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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생의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따뜻한세상
ㄱ 가난한 처녀 ㅡ 허난설헌 가득하다 ㅡ 유승도 겨울 ㅡ 윤동주.임길택. 조병화 겨울강 ㅡ 문인수.박남철.오탁번 겨울 강가에서 ㅡ 안도현 겨울 까마귀 ㅡ 김현승 겨울 강변에서 ㅡ 문인수 겨울 강구항 ㅡ 송수권 겨울 그리스도 ㅡ 김남조 겨울 나그네 ㅡ 겨울날 ㅡ 김광섭 겨울 노래 ㅡ 마종기.오세영. 겨울논 ㅡ 조용미 겨울, 동강 ㅡ 서원동 겨울 들판을 거닐며 ㅡ 허형만 겨울로 가는 마을 ㅡ 최하림 겨울 마음 ㅡ 이상화 겨울물오리 ㅡ 이창수 겨울바다 ㅡ 김남조 겨울밤 ㅡ 박용래. 복효근. 신경림 겨울밤의 꿈 ㅡ 김춘수 겨울 사랑 ㅡ 고정희.문정희 겨울 삽화 ㅡ 안도현 겨울 아침 풍경 ㅡ 김종길 겨울 안부 ㅡ 권갑하 겨울 억새밭에서 ㅡ 주병률 겨울에게 ㅡ 마경덕 겨울을 기다림 ㅡ 김기택 겨울의 동화 ㅡ 최치언 겨울의 춤 ㅡ 곽재구 겨울 이야기 ㅡ 로렌스 겨울 일기 ㅡ 문정희 겨울 잠 ㅡ 박목월 겨울 저녁 서산에서 ㅡ 황동규 겨울저녁의 시 ㅡ 남진우.박주택 겨울 초대장 ㅡ 신달자 겨울편지 ㅡ 이해인 겨울풀 ㅡ 이근배 겨울풍경 ㅡ박남준 겨울 햇볕 ㅡ 허영자 고드름 ㅡ유지영 그 겨울밤 ㅡ안도현 그리움 ㅡ 이용악 그 밤에 내린 눈은 ㅡ 길상호 그 어둡고 추운, 푸른 ㅡ 이성복 그해 겨울 ㅡ 마경덕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ㅡ 이면우 깊은 눈 ㅡ 이재무 ㄷ 동모동월 ㅡ 박형준 동안거 ㅡ 고재종 ㅁ 몽유. 겨울밤 ㅡ 이경진 ㅂ 밤 ㅡ 심훈 백야 ㅡ 기형도 붉은 겨울 ㅡ 김수우 ㅅ 산가 ㅡ 도종환 서대문형무소 ㅡ 김광섭 설야 ㅡ 김광균 ㅇ 아무 생각없이 겨울 풍경 그리기ㅡ 최하림 아버지의 겨울 ㅡ 임길택 외딴집 ㅡ 장석남 이 밤의 툇마루 끝이 ㅡ 조정권 ㅈ 잿빛 겨울날 ㅡ 헤세 절정 ㅡ 이육사 ㅊ 초겨울 ㅡ 도종환 초겨울 편지 ㅡ 김용택 ㅌ 탕약 ㅡ 백석
가난한 처녀 허난설헌 쇠로 만든 가위 손으로 잡으니 밤 추위에 곱아오는 열 손가락 시집갈 남의 옷만 지어주고 해가 바뀌어도 혼자 산다네 허난설헌(1563-1589) 강원도 강릉
가득하다 유승도(1960 - ) 서천 산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개의 짖음도 흑염소의 울음소리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돌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날아가는 까치도 까치가 앉았던 살구나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 밖으로 나서는, 아이의 목소리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하늘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금 내린 눈까지 지우며 눈이 내린다
겨울 윤동주(1917 - 1945) 북간도 명동촌.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라미 달랑달랑 얼어요
겨울 임길택 겨울이면 긴 목에 수건을 매어 파고드는 찬바람 막아보지만 찾아오는 고뿔 손님 어쩔 수 없네 삼십릿길 장터 약국 멀기만 하여 얇은 옷 바람 길 나설 수 없고
오미자 찻물 끓여 물을 마시며 아궁이에 불 지피어 맨발 달궈요
겨울 조병화 침묵이다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 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 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 내어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겨울 까마귀 김현승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가까워질 수도 있는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한
열매는 꽃이었던
너와 네 조상들의 빛깔을 두르고
내가 12월의 빈 들에 가늘게 서면 나의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굳은 책임에 뿌리박힌 나의 나뭇가지에 호올로 앉아
저무는 하늘이라도 하늘이라도 멀뚱거리다가
벽에 부딪쳐 아, 네 영혼의 흙벽이라도 덤북 물고 있는 소리로 까아욱 ㅡ 까각 ㅡ
겨울강 문인수 바람은 이제 엷은 살얼음으로 깔리면서 뻘밭 위에다가 덜렁 거룻배 한 척 올려놓고는 또 거기서 나와 처마 끝으로 어둑어둑 번져 가더니 이번에는 굴뚝 끝에서 오래 머리 풀고 몸 조심하거라...자주 편지하고... 이르며 사람들은, 낳은 자식들의 날개를 깊이 품노라 사람들은, 저마다의 땅끝에 이르러 집을 짓고 낳은 자식들의 날개를 깊이 품노라 사람들은. 저 갈대숲으로 드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모로 누우며 ...
