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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5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정말로 사랑한다면 ‘묻어둠’의 저주를 풀어라!
본문 : 사무엘하 13장 21절
다윗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몹시 화가 났지만, 암논이 사랑하는 맏아들이라 기분 상할 말을 하지 않았다. <사무엘하 13장 21절, 공동번역>
샬롬! 새로운 한 주의 시작, 주님의 날에 하나님의 평안과 은혜로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도 허락하시는 말씀으로 충만하여져서 새로운 한 주간을 생명과 말씀과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오늘 5월의 3번째 주일 저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히 공동번역으로 사무엘하 13장 21절을 본문으로 하는 ‘정말로 사랑한다면 묻어둠의 저주를 풀어라!’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먼저 공동번역으로 된 본문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몹시 화가 났지만, 암논이 사랑하는 맏아들이라 기분 상할 말을 하지 않았다. <사무엘하 13장 21절, 공동번역>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처한 상황과 쓰는 사람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됩니다. 각종 포털사이트에 이 글귀를 검색해보면 역시나 '호불호'가 갈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이 글귀가 긍정적이십니까? 아니면 부정적이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 말을 언제, 어떻게, 왜 사용하고 계십니까?
논어를 통해 공자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에 대해서 이렇게 글을 하나 남겼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는 이는 고상함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인물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공자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경을 기초로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긴 묵상 시간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답은 아주 간단하게 도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언제나 이 말은 '부정적'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에서 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글귀는 '묻어둠의 저주'라는 녀석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이 사용되어지기 시작한다면 경계하셔야 할 때입니다.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을 따르기 시작하는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세상의 법칙이 나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나를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이 '묻어둠의 저주'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란 기준 없이 세상의 기준으로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세상 풍류에 몸을 맡기며 살았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시작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가문 사람들도, 사무엘서의 문을 열었던 엘리 제사장도 포함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믿음의 왕 다윗도, 그리고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이르기까지, 어찌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바로 '좋은 게 좋은 거다'를 몸소 실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그 어느 누구도 '묻어둠의 저주'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니 그저 묻어두자고 했던 그 일이 결국에는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 저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매 번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많은 사건들 중에 잠시 다윗의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무엘하 13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다윗왕에게는 많은 자녀가 있었는데 그 자녀 중 다윗에게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이는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인 첫째 아들 ‘암논’입니다. 대부분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솔로몬을 가장 사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윗도 '장자'에 대해서 가장 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왕의 사랑하는 첫째 아들 암논에 대한 슬프고 안타까운 일화가 사무엘하 13장에 등장합니다. 솔직히 글로 적기도 참 민망한 일화입니다.
다윗 왕의 첫째 아들 암논은 아버지의 다른 아들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하게 됩니다. 당연히 자신에게도 누이였습니다. 그런데 한 아버지를 둔 이복 여동생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민망한 것은 그 여동생 다말이 '처녀'라는 사실 때문에 어찌하지 못해 병까지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암논은 자기의 누이 다말을 사랑하였으나,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병이 나고 말았다. <사무엘하 13장 2절, 새번역>
도무지 이해가 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 이런 이상한 캐릭터가 어디로부터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그런데 이런 암논의 마음을 부채질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모든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던 암논의 사촌친구로, 다윗왕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은 간계를 내어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모두 다 똑같이 이상한 놈들 천지입니다. 도대체 다윗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아들들이 등장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요나답도 답답합니다.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면 따끔하게 조언을 해 주어 정신을 차리게 해야지 간계라니! 유유상종! 암논보다 더 한 요나답이 등장했습니다.
당연히 암논은 요나답의 간계를 듣고 기쁘게 동의합니다. 그래서 간계에 따라 병에 걸린 척하며 아버지 다윗의 문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암논은 아버지 다윗에게 이렇게 요청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암논이 침상에 누워서, 병든 체 하고 있으니, 과연 다윗 왕이 그를 문병하러 왔다. 그 때에 암논이 왕에게 요청하였다. "누이 다말을 보내 주십시오. 제가 보는 앞에서, 누이가 맛있는 빵 몇 개라도 만들어서, 그것을 저에게 직접 먹여 주게 하여 주십시오." <사무엘하 13장 6절, 새번역>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의 부탁을 당연히 수락한 다윗입니다. 이상하다고 한 번이라도 생각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 듯 곧바로 다말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결국 간계대로, 암논과 요나답이 생각했던 대로, 다윗을 통해 다말이 자신에게 병문안을 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암논은 병문안을 온 다말을 결국엔 자신의 침실로 끌어 들여 동침하는 악한 일, 바보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아주 정신 빠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라는 다말의 말을 들으면서 왜 다윗과 밧세바가 떠오르는 것일까요? 여하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다말을 불쌍하고 비참하게 만든 것은 그렇게 동침하고 나니 암논의 마음이 180도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암논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무엘하 13장 15절, 새번역>
읽으면서도 너무도 괴로운 구절입니다. 화가 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런 기록이 성경에 등장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암논에게서 쫓겨난 다말은 돌아가 자신의 친오빠 압살롬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윗왕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의붓 남매이긴 하지만 한 가정 안에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압살롬은 자신의 동생 다말에게 욕을 보인 암논을 죽이는 데까지 사무엘하 이야기는 안타까운 진행을 이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왜 성경은 이런 일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묻어둠의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며 해결하지 않고 그저 ‘묻어둠’으로 인해 일어난 저주라는 사실을 바로 사무엘하 13장 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3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 <사무엘하 13장 1절A, 새번역>
