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8. 5. 3. 23:57
■ 송은 이근성 묘갈명(松隱 李謹成 墓碣銘)
[생졸년] 1694년(숙종 20) 2월 8일 ~ 1769년(영조 45) 9월 3일/壽 76歲
[소재지] 예천군 호명면 금릉리
공(公)의 성(姓)은 이(李)요. 관(貫)은 월성(月城)이요. 휘는 근성(謹成)이고 字는 신지(愼之)로 신라 건국공신인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고려조에 이르러 상서좌복야 휘 핵(翮)이 중조(中祖)이고 조선조에 내려와 정헌대부 양정공 휘 만주(萬柱)는 고조부이고, 가선대부 판돈령 휘 득춘(得春)은 증조부이고 호조정랑 송오공(松五公) 휘 백영(白永)은 조부이고 가선대부 첨추(僉樞) 한남공(漢南公) 휘 서봉(瑞鳳)이 아버지이고 어머니 정부인 광산김씨가 꿈에 봉황이 품속으로 날아드는 태몽(胎夢)을 꾸고 숙종 20년(甲戌 1694) 2월 8일에 공이 태어났다.
공의 용모가 비범하고 음성이 맑으며 기운이 굳세니 모두들 그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나면서 재예(才藝)가 무리에서 뛰어나고 박식(博識)하며 견문(見聞)이 넓으니 그 소문을 듣고 따르는 이들이 모두 달통(達通) 하였다고 일컫더라.
그 명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왕명으로 병조정랑(兵曹正郞-병조의 正五品)에 발탁되었고 뒷날 가선대부 한성좌윤에 증직되고 얼마 아니 되어 신양(身恙)으로 물러나 금릉(金陵 : 지금의 예천군 호명면 금릉리)에 터 잡아 살면서 책을 읽어 그 뜻을 더욱 굳게 하고 갈고 닦아 수신제가(修身齊家)했다.
대체로 금릉(金陵)이란 곳은 사방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소나무 숲이 우거졌으니 그곳에서 도연명(陶淵明)의 “밋밋한 소나무를 어루만지면서 서성인다”는 뜻에 따라 대(臺)를 그 솔숲 속에 쌓고 스스로 호를 송은(松隱)으로 삼고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시(詩)를 짓고 읊었으며 매양 북두칠성을 우러르며 벼슬살이할 때 충성을 다하지 못했을까봐 걱정했으며 향당(鄕黨)에 있어서는 걱정과 즐거움을 이웃들과 함께 했으니 그 누가 공의 덕의(德義)를 우러러 사모하지 아니하랴!.
공이 만년(晩年)에 이상한 새(신금/神禽-새)가 그 대(臺)가 있는 동산의 오동나무 가지에 와서 깃을 트니 필시 봉황(鳳凰)새였을 것이다.
희(噫-탄식할 희)라 어머님 꿈에 나타났던 징조(徵兆)가 분명하게 실지로 나타난 바가 아닌가!?.
영조 45년 己丑(1769) 9월 3일에 돌아가 사전현(蛇田峴) 해좌(亥坐)에 장사지내던 날 봉황이 산마루를 배회하면서 울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졌으니 그 다음부터 대(臺)와 산(山) 이름이 모두 봉황(鳳凰)인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이 공(公)의 그 이적(異蹟)과 그 영험스러움을 사모하여 그 대(臺)를 봉황대(鳳凰臺)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오래전에 비가 많이 와서 산이 무너져서 臺가 파묻혔는데 여태까지 중수(重修)하지 못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公의 7대손인 종화(鍾華)씨가 두루마리 한 축(軸)을 들고 나를 찾아와 내 놓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7대조 할아버지의 행장(行狀)인데 보고 묘갈명을 써 달라”고 청하는데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이에 명(銘)을 한다.
저 울창한 소나무여 뿌리가 큰 언덕에 깊이 내렸구나.
밋밋한 것은 그 절개이니 눈 속에서도 우뚝하여 푸르고 푸르네.
봉황이 정답게 우짖으니 신기하게도 화창한 기운이 감돌고
날아왔다가 날아가니 그 상서로움이 더욱 영험스럽네.
대(臺)며 산(山)의 꽃다운 이름이 저절로 생겨났다.
천추만대 길이길이 그 덕(德)을 드러냄이여
후손들 정성을 다하여 옛 터에 이 비석을 세우니
우러러 받들고 모심이여 그 산 이름이 봉황산이고
그 대(臺) 이름 또한 봉황대(鳳凰臺)이로다.
려산후인(礪山後人) 송흥(宋興)이 삼가 이 글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