겨울강 박남철 겨울강에 나아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돌 하나를 던져 본다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쩡 쩡 돌의 튕기며, 쩡,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아, 쩡 봄이 오면 녹아 흐를 것들아, 쩡, 쩡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흐를 것들이 쩡,쩡, 쩡, 쩡, 쩡
겨울 강가에 나아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 본다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소 제 바닥에 닿을 돌들을 쩡 쩡 쩡 쩡 쩡 쩡 쩡
겨울강 오탁번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메 산매미 날개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은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지 풀려 반짝이는 여울을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 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강구항 송수권 상한 발목에 고통이 비듬처럼 쌓인다 키토산으로 저무는 십이월 강구항을 까부수며 너를 불러 한 잔 하고 싶었다 댓가지처럼 치렁한 열 개의 발가락 모조리 잘라 놓고 딱,딱, 집집마다 망치 속에 떠오른 불빛 게장국에 코를 박으면 강구항에 눈이 설친다 게발을 때릴수록 밥은 깊고 막소금 같은 눈발이 포장마차의 국솥에서도 간을 친다 현대시학.2001년 12월호.
겨울 강변에서 문인수 먼 수풀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새들은 왜 건너건너 날아가고 있나요
강 건너로 가서 살고 싶어요 어머니
얘야, 내 귓속을 들여다 보아라
찬바람 드나드는 갈대숲 말이냐 추운 저 새소리 말이냐 얘야.
겨울 그리스도 김남조 오늘은 눈 덮인 산야를 거닐으시네 눈 같이 더욱 흰 맨발이시네
그 옛날 물 위를 걸으시던 강줄기도 얼어 광막한 수정의 빙판 바늘 꽂히는 한기의 그 위를 거닐으시네 희디 흰 맨발이시네
울고 싶어라 머리칼도 곤두서는 율연한 추위에 물과 바다의 모든 깊은 곳으로부터 보혈을 섞어 빚은 세봄의 혈액을 한없이 한없이 자아 올리시는 雪日의 주님
겨울 나그네 김재진 점점 더 눈이 퍼붓고 지워진 길 위로 나무들만 보입니다 나무가 입고 있는 저 순백의 옷은 나무가 읽어야 할 사상이 아닌지요 두꺼운 책장 넘겨 찾아내는 그런 사상 말입니다 그대가 앉아 있는 풍경 뒤에서 내가 노을이 된 것은 알 수 없는 그런 사상 때문은 아닙니다 그대라고 부르는 그 이름의 떨림이 좋아 그대를 그대라 부르고 싶을 뿐, 또 한 번의 사라잉 신열처럼 찾아와서 나를 문 두드릴 때 읽고 있던 책 내려놓으며 그대는 나무가 입고 있는 그 차가운 사상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겠지요 그대, 단 한번 내가 가슴 속에 쌓아두고 싶은 맹세나 기도 같은 그대 그대가 퍼붓는 눈발이라면 나는 서 있는 나무 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대가 바람이라면 나는 윙윙 울고 있는 전신주 일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눈 위에 세워놓은 이정표 따라 슬픔 쪽으로 좀더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그대는 쏟아지는 하늘입니다
겨울날 김광섭 마당에서 봄과 여름에 정든 얼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그렇게 명성이 높던 오동잎도 다 떨어지고 저무는 가을 하늘에 인가의 정서를 품던 굴뚝 보얀 연기도 찬바람에 그만 무색해졌다
그런 늦가을에 김장 걱정을 하면서 집을 팔게 되어 다가오는 겨울이 더 외롭고 무서웠다 이삿짐을 따라 비탈길을 총총히 걸어 두만강 건너는 이삿군처럼 회색 하늘 속으로 들어가 식솔들이 저녁상에 둘러앉으니 어머님 한 분만 오시잖아서 별안간 앞니가 무너진 듯 허전해서 눈 둘 곳이 없었다 낯선 사람들이 축대에 검정 포장을 치고 초롱을 달고 가던 이튿날 목 없는 아침이 달겨 들어 영원한 이별인데 말 한 마디 못하고 갈라진 어머니시다!
