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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소련 주재 미 대리대사를 역임한 후 1952년 소련 주재 대사로 재취임한 죠지 캐넌(George Kennan)은 직업 외교관이자 정치학자로서, 대사 재직 기간 중 미국의 저명한 외교정책 학술지인 ‘Foreign Policy’에 익명으로 기고하면서 정확하고 예리한 시각으로 향후에 있을 미·소간의 대결 불가피성과 냉전 도래를 정확하게 예측·분석한 고전주의적 현실주의 정치학자이다. 특히, 그가 소련 주재 대사 재임 기간 중 사소한 외출 한번 없이, 미 대사관과 대사관저인 ‘스파스 하우스(Spas House)’만 오갔다는 사실은 소련과 그 이후의 현대 러시아연방에 주재하면서 직무를 수행해 온 수많은 각국 외교관들의 입에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죠지 캐넌(George Kennan)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시사점은 바라보는 관점의 방향성과 그 내용이 갖는 정확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꿈꿀 수 있는 소망이 있음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함은 ‘소망 Zero’를 뜻할 수 있으니,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의미 없는 현실은 삭막하고 막막한 어둠의 벌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라봄이란, 어찌 생각하면 매우 자의적인 것일 수 있다. 바라봄의 여부는 환경적 요인에도 좌우될 수 있겠으나, 기실 그보다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者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내면의식의 작용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하니, 어떻든지 간에 우리에게 부여된 삶을 유쾌하면서도 밝고 미래지향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음보다는, 분명코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소중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순수함과 혈기에 젖어 있던 젊은 시절의 우리는 조국과 강산을 바라보면서, 온 몸과 마음을 불사르며 우리의 꿈을 형상화시키기 위한 열정을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니고 있던 바라봄의 대상과 성격은 누가 보더라도 공의(公義)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공의(公義)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적 어원에 따르면, 히브리어로 ‘체네카’로 하는 공의(公義)는 의(義) 또는 정의(正義)를 뜻하면서,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거나 하느님 백성들의 올바른 마음자세 또는 삶의 태도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접근하는 공의(公義)의 개념은 공평하고 의로운 도의(道義)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시대의 사상가이자 철학자로 불리는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의무론적 도덕론을 주창한 칸트(Immanuel Kant)와 맥을 같이하면서도, 소위 共同의 善이라는 미덕(美德)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샌델(Michael Sandel)은 칸트(Immanuel Kant)가 주창한 정언적 명령에 기초한 의무론적 도덕론에 공감을 표하면서 의무에서 나오는 행동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진다고 언급하고, 사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공동의 선, 즉 공동체의 선을 바라보고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목적론적 도덕론에 기초하여 좋음을 먼저 규정하고, 이를 극대화하는 것을 정의(正義)라고 규정하는 벤덤식 공리주의가 정치·사회적 퍼퓰리즘(Populism)에 빠져 우리사회를 풍미하면서 병들게 하고 있음을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 비근한 사례로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최근 목격한 매우 안타까운 사회적 병리 현상을 하나 소개해 보고자 한다. 고속도로 IC에서 우리 마을로 들어서는 1번 국도는 평소에도 동탄·오산으로 이어지는 매우 번잡한 도로이다. 그런데 연전부터 우리 마을로 가까이 들어서는 도로 초입에 복권 센터 하나가 들어서면서 참기 어려운 교통체증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복권 판매 개시 기준일인 금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에는 IC를 빠져 나오는 순간부터 이 도로 상에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교통체증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통체증 현상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주민들은 시 당국에 복권 센터를 다른 곳으로 옮겨 교통 체증을 해결해달라는 집단 민원을 제기했고, 이에 시 당국에서는 민원에 대한 매우 성의 있는 답변으로 “도로를 확충하여 교통 체증을 해결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도로는 도로를 확충할만한 국유 부지도, 또 수용할 수 있는 사유지도 없는 매우 궁색한 왕복 6차선 도로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 당국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교통 체증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고, 지역 주민들은 얼마 후 이 복권 센터에서 나오는 맨 갓선 도로 상에 페인트로 ‘주차금지 구역’이라고 쓰인 사실을 확인하면서 참으로 허탄한 실소를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공의를 해친 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렇듯 우리 일상생활은 목적론적 도덕관에 빠져 최대 다수가 최대의 쾌락을 쫒아 열광하는 집단 이기적인 벤덤식 공리주의와 이를 이용하는 정치·사회적 포풀리즘이 흘러 넘쳐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옮음(公義)을 먼저 규정하고, 이에 따라 좋음의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마땅히 지향하고 또 바라보아야 할 공의(公義)의 바른 방향이 아닌가 싶다.
