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막바지 대한(大寒)이 지난지도 닷새가 되었는데 강추위는 더욱 극성을 부린다.
오늘 춘천이 영하 20도란다. 희뿌연 새벽이 밀려오지만 설레임보다 두렵기만 하니 나이가 먹었다는 징조다. 예전 선비들은 봄을 기다리는 정신 또한 고매하다.한껏 음기가 가득한 동지(冬至)가 지나면 기다림은 시작된다. 기다림은 음기에서 양기로 낯이 조금씩 길어지고 음의 밤이 짧아진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란 그림을 보면 동지 다음날부터 매화를 81개 그려놓고 하루 한송이의 매화에 채색을 하며 봄을 기다리는 선비들이다.
두어달 우수가 되면 매화가 만발하리라.
올겨울 유난히 춥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란다. 북극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기단이 점점 공해로 엷어졌기 때문이란다.
혹독한 강추위속에서 기지개를 활짝 펴게 해준 것은 무엇인가?
테니스 메이저 대회인 호주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16강 8강 4강에 한국 정현 선수가 남자단식에서 거침없이
승승장구해서 국내는 물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테니스 마니아는 아니다. 운동에 남다른 기능또한 없지만, 58위인 정현선수가 세계 최강의 조코비치를 이겨내고, 8강에서 미국선수인 테니스 샌드그랜을 3:0으로 제압하고 4강에 오른 것은 아시아 선수로 엄청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16강 경기가 끝난 후 이변이 연출되어 조코비치가 패하고 떠날 때였다. 6개월간 오른쪽 팔꿈치 부상으로 몇달동안 코트에 서지 못한 연유를 기자들이 묻자 패자의 답변에 너무 놀랐다.
- 오늘 내 부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승자인 정현의 승리를 깎아내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군자다운 답이 아닐 수 없다. 핑계를 대지 않는다. 진정 승자를 축하해 주는 아량이 멋지다.
8강경기는 어제 24일 오전 11시부터 채널 50번에서 중계해 새벽부터 아무리 되알지게 추워도 진지하게 보았다. 중계에 시청 중인데 평소 존경하는 K화백이 회화 몇점을 보내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번 4강에 오르면 오늘 술한잔 사겠다고 큰소리쳤다. 한 낮도 영하 10도인데도 추위를 마다하고 샘밭장터에 장터국밥집에서 지인 세명이 뜨거운 부산어묵과 순대 한접시를 놓고 소주 세병을 들며 기쁨을 나누었다.
장날인데도 워낙 추워 장이 서지 않았지만 선술집 같은 비닐 장국밥집엔 승리를 자축하는 무리들이 역시 우리처럼 술잔을 기우리고 있었다.
대중스포츠인 테니스는 경기방식이 간단하다. 교직에 있을 때 큰 기능이 없어 늘 뒷전이었다. 전교직원이 참석할 경우 먼지낀 무거운 우드 라켓으로 겨우 전위에서 파리잡듯 자리만 지키던 나였다. 새롭다. 정현 선수의 활약상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표상이다. 약시를 이겨내기위해 푸른코트를 찾아 테니스를 시작했다는 승자는 이제 금요일 오후 5시 페러더 베르디흐란 테니스 황제, 세계적인 테니스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만 스무번에 미친다는 강자와의 대결에 온 국민은 기도하며 기다린다.
들뜨는 기분, 고무풍선같은 달뜬 기분을 술로 풀고 생전 처음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다음날 다시 혹독한 추위의 공간을 버스로 달려 자가용을 몰고 온 것 또한 아름다운 추억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