가신 뒤에 보니 세월 속에 묻혀 있는 형제들 공동의 부엌까지 무너져 낙엽들이 모일 데가 없어졌다 사람이 사는 것이 남의 피부를 안고 지내는 것이니 찬바람이 항상 인간과 더불어 있어서 사람이 과일 하나만큼 익기도 어려워 겨울 바람에 휘몰리는 낙엽들이 더 많아진다
고난의 잔에 얼음을 녹이며 찾는 것은 그 슬픔이 아니요 겨울 하늘에 푸른빛을 띤 봄이다 그 봄을 바라고 겨울 안에서뱅뱅 돌며 자리를 끌고 한 치 한 치 태양의 둘레를 지구와 같이 굴러가면서 눈과 얼음에 덮인 대지의 하루를 넘어서는 해질 무렵 천장에서 왕거미가 내리고 구석에서 귀또리가 어정어정 기어 나온다 어느 날 목 없는 아침이 또 왈칵 달려들면 이런 친구들에게 눈짓 한 번 못하고 친구들의 손 한 번 바로 잡지도 못하고 가리라
겨울 노래 마종기 눈이 오다 그치는 나이 그 겨울 저녁에 노래 부른다 텅 빈 객석에서 눈을 돌리면 오래 전부터 헐벗은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 아직 웃고 있는 것도 보인다 내 노래는 어디서고 끝이 나겠지 끝나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었으니까
짧은 하루가 문 닫을 준비를 한다 아직도 떨고 있는 눈물의 몸이여 잠들어라 혼자 떠나는 추운 영혼 멀리 숨어 살아야 길고 진한 꿈을 가진다 그 꿈의 끝막이 빈 벌판을 헤매는 밤이면 우리가 세상의 어느 애인을 찾아내지 못하랴 어렵고 두려운 가난인들 참아내지 못하랴
겨울 노래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겨울 논 조용미 눈 온 뒤 겨울 논바닥 내려다보면 印花紋이다 빽빽한 문양을 찍고 백토를 채워넣은 흰 눈이 덮인 논은 커다란 분청사기 들은 도자기 가득한 가마터 저 촘촘한 무늬 사이로 꼬불꼬불 몇 사람이 인화된다 먼 길 가는 검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허공에 인화되어 박힌다 귀얄문처럼 바람이 휘익 들을 쓸고 지나간다
겨울, 동강 서원동 문산나루 질퍽한 삼들 어라연 휘돌아 돌며 숨차 헐떡거리다 얼음짱 되어 문득 발걸음 멈춰 선곳 겨울 동강은 지친 몸 기대 술 곳조차 없이 삭막하다 산짐승들 뛰놀던 협곡 사이로 자갈톱 스쳐온 찬바람만 길게 한숨소리 내뿜고 있다 아무도 없다 앙상하고 고즈넉하다 응고된 피딱지인 듯 여기저기 나뒹구는 녹슨 깡통들 넝마 되어 펄럭대는 폐비닐 조각들 우리 모두의 마음 속 숨겨진 상처 마냥 한없이 삐걱거릴 뿐
겨울 동강은 이빨 빠진 늙은이가 뜯어먹다 남긴 풀빵처럼 곳곳에서 찐득거린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 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도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조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레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 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겨울로 가는 마을 최하림 가을이 저물 대로 저물어 꼭지가 떨어지고 나면 돌담의 맨드라미와 피마자들은 색깔을 잃어버리고 뒤안 우물도 말라붙어 소리를 죽인다 추수를 끝낸 농부들은 쇠스랑과 쇠갈퀴 써레 괭이들을 헛간에 가지런히 넣고 빗장을 지르고 나서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네거리로 나간다 여인들도 그림자를 끌고 마당을 지나간다 시월과 십일월은 잠시 숨을 죽이고 골목을 빠져 나간다 검은 까마귀들이 날개를 치며 논두렁에 내려앉다가 올라간다 아이들이 동구길에서 아우성친다 머리가 파르스름한 사미승이 논두렁 건너 소나무 숲길로 걸음을 재촉하며 간다 아직도 한 뼘쯤 해는 서산에 남아 있고 네거리에서 사람들은 넘어가는 해를 일없이 보고 있다
겨울 마음 이상화 물장사가 귓속으로 들어와 내 눈을 열었다 보아라! 까치가 뼈만 남은 나뭇가지에서 울음을 운다 왜 이래? 서리가 덩달아 추녀 끝으로 눈물을 흘리는가 내야 반가웁기만 하다 오늘은 따스겠구나
겨울물오리 이창수 고요히 흘러가는 강물도 겨울엔 뼈를 갖는다 그리움이 그리움을 지우는 물결이 세상의 여울을 거쳐 희고 단단한 물의 뼈대를 세운다 지느러미가 되기도 하고 날개가 되기도 하는 물살에 달빛이 부실 때 물오리들 깃털보다 가벼운 물의 뼈에 살을 붙인다
겨울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혼령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인고의 물리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겨울밤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강아지풀. 민음사. 1975년
