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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月山大君) | |
대군(大君) | |
별칭 | |
별호 | 초기 작위명은 월산군(月山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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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단종 2년(1454)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수양대군 사저 |
사망일 | 성종 19년(1488) 12월 21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월산대군 사저 |
능묘 | 월산대군묘 |
왕조 | 조선 한성부 |
부친 | 덕종 |
모친 | 소혜왕후 |
배우자 | 승평부대부인 |
자녀 | 승헌대부 덕풍군(承憲大夫 德豊君)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년 ~ 1488년 12월 21일)은 조선 전기의 왕족, 시인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정(婷), 본관은 전주(全州), 자(字)는 자미(子美)이고 호(號)는 풍월정(風月亭)이며 시호(諡號)는 효문(孝文)이다.
덕종의 맏아들로 성종의 친형이며, 세조의 첫손주이자 장손이다. 어릴 때에는 할아버지인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중국에까지 그의 시가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북촌에다 별장을 지어놓고 그 곳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묻혀 일생을 보냈다. 예종의 사후 장손인 자신 대신 동생인 자을산군이 왕위(王位)를 계승했으나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불평불만을 나타낼 것을 내다본 정희왕후의 지시로 그는 반발 무마용으로 특별히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된다.
사후 그의 묘는 수난을 당하였다. 연산군은 그의 부인 승평부대부인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그를 보고는 밉게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긴 쇠기둥을 만들어 그의 묘 광중(壙中)에 꽂게 하였는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1]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사당이 있으며, 전주 이씨 계성군파에서 사당을 관리하고 있다.
최근 수정 시각:
月山大君[1]
1454~1488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의 친형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정(李婷)으로 호인 풍월정(風月亭)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최고의 자기 관리왕
1454년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과 한확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도원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자신도 세손이 되는가 싶더니... 세 살 때 아버지가 죽는다. 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세자가 죽으면 세자의 아들이 대통을 잇는 게 순리이지만 세조는 자신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해 버리면서 월산대군은 완전히 물먹게 된다.[2]
그렇게 시간은 흘러 1468년 해양대군이 즉위하여 예종이 된다. 그러나 예종이 불과 재위 1년 2개월만에 사망하면서 월산대군에게도 희망이 생긴다. 당시 예종의 아들(제안대군)은 불과 4세였기에 세조의 장손인 자기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나이도 시의적절하게 15세라 내심 기대를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 수빈 한씨가 당시 최강의 권신인 한명회의 딸과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잘산군을 결혼시킨 일이 빌미였다. 이 일을 한명회와 수빈의 왕위를 염두에 둔 사전 모의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미 왕위가 자신의 시동생인 예종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예종이 요절만 안한다면야 자동적으로 예종의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갈 건데 역모를 꾸밀 각오가 아니고서야 왕위를 노리고 한명회와 결탁해서 사돈관계를 맺었다는 설명은 비합리적이다. 그냥 단순 우연.
각설하고 예종이 죽은 당일날 신숙주, 한명회 등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와 논의하여 한명회의 사위라서 그나마 정치적 보호자가 더 많은 동생 잘산군을 차기 왕으로 결정한다. 잘산군이 성종으로 왕위에 오르고 나서 2년 뒤, 왕의 친형이 된 그는 기존의 월산군에서 월산대군으로 승진진봉되었다. 왕위를 빼앗긴 것에 대한 위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어차피 월산대군의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성종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덕종으로 추숭되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동생이 왕위에 오른 후 월산대군은 정말 철저한 자기관리로 자신의 안전을 지킨다. 사실 성종보다 계승 서열이 높았기에, 까딱하면 역모의 추대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이러한 자기관리는 자신 뿐만 아니라 가노(家奴)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어서 다른 시대에 흔히 발생한 왕족 집안의 사람이 배경을 믿고 행패를 부리는 사건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 흔한 술 실수 한 번 않고 망원정(望遠亭)에서 시와 글에 묻혀 지내다시피 살면서 보내게 된다. 성종은 그러한 형을 가슴 아프게 여겨 그를 자주 만남으로서 위로해 주었다.
월산대군은 1488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아무래도 평생 강박에 가까운 자기관리로 인한 스트레스가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월산대군은 당대의 문장가로 유명해서 중국에서도 월산대군의 시가 알려져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월산대군이 살던 집은 이후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자 선조가 임시 궁궐로도 사용하는데 지금의 덕수궁이다.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가 연산군에게 험한 꼴을 당하여 그 결과로 임신을 하게 되자 박씨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였고 이에 분을 품은 박원종이 중종반정을 일으켰다는 야사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연산군 항목 참조. 어쨌든 오래 살면 연산군을 봐야했다..
월산대군은 정실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하고 서자 덕풍군(德豊君) 이이(李恞)를 두었는데 덕풍군의 장남 파림군 이주는 요절하고 그의 차남 계림군 이유[3]과 삼남 전성도정[4] 모두 을사사화 때 연루되어 사사 당하였다.
그러나 계림군과 전성도정의 자식들은 화를 피해 대를 계속 이어 나갔고 현재 전주 이씨 계성군파로 이어지고 있다. 계림군의 후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와 DJ정권 시절 노동부장관을 지낸 이기호가 있다.[5]
왕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월산대군 (月山大君,1454~1488) 정실부인1명, 측실1명, : 자녀1명
그의 장남인 덕풍군은 22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덕풍군의 장자인 파림군마저 젊어서 요절하였다. 셋째 아들인 전성도정은 을사사화 때에 죽게 된다. 덕풍군의 차남인 계림군은 후손이 없어 성종의 서자인 계성군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을사사화 때 역모로 물려 죽는다. 월산대군파의 후손은 파림군의 아들 양천도정과 양원도정을 통해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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