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속의 러시아’라고 불리는 국경 도시 나르바(Narva)의 분위기가 요즘 심상치 않다. 에스토니아가 공산주의 소련 정권 시절의 잔재를 청산한다며 이 도시에 있던 관련 기념물들을 철거하자 러시아계 주민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과거 오랫동안 제정 러시아 및 그 후예인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에스토니아는 러시아계 주민이 많고 러시아어가 널리 쓰이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에스토니아·러시아 관계가 급격히 악화하면서 러시아어 사용자들의 입지가 위축되고있다.
© 제공: 세계일보지난 16일(현지시간) 에스토니아·러시아 접경지역에 있는 에스토니아 도시 나르바에서 공산주의 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을 기념하는 무기 등 전시물들이 중장비에 의해 깡그리 철저되고 있다. 나르바=AP연합뉴스
17일(현지시간) 외신 보도에 따르면 나르바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소련제 T-34 탱크를 비롯한 2차대전 기념물들이 많이 있었는데 최근 깡그리 철거됐다. 이 기념물들은 한때 에스토니아를 점령했던 독일군을 소련군이 몰아낸 것을 기리고자 조성됐다. 나르바강 옆에 있는 2차대전 희생자 공동묘지 역시 소련을 ‘해방군’으로 묘사하며 일방적으로 옹호해 온 모습에서 벗어나 ‘중립적’ 입장에서 모든 전사자 및 민간인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는 이런 조치의 근본 원인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들었다. 그는 “러시아는 호전적이고 적대적인 인접국”이라며 “해당 기념물들은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에 의한 억압, 그리고 점령을 상징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소련 잔재의 청산은 에스토니아의 안전을 보장하고 우리 국민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고 덧붙였다.
에스토니아는 과거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1940년부터 1991년까지는 소련에 강제로 병합됐다. 자연히 러시아계 주민이 많이 살고 러시아어가 공용어처럼 쓰인다. 약 133만명의 인구 중 4분의 1 내지 3분의 1이 러시아계 주민이란 통계도 있다. 자연히 이들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러시아에서 에스토니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나르바 같은 곳은 주민의 90% 이상이 러시아어를 쓴다.
© 제공: 세계일보17일(현지시간) 에스토니아 나르바에서 공산주의 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을 기념하는 무기 등 전시물이 깡그리 철거된 자리에 러시아계 주민들이 꽃다발을 갖다 놓고 있다. 나르바=타스연합뉴스
이들 중 상당수는 2차대전 기간 나치 독일의 억압을 받던 에스토니아가 소련군 덕분에 ‘해방’을 경험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반면 칼라스 총리를 비롯한 정부 측 인사들은 원래 독립국이던 에스토니아가 1940년 소련군에 의해 강제로 점령된 점을 들어 “2차대전 말기 소련군의 에스토니아 진주는 해방이 아니라 ‘재점령’에 불과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2차대전 기념물이 철거된 뒤 벌써부터 나르바에선 러시아계 주민들을 중심으로 반발하는 기운이 감지된다. T-34 탱크를 비롯한 기념물이 사라진 자리엔 러시아계 주민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추모 꽃다발이 갖다 놓았다. “왜 멀쩡한 역사를 지우려 하느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는 모습이다. 에스토니아 정부 관계자는 “나르바 주민들이 기념물 철거에 신경을 쓰는 것은 분명하다”는 말로 지역사회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인정하며 “에스토니아의 정체성을 지키고 나르바 주민들의 요구도 반영하는 선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하는 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