겨울밤 복효근 감나무 끝에는 감알이 백서른 두 개 그 위엔 별이 서말 닷 되
고것들을 이부자리 속에 담아와 맑은 잠 속에 내 눈은 저 숲가에 궁구는 낙엽 하나에까지도 다녀오고
겨울은 고것들의 이야기까지도 다 살아도 밤이 길었다
겨울밤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 뿐 올해에는 닭이라고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 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1965년 한국일보 발표
겨울밤의 꿈 김춘수 저녁 한동안 가난한 시민들의 사로가 피를 데워 주고 밥상머리에 된장찌개도 데워 주고 아버지가 식후에 석간을 읽는 동안 아들이 식후에 이웃집 라디오를 엿듣는 동안 연탄가스는 가만가만히 쥐라기의 지층으로 내려간다 그날 밤 가난한 서울의 시민들은 꿈에 볼 것이다 날개에 산호빛 발톱을 달고 앞다리에 세 개나 새끼 공룡의 순금의 손을 달고 서양 어느 학자가 Archaeopteryx라 불렀다는 쥐라기의 새와 같은 새가 한 마리 연탄가스에 그을린 서울의 겨울의 제일 낮은 지붕 위에 내려와 앉는 것을
겨울 사랑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닌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겨울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겨울 삽화 안도현 남부시장 정육점 골목에 소피를 파는 집이 있다
소피는 소가 쿵쾅쿵쾅 걸을 때 소의 몸속을 돌던 뜨거운 것 이 핏속에는 겨울아침 언덕길을 오를 때 뿜던 콧김 같은 것도 혹 섞여 있을지 모르는데
못난 뿔처럼 남의 집 담벼락을 들이받았다거나 그 흔한 내장들처럼 평생 똥을 주무른 적도 없는 소피가, 지금은 차갑게 응고되어 붉은 고무 바께쓰에 담겨 있다
정육점 주인은 소의 살과 뼈를 잘 발라내 저울로 일일이 무게를 달아 팔다가 소피는 대접으로 움푹 떠서 판다 한 대접에 천원이다
겨울 안부 권갑하 진저리치던 울음은 꼬투리째 떨어졌다 한낮의 막막한 현기, 뒤채던 애잔함도 먼 고요 줄을 고르듯 소슬한 현을 퉁긴다 노을처럼 그댄 타오르고 싶다지만 난 매정스레 업신여김을 받고 싶다 불감의 손 마디 마디 살얼음만 되감기는 떨어지며 피는 꽃이 어디 눈물뿐이랴 다 지운 생이라도 삭은 대궁은 남아 희디 흰 기다림으로 네 안부를 묻는다 <시선 봄호>
겨울 아침 풍경 김종길 안개인지 서릿발인지 시야는 온통 우웃빛이다
먼 숲은 가지런이 세워놓은 팽이버섯, 아니면 콩나물
그 너머로 방울 토마토만한 아침 해가 솟는다
겨울 아침 풍경은 한 접시 신선한 샐러드 다만 초록빛 푸성귀만이 빠진
겨울 억새밭에서 주병률(1960 - ) 경주 나무에서도 소리가 난다고 했다 두릅나무에는 두릅 소리가 나고 느릅나무에는 느릅 소리가 난다고 했다 두릅나무 소리가 소리가 되면 개동백에 닿고 느릅나무 소리가 소리가 되면 눈보라에 닿아서 머지않아 봄이 오고 꽃이 핀다고 했다 얘야, 이 발자국 소리를 좀 들어보아라 이 소리가 두릅나무에 닿으면, 이 소리가 느릅나무에 닿으면, 눈보라 사이사이 맺힌 저 어둠에도 길도 되고 꽃도 되느니라 겨울 하루 탁발도 시원찮던 늦은 산길에서 한 마리 노쇠한 나귀처럼 털색도 바래고 뼈도 물러서 바람의 귀로나 들었어야 했던 노승의 한마디 말 두릅나무 소리가 소리가 되면 느릅나무 소리가 소리가 되면 하늘에도 길이 된다고 했던 말 땅에도 길이 된다고 했던 말 오늘은 눈보라 치고 성긴 겨울 억새밭에서 그 말들을 베고 누워도 그러나 아직도 나는 내게서 가서 나무에게 닿을 소리가 없다 두릅나무가 되고 느릅나무가 되어서 돌아올 소리가 없다 멀리 섬진강 저문 강에서 쩡쩡거리며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겨울에게 마경덕 내가 앉았던 자리가 그대의 지친 등이었음을 이제 고백하리 그대는 한 마리 우직한 소. 나는 무거운 짐이었을 뿐 그대가 가진 네 개의 위장을 알지 못하고 그대를 잘 안다고 했네 되새김 없이 저절로 움이 트고 꽃 지는 줄 알았네 내뿜는 더운 김이 한 폭의 아름다운 설경인 줄 알았네 그저 책갈피에 끼워 둔 한 장의 묵은 추억으로 여겼네 늦은 볕에 앉아 천천히 길마에 해진 목덜미를 들여다보니 내 많은 날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알겠네 거친 숨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대를 바라보면 기도하는 성자를 떠올리네 퀭한 눈 속의 맑은 눈빛을 생각하네 별이 식어 그대의 병이 깊네