여기서 ‘이런’ 일이란 바로 사무엘하 11~12장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의미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사무엘하 11~12장에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죽이고, 나단이 찾아오고, 아이가 죽고, 우리아의 아내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고, 솔로몬을 낳은 일련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말을 깊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은 그냥 아무렇지 않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사무엘하 11~12장에 등장하는 일들이 13장으로 연결되며, 여전히 '다윗왕'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12장에서 13장으로 쉽게 넘어오는 듯 보이지만, 이렇게 저렇게 잘 넘어간 듯 보였지만, 아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무엘하 13장은 사무엘하 11~12장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고발하며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이 분명 나단 선지자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일단락 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일까요? 도대체 어떤 모습이 다윗의 ‘묻어둠’이며,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생각일까요?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 죽었을 때, 밧세바와 함께 다시 동침하여 아이를 낳는 것보다, 오히려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들의 죄를 토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데 먼저 집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며 용서를 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토로하고, 용서를 구하며, 통곡했을 다윗왕이었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밧세바와 다시 동침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잘못된 선택이 다윗의 가정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결국 사무엘하 11~12장의 이야기를 통해 가장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바로 다윗의 가족들이란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의 가족들이 겪어야 할 상처에 대해서도 그 어떤 사죄도,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런 잘못된 행동을 통하여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아버지 다윗도 똑같았다는 핑계를 만들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오늘 사무엘하 13장에 ‘암논과 다말’의 일과 같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바로 다른 곳도 아니고 가정 안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암논이 오늘 행한 일은 다윗 가정의 불행 중 시작에 불과합니다. 하나둘씩 가정에서 균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너무도 안타깝고 슬프지만 앞으로 다윗의 가정은 균열을 넘어 분열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 때도 그렇고, 오늘 ‘암논과 다말’ 때도 충분히 이 '묻어둠의 저주'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불러달라고 말했을 때, 누가 봐도 이상한 부탁이었기에, 다윗은 충분히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아들 앞에서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아버지인 본인이 먼저 보였기에, 이런 비상식적인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더욱 자신이 사랑하는 첫째 아들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이 들어주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니 이런 비상식적인 간계를 미리 눈치 챈 다말은 암논에게 차라리 아버지 다윗왕에게 자신을 부인으로 달라고 말하면 줄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어떻게든 다윗은 충분히 이 저주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니깐, 흘러 가는대로 내 버려두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암논이 다말을 범했다는 그 황당하고 분노할 만한 사실을 전해 듣고도 그저 분노하기만 했을 뿐 암논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또 '묻어두고', '흘러가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경은 결코 이런 식의 '묻어둠'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결과를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묻어둠의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다윗은 가정 내에서 이미 자신의 딸 다말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하여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의 분노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짐으로 인하여 형제들끼리 미워하며 결국 이복 형 암논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안타까운 상황의 원인이 바로 다윗의 ‘묻어둠’ 때문이었는데, 그런 다윗의 '묻어둠'의 직접적인 이유를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 왕은 이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 몹시 분개하였다. <사무엘하 13장 21절, 새번역>
그런데 공동번역은 몹시 분개만 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다윗의 행동에 담긴 속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몹시 화가 났지만, 암논이 사랑하는 맏아들이라 기분 상할 말을 하지 않았다. <사무엘하 13장 21절, 공동번역>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와 있었던 일도 유야무야 지나간 것처럼, 암논이 행한 모든 일도 그냥 묻어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2년이란 시간동안은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2년이란 시간이 다윗이 그토록 사랑하는 첫째 아들 암논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던 것을 다윗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2년이 지난 후 다윗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가장 먼저 잃게 되는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더 크게 만든 것은 큰 아들 암논을 죽인 사람이 바로 작은 아들 압살롬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오늘 나누고 있는 이 모든 이야기는 비단 다윗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다'를 외치며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않고, 바꾸어야 할 것을 바꾸지 않고, 변화시켜야 할 것에 대해서 외면하고 지나온 우리의 오늘이 다윗의 잘못된 선택과도 같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꾸준히도 '묻어둠의 저주'가 일어날 기초를 만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이 ‘묻어둠의 저주’가 임하지 않도록 정말 전심을 다해 이런 묻어둠을 버려야 할 간절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정말로 가족을 사랑한다면, 정!말!로!사!랑!한!다!면! 이제 '묻어둠의 저주'가 시작되지 않도록 '좋은 게 좋은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기 불편하더라도, 상대의 기분이 상한다고 하여도, 당장은 힘들더라도, 발가벗겨지는 부끄러움이 둘러 덮을지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모른 척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지라도,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그냥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떠한 잔상도 남지 않도록,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도록! 어떠한 모양이라도 악이나 죄는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 개역개정>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제 '묻어둠의 저주'를 풀어주셔야 할 때가 왔습니다. 혹시 너무 긴 시간동안 내버려둔 '묻어둠'이 있으시다면 이제 꺼내어 과감하게 이별해야 할 때입니다. 너무 사랑해서 오히려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면 이젠 '진짜 마음'을 보이실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를 괴롭히는 '트라우마'가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입에 남아 있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을 지우셔야 합니다. 좋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만 남기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거다'라고 말하며 진정 진리를 통한 '자유함'을 시작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그만 올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가야 할 때입니다.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반드시 버리고, 해결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아프다는 이유로 아주 작은 암덩어리를 도려내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암은 곧 전이 되어 더 큰 암덩이가 되어 우리를 처음보다 훨씬 더 힘들게 만들고, 죽게 만들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도려내 치료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로 이런 굳은 결심으로 절대 '묻어둠'을 허락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냈으며, 낙심한 적이 없다. <요한계시록 2장 2~3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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