 최흥후(崔興厚)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딸은 이갑신(李甲臣), 손득룡(孫得龍)에게 시집갔다. 종필은 이일(履一)을 후사로 삼았고, 종필의 딸은 생원인 이갱(李坑)ㆍ이정태(李鼎泰)에게 시집갔다.
형필의 아들은 이일과 치일(致一)이다. 사위 최흥후의 사자는 최우진(崔宇鎭)이다. 이일의 아들은 순인(純仁)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치일의 자녀도 모두 어리다. 이일이 상사군(上舍君) 정희(鄭熺)가 지은 행장을 나에게 주면서 그 유택의 지문을 청하였다.
나는 일찍이 한두 번 공을 뵈었는데, 공의 나이가 이미 팔순이 넘었는데도 읍손하고 동작하는 모양이 조심스러워 예가 있었으니, 공의 덕에 크게 감화되어 돌아왔다. 이제 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감히 잊지 못하고 있으니, 오늘의 청을 정의상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그 명을 지으니 다음과 같다.
관서의 법도 있는 가문은 / 關西法門
예로써 먼저 가르쳤으니 / 先敎以禮
학문은 근거해 지킴이 있고 / 學有據守
날마다 쓰는 떳떳한 체라네 / 日用常體
말세의 풍속 더욱 투박해져 / 末俗益偸
거름풀 보듯 예를 무시했으나 / 視若土苴
덕이 아름다운 우리 공은 / 有懿我公
밤낮으로 예서를 즐겨 보았지 / 夙嗜古書
자신에게 돌이켜 수양하여 / 反躬內修
용모와 사기를 삼가고 / 容貌辭氣
집안에 베풀어 정사하니 / 施家爲政
관례 혼례와 상례 제례라 / 冠昏喪祭
나를 알아주는 이 없어도 / 人莫我知
홀로 말하고 고하지 않았지 / 寤言弗告
깊숙한 경주 하계동에서 / 有窅霞洞
서책을 안고 생을 마쳤네 / 抱書終老
저기 청령의 언덕에 / 靑嶺之原
넉 자의 봉분 있으니 / 有封四尺
내 공의 대강을 모아 / 我最其大
후세에 무궁히 전하리 / 庸詔無極
<끝>
[각주]
[주01] 정습명(鄭襲明) : ?~1151.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형양(滎陽)으로 고려의 문신이다. 영일 정씨 형양공파(滎陽公派)의 시조이
다.
[주02] 병와(甁窩) …… 질정하니 : 한국문집총간 164집에 수록된 《병와집(甁窩集)》 권11에 〈정여장의 문목에 답하다〔答鄭汝章問
目〕〉라는 제목으로 이형상(李衡祥)이 정엽(鄭燁)과 예에 관해 문답한 편지가 실려 있다.
[주03] 경자년 국휼(國恤) : 1720년(숙종46) 6월에 있었던 숙종의 상을 말한다.
[주04] 매헌공(梅軒公) : 정엽의 동생 정욱(鄭煜, 1708~1770)이다. 《대산집》 권48에 〈매헌 정군 묘갈명(梅軒鄭君墓碣銘)〉이 실려 있
다.
[주05] 식호(式好) : 《시경》 〈사간(斯干)〉에 “형과 아우가 서로 좋아하고 서로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兄及弟矣 式相好矣 無相猶矣]”라
고 하였는데, 후에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06] 관서(關西)의 …… 가문 : 관서는 관서공자(關西孔子)라는 말로, 후한의 대유(大儒)인 양진(楊震)을 일컫는 말인데 후에 대유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정엽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라는 대유의 집안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07] 날마다 …… 체라네 : 《주자가례(朱子家禮)》 서문에 “그 근본은 집안에서 날마다 쓰는 떳떳한 체이니 진실로 하루도 수행하지 않
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其本者 有家日用之常體 固不可以一日而不修〕”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예가 허문(虛文)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실체임을 강조한 것이다.
[주08] 홀로 …… 않았지 : 《시경》 〈고반(考槃)〉에 “시냇가에 오두막 있으니 훌륭한 분이 편안히 거처하네. 홀로 자고 깨어 길이 잊지 않
으려 맹세하네.……홀로 자고 깨어 다시 누워서 길이 남에게 고하지 않으려 맹세하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弗諼
…獨寐寤宿 永矢弗告〕”라고 하였다. 세상을 피해 은거하여 학문과 도를 즐기는 은자의 모습을 형용하는 말로 많이 인용된다.
<끝>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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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式好窩鄭公墓誌銘 幷序
慶之霞溪洞。有故好禮君子。曰式好窩鄭公。諱燁。字汝章。迎日縣人。高麗知奏事襲明之後。圃隱之叔祖光厚。仕至工曹判書。幾世至克後。官大君師傅。號雙峯。是爲公五世。高祖𡒍參奉。曾祖時錫。祖沇郡守。考相文通德郞。妣興陽李氏。通德郞在隆之女。月澗㙉之曾孫。公以明陵乙亥七月十七日生。弱不好弄。長而好觀古禮書。就質于甁窩李公衡祥。甚見推重。庚子國恤。州尹以儀節詢于鄕士。莫能對。及公至。考據條對甚詳。賴而無躓於禮。是歲。通德郞公卒。哀禮備至。旣免喪。輟擧業。晨興拜廟。問寢於慈闈。盡其懽。與弟梅軒公友愛甚。俾肆力於學。以有成就。丙午。遭內艱。盡禮如前喪。壬申。哭二子。能抑哀理勝。不爲無益之悲。撫養諸孤。俱得成立。晩年移屋而居堂齋。廏庫井井有法度。名其室曰式好。軒曰瞻慕。蓋取意於友兄弟敬祠廟也。日興處其中。簡出入。無事不入城府。皓髮童顔。巋然爲一鄕大老。甲午。以年八十。例授折衝護軍。乙未四月七日。寢疾卒。享年八十一。用其年某月日。葬于府北靑嶺負戌之原。公器局峻整。神彩修潔。斂然自持。有人不可犯者。及接人則平恕樂易。溫然可親。事親孝。與弟友。祭祀極其誠。宗族盡其懽。尤用功於禮。甁窩有著書未卒業。公與其子弟。修整爲淨本。人家遇疑文變節。皆以公爲歸。若公者。豈非所謂沒身於禮。不斯須去身者邪。公配驪江李氏。直長誠中之女。晦齋先生之后。有二男。宗弼,衡弼。以孝謹業其家。皆先公卒。一女適崔興厚。側室女適李甲臣,孫得龍。宗弼以履一嗣。女適李
生員,李鼎泰。衡弼子履一,致一。崔有嗣子宇鎭。履一子純仁。餘幼。致一有子女。亦幼。履一以上舍君熺之狀。授象靖俾有以誌其幽。象靖嘗一再登門。公年旣大耋而揖遜折旋。兢兢乎有禮。盎然飽德而歸。至今蓋十年而不敢忘。今日之請。義何敢辭。遂爲之銘曰。
關西法門。先敎以禮。學有據守。日用常體。末俗益偸。視若土苴。有懿我公。夙嗜古書。反躳內修。容貌辭氣。施家爲政。冠昏喪祭。人莫我知。寤言弗告。有窅霞洞。抱書終老。靑嶺之原。有封四尺。我最其大。庸詔無極。<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