겨울을 기다림 김기택 두꺼운 털 같은 추위 둥글게 말아 웅크리면 따뜻해지는 추위 너무 껴입어서 무거운 추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공격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추위 이빨도 발톱도 없는 꼬리를 흔드는 추위 배고프면 더 신나게 흔드는 추위 숨쉴 때마다 텅 빈 위장에 밥 대신 들어앉아 배고픈 배 흔들며 뛰어노는 추위 뱃가죽과 등뼈가 서로 얼어붙으면 저절로 허리가 공손하게 굽어지는 추위 정신통일하여 밥 생각을 하면 가만히 졸다가 따뜻해지는 추위
겨울의 춤 곽재구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튼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낙엽 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들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겨울의 동화 최치언(1970 - ) 전남 영암 그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전거 한 대 바삐 지나가고 집집마다 푸른 등잔을 내어걸고 있었다 눈은 더 깊이 무겁게 우리들의 가슴에 쌓였다 멀리 사이렌 울음이 길게 울렸다 그쳤다 잠을 뒤척이는 누군가의 꿈속에서 너는 성냥을 파는 소녀가 되었다 곱은 손을 호호 불며 너는 자전거가 지나간 자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불빛들이 모두 꺼져가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하루치의 꿈을 시장에 내다 팔고 술에 취해 너의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텅 빈 주머니 속에는 너에게 던져줄 동전도 없었다 마지막 겨울은 너와 함께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겨울 이야기 D H 로렌스 어제 들판은 오직 흩어지는 눈발로 희부옇더니 지금은 가장 긴 풀잎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깊은 발자욱은 눈을 덮고 흰 언덕 끝 솔밭을 향해 걸어갔구나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안개의 엷은 휘장이 검은 숲과 희미한 유자빛 하늘을 가렸기에 그러나 그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초조하고 차갑게, 흐느낌 같은 것이 싸늘한 한숨에 스며들면서 피할 수 없는 이별이 더욱 가까워질 뿐임을 정녕 알면서도 왜 그녀는 그렇게 선뜻 오고 마는 걸까 언덕길은 험하고 내 걸음은 더디다 내가 할 말을 알면서도 왜 그녀는 오는 것일까
겨울 일기 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 번 열지 않고 반추 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겨울 잠 박목월 천장 구멍에서 쥐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두 개의 수염이 짝 뻗은 쪼붓하고 조그맣고 놀란 얼굴
쩡쩡 얼음이 어는 밤 얼음 위에 바싹바싹 달빛이 부서지는 밤
오오 추워라 아랫목 이불 속에 우리 아기가 고개를 푹 파묻었다 방에는 일렁일렁 흔들리는 그림자 아직도 아버지는 글을 쓰시는데 저절로 전등이 흔들리는 밤
천장 구석에 쥐가 쥐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새까만 두 눈이 또록한 쪼봇하고 조그많고 놀란 얼굴
오오, 추워라 찡 울린 저 소리는 추위에 날무대가리가 터진게지 추위에 독이 갈라진 게지 새끼 있는 구멍으로 어서가 자거라
겨울 저녁 서산에서 황동규 어른대던 사람들 둑에서 내려가고 한참 만에 사람 하나가 새로 올라간다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던 금 천천히 풀어지고 언제부터인가 눈이 자꾸 안 보이는 것을 찾고 있다 바티칸이 감추어 두었다 이따금 꺼내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그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 얼굴의 눈이 열심히 미켈란젤로를 찾는 그런 겨울 저녁 눈 친 벌판을 둘러보는 동박새의 눈 한 점 두 점 눈발이 시작되다 빗방울이 되어 날기도 하는 그런 저녁 가창오리 몇 마리 날아올라 허공을 휘돌다 사라진다 김용배의 설장구, 그 시원한 끄트머리! 빗방울 몇이 얼굴을 따갑게 때린다 손사래를 친다 지금 이곳이 지구 속인가 밖인가? 생각하다 말고 바람이 불고 있다
겨울 저녁의 시 남진우
겨울 저녁의 시 박주택 사위가 고요한 겨울 저녁 창 틈으로 스미는 빙판을 지나온 바람을 맞으며, 어느 산골쯤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밤을 견딜 나무들을 떠올렸다 기억에도 집이 있으리라, 내가 나로부터 가장 멀 듯이 혹은 내가 나로부터 가장 가깝듯이 그 윙윙거리는 나무들처럼 그리움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에 대한 나의 사랑도 추위에 떠는 것들이었으리라 보잘것 없이 깜박거리는 움푹 패인 눈으로 잿빛으로 물들인 밤에는 쓸쓸한 거리의 뒷골목에서 운명을 잡아줄 것 같은 불빛에 잠시 젖어 있기도 했을 것이라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것들은 제게도 뜻이 있어 희미하게 다시 사라져가고 청춘의 우듬지를 흔드는 슬픈 잠 속에서는 서로에게 돌아가지 않는 사랑 때문에 밤새도록 창문도 덜컹거리고 있으리라
겨울 초대장 신달자 당신을 초대한다 오늘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겨울 아침에 나는 물을 끓인다 당신을 위해서 어둠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내 힘이 비록 약하여 거듭 절망했지만 언젠가 어둠은 거두어지게 된다 밝고 빛나는 음악이 있는 곳에 당신을 초대한다 가장 안락한 의자와 따뜻한 차와 그리고 음악과 내가 있다 바로 당신은 다시 나아기를 바라며 어둠을 이기고 나온 나를 맨살로 품으리라 지금은 아침 눈이 내릴 것 같은 이 겨울 아침에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다 눈이 내린다 눈송이는 큰 벚꽃 잎처럼 춤추며 내린다 내 뜰 안에 가득히 당신과 나 사이에 가득히 온 누리에 가득히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리고 새롭게 창을 연다 함박눈이 내리는 식탁 위에
겨울편지 이해인 친구야 네가 사는 곳에도 눈이 내리니?
산 위에 바다 위에 장독대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만큼이나 너를 향한 그리움이 눈사람 되어 눈 오는 날
눈처럼 부드러운 네 목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것만 같아 눈처럼 깨끗한 네 마음이 하얀 눈송이로 날리는 것만 같아 나는 자꾸만 네 이름을 불러 본다
겨울풀 이근배 들새의 울음도 끊겼다 발목까지 차는 눈도 오지 않는다 휘파람 같은 나들이의 목숨 맑은 바람 앞에서 잎잎이 피가 돌아 피가 돌아 눈이 부시다 살아 있는 것만이 눈이 부시다
겨울 풍경 박남준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 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래 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이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 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다가 언 몸의 세사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 집 저 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을 끓인다 문 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소리 나 여기 바람 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겨울 햇볕 허영자 내가 배고플 때 배고픔 잊으라고 얼굴 위에 속눈썹에 목덜미께에 간지럼 먹여 마구 웃기고
또 내가 이처럼 북풍 속에 떨고 있을 때 조그만 심장이 떨고 있을 때 등어리 어루만져 도닥거리는
다사로와라 겨울 햇볕!
고드름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각시님 각시님 안녕하셔요 낮에는 햇님이 문안드리고 밤에는 달님이 놀러오신대
고드름 고드름 녹지 말아요 각시님 방 안에 바람 들으면 손 시려 발 시려 감기 드실라 유지영 작사. 윤극영 작곡.1924년 작곡.
그 겨울밤 안도현 한숨 자고 고구마 하나 깎아 먹고
한숨 자고 무 하나 더 깎아먹고
더 먹을 게 없어지면 겨울밤은 하얗게 깊었지
그리움 이용악(1914-1971) 눈이 노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그 어둡고 추운, 푸른 이성복 겨울날 키 작은 나무 아래 종종걸음 치던 그 어둡고 추운 푸른빛.
지나가던 눈길에 끌려나와 아주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살게 된 빛
어떤 빛은 하도 키가 작아, 쪼글씨고 앉아 고개 치켜들어야 보이기도 한다
그해 겨울 마경덕 흉년 든 그 해 탱자처럼 노랗게 황달을 앓던 아버지 눈 오는 아침, 재첩을 사러 간 엄마는 오지 않고
언니와 나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반 됫박 남은 호박씨를 까먹었다
종일 퍼붓는 눈 앞산의 눈썹이 지워지고 봉창 여닫는 소리, 잦은 기침 소리 뒤란 대밭 철퍼덕, 눈똥 누는 소리
쌀가루 같은 눈이 내려 가뭇없는 길
휘청, 발을 헛디딘 대숲은 한무리 새떼를 날려 보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이면우 배추 무씨는 늦여름 꿈의 부피처럼 쬐그맣다 텃밭 풀 뽑고 괭이로 쪼슬러 두둑 세워 심었다 나는 가으내 돈 벌러 떠돌고 아내 혼자 거름 주고 벌레 잡아 힘껏 키워냈던가 김장독 삿갓 씌우고 움 파 무 거꾸로 세워 묻고 시래기 엮어 추녀 끝에 내 걸으니 문득 앞산 희끗한 아침 대접 속 무청이 새파랗다 배추김치 새빨갛다 그 아리고 서늘함 무슨 천 년 묵은 밀지이듯 곰곰 씹어보다 눈두덩이 공연히 따뜻해지다 햇살 동쪽 창호에 붉은 날
누나 임길택 눈 내리는 날 시집을 가면서 포근한 눈 같은 마음도 가지고 갔어요
그런데도 어쩌다 찾아가 보면 매형이 신던 양말 기워 신고 누나는 입던 옷뿐이었지요
누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학이 되고 싶다 했어요 고향 학골에 날아와 어릴 적 뛰놀던 길 돌아보는 그런 학이 되고 싶다 했어요
동안거 고재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곰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동모동월冬母冬月 박형준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려 오늘밤 흰달로 오시네
물가에 둥근 돌 빨래가 쌓였던 곳 돌덩어리 가슴에 박혀 울던 사람들 물결에 씻겨가네
물살 아래 누워 있네
처녀들 모두 떠나가고 얼음 구멍에 손을 넣고 어머니 빨래를 끄집어내시네 죽은 처녀들 끄집어내시네
물에 잠겨 있는 어머니 오늘밤 흰달로 오시네
몽유. 겨울밤 이경진(1968 - )2006년 계간<문예연구>신인상으로 등단. 잔업 끝내고 돌아온 어머니가 누에를 사오셨다 우리는 그것을 필통 세 개에 나누고 날마다 해질 무렵까지 뽕잎을 찾아 헤맸지만, 뽕나무들은 다 베이고 없었다 누군가 오동잎을 대신 먹여도 된다고 귀에 속삭였다 나는 누이와 막내를 이뜨기*까지 보내 오동잎을 따오게 했다 바람이 몹시 거칠어 동ㅅ생들의 손등은 항시 거북 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누에는 푸석푸석한 오동잎을 게걸스럽게 먹어댔지만, 살은 오르지 않고 점점 딱딱해졌다 위장약 같은 흰 똥도 쌌다 겁난 나는 문둥이들이돌아다닌다는 이뜨기 너머까지 동생들을 보냈다 그날 밤늦게 막내가 울면서 혼자 백열등 밑으로 기어 들어왔다 야근 나간 어머니는 오시지 않았다 나는 온몸이 딱딱해진 막내의 몸을 껴안은 채 잠들었는데, 탄구멍처럼 활짝 열린 꿈속에서; 누이를 보았다 뽕나무를 발견했어. 오빠, 잘했지? 우리 이젠 더 큰 방으로 갈 수 있는 거지? 훔쳐 먹은 오디처럼 검은 입술로 웃고 있었다 골방에선 고치를짓지 못한 누에가 썩고 있었다 주인집 개가 짖고 있었다
*이뜨기ㅡ 예전에 익산 동산동 일대를 부르던 이름이다 옛날에 둑이 있었던 자리라는 뜻에서 옛뚝이, 또는 이뜨기라고 했다
밤 심훈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이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 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장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 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을 자맥질 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소리 ... 별없는 하늘 밑에 들어줄 사람 없구나!
白夜 기형도 눈이 그친다 인천집 흐린 유리창에 불이 꺼지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 가늠할 수 없는 넓이로 바람은 손쉽게 더러운 담벼락을 포장하고 싸락눈들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오른다 흠집투성이 흑백의 자막 속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다 무슨 농구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 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사내는 문닫힌 상회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빈 골목은 펼쳐진 담요처럼 쓸쓸한데 싸락눈 낮은 촉광 위로 길게 흔들리는 기침 소리 몇, 검게 얼어붙은 간판 밑을 지나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백야 밟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눈길을 만들며 군용 파카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붉은 겨울 김수우(1959 - ) 부산 거대한 등들이 너울거립니다
포장마차 붉은 천막 국물과 소주잔을 놓고 앉은 영혼이 풀럭댑니다 자정 넘도록 혼불처럼 울렁이는 깊은 산마루들
오래된 사랑은 늘어난 빚돈만큼 아득하고 처음 꾸는 꿈은 수취인 불명만큼 서러워
문득문득 오래된 것들이 처음처럼 돌아오는 바람 속 거대한 등을 가진, 꽃잎만 한 아비들
하늘 끝에서도 잘 보이는 홍등입니다 먼 데서 바라볼수록 살아, 깜박이는 한 송이 산나리
아침이면 우주를 전파상처럼 운영하기 위해 온몸으로 울어야 할 유난히 붉은, 주전자 같은 등들이 너울거립니다
산가 도종환 어제 낮엔 양지 밭에 차나무 씨앗을 심고 오늘 밤엔 마당에 나가 별을 헤아렸다 해가 지기 전에 소나무 장작을 쪼개고 해 진 뒤 침침한 불빛 옆에서 시를 읽었다 산그늘 일찍 들고 겨울도 빨리 오는 이 골짝에 낮에도 찾는 이 없고 밤에도 산국화뿐이지만 매화나무도 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화는 매화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고요하였다
서대문형무소 김광섭 ㅡ 독방 62호실의 겨울 하이얀 성에 싸인 낡은 유리창 너머로 바람은 불고 불고 까치들 우는 저녁
태양을 등진 북향 철창 위로 검은 창막을 추근히 나리면
외론 등불 아래 붉은 옷을 걸치고 움직이는 그림자 슬픔을 깨우치나니
한숨에 젖어 때묻은 차디찬 벽 내일 물러갈 벽이로되 방은 모두다 무덤의 행렬
여기 생이 슷드려 정은 오고 가고 그리운 길 고요히 열리면
가슴 속 깊이 숨은 구슬들 흘러서 흘러서 눈물이 되나니
낮이나 밤이나 북향 철창은 어둡고 검은 창막 너머로 바람은 불고 불고 ... 1941년 <마음> 중앙문화협회 .1949년
김광섭은 일제 시대 창씨개명에 거역했다고 옥고를 치른 일이 있다
설야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 눈이 내러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아무 생각없이 겨울 풍경 그리기 최하림 눈이 내리니 나뭇가지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포물선을 그리며 휘어지다가 눈을 털고 일어나고 다시 눈을 털고 일어나고 한다 오후 내내 그 일을 단조롭게 반복한다 우리가 날마다 아침을 시작하고 또 시작하는 것과 같으다
이런 날 하늘을 지붕 가까이 내려와 멈추고 세상 길도 들녘에서 멈추고 세상 길도 들녘에서 모습을 지운다 나는 천근 무게로 눈꺼풀이 내려앉아 꿈속처럼 눈을 감는다 아이의 속뼈같이 여린 가지들이 사라지고 또다시 가지들이 떠올라 머나먼 마을에 차곡차곡 쌓인다
나는 사나운 짐승처럼 눈벌판을 마구 쏘다니고 싶지만 나는 결코 눈길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 눈은 나를 덮고 또 덮으며 종일 내려 쌓인다
아버지의 겨울 임길택 부엌에서 아버지가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탄 묻은 판자쪽을 주워다 놓고 온 집안 울리도록 바람구멍을 막고 있었다
산 너머 어디쯤에 겨울이 오고 있었다
외딴집 장석남 겨울 이른 아침 맑은 공기 속에 싸락눈 쏟아지기 시작하자 동그마한 흙마당에 나보다도 더 작은 하나님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떠 왔다갔다하시네 살구나무들이 뿌리를 가지런히 하는 소리 싸락눈 제일 많이 쌓이는 그 그늘 모퉁이에서 들리네
이 밤의 툇마루 끝이 조정권 산허리 둘린 안개 어둠에 잦아들고 언제 보아도 절벽 소나무는 급경사를 이루네 저녁부터 온 허공 잔잔히 메를 매기는 눈발 바라보네 이 밤의 툇마루 끝이 그대로 내밀어져 벼랑 꼭대기에 아슬히 나앉아 있는 것 같구나
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육사( - 1944.1.16베이징감옥)
잿빛 겨울날 헤세 고요하고 거의 빛이 없는 잿빛 겨울날 아직도 사람들이 자기와 말하는 것이 싫은 툴툴거리는 노인이다
그가 강물 소리를 듣고 있다 젊은 강물이 충동과 격정에 가득 차 흘러가는 것이 그에게는 주제 넘고 실없게 생각된다 그 참을성 없는 힘이
늙은 겨울날은 비웃듯 눈을 찌푸린다 아직 더 빛을 아낀다 아주 살짝 눈 내리기를 시작한다 얼굴 앞에 베일을 드리운다
노인의 꿈속에서 그를 번거롭게 하는 건 갈매기들의 요란한 소리 메마른 가죽나무 속에서 지빠귀들이 다투는 소리 중요하다는 모든 요란한 떠벌림이 그는 우습다 혼자 중얼중얼 조금씩 눈을 뿌린다 어둠 속까지
초겨울 도종환 올해도 갈참나무 잎 산비알에 우수수 떨어지고 올해도 꽃진 들에 억새풀 가을 겨울 흔들리고 올해도 살얼음 어는 강가 새들은 가고 없는데 구름 사이에 별이 뜨듯 나는 쓸쓸히 살아 있구나
초겨울 편지 김용택 앞산에 고운 잎 다 졌답니다
빈 산을 그리며 저 강에 흰 눈 내리겠지요
눈 내리기 전에 한번 보고 싶습니다
湯藥 백석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六味湯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아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여 萬年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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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겨울시로 겨울의 설경을 그리며 추억에 잠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