2.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벤덤식 목적론적 도덕관이 이렇듯 광풍에 휩쓸리듯 풍미하고 있는 배경과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오류를 시정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어야 하거나, 아예 그 시정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일 수 있는 지나친 체험적 착각(Heuristic Illusion)이나 체험적 편견(Heuristic Prejudice), 즉 인식의 오류(Pathetic Fallacy)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치 사회학에서는 이러한 착각 요인의 배경이 되는 착각의 종류를 대체적으로 6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①주의력 착각, ②기억력 착각, ③자신감 착각, ④지식 착각, ⑤원인 착각, 그리고 ⑥잠재력 착각이 바로 그것이다.
첫째, 주의력 착각이란 관심을 다른데 쏟을 경우, 무엇인가 사물이나 현상을 보더라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들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현상, 즉 주의 산만형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기억력 착각이란 기억 및 생각하는 내용과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의미하는데, 이는 기억의 실마리를 자신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느낌에 맞추어 재구성하는데서 비롯되고 있다.
셋째, 자신감 착각은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과대 망상주의적 현상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우리는 흔히 변호사나 공인회계사 등 실력 없는 전문가 직종 종사자들이 일반인들을 속이는 현상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 또한 자신감 착각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지식 착각이란, 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모르는 현상을 뜻하는 것으로서, 내용이 복잡할수록 지식 착각 정도는 더욱 심화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다섯째, 원인 착각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의 발생요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로 인해 사건 발생이나 현상 반복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없는 실태를 자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원인 착각은 예컨대 모택동 시절의 중국이 생산성 향상을 위한 대약진 운동 전개 간의 잘못된 통계로 인해 약 4,800만 여명(7,000만 여명까지도 산정)의 기아자를 속출한 사례를 대표적 사례로 제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원인 착각은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과대 해석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여섯째, 잠재력 착각이란 우리 뇌의 상당 부분이 사용되지 않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언제든 개발 여지가 있다고 믿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러한 현상은 불가역적인 정책실패를 겪으면서도, “향후 별 문제없이 잘 해결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에 빠져 있는 위정자들이나 정책 집행자들의 임무수행 과정과 태도에서 주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착각의 동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고력과 이성적 판단능력을 갖춘 사람이라 하더라도, 종종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리스 에셔의 ‘계단’이라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착각임을 우리는 쉽게 체험해 볼 수 있다. 착각을 유발하는 요인은 일반적으로 인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논의 주제가 되고 있는 관점 문제와 관련이 있는 인적 요인에 관해서만 얘기해 보고자 한다. 착각을 유발하는 인적 요인이란 인간에 의해 유발되는 요인을 말한다. 인간은 보거나 듣는 정보를 그대로 지각하고 인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규칙대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착각을 하기도 하고, 특유의 인지적 편향으로 에러를 범하는 경우도 있으며, 더러는 규칙을 위반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특성에서 비롯된 오류이기 때문에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런데 인간이 갖는 이러한 착각의 특성에는 정상화 편향(Normalcy Bias)과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2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첫 번째의 정상화 편향(Normalcy Bias)이란, 인간이 원래 보수적이어서 異常 狀態에 직면했을 때 직면한 異常 現象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좋지 않은 정보를 가능한 한 낙관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마땅히 강구해야 할 필요한 조치나 행동을 취하지 않거나,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덜 심각한 상황으로 추론하는 경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는 인식의 왜곡과 같은 인지의 편견이 작용하여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성향이 있는데, 인간은 바로 이러한 인지적 편견 때문에 발생한 위기적 상황이 비상 상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정상화 편향(Normalcy Bias)의 사례로서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사고 발생 초기 “단지 시스템 어딘가에 작은 문제가 있어서 일어났고, 이것은 곧 해결되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한데서 야기된 엄청난 파국적 상황을 가져왔던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상화 편향(Normalcy Bias)의 또 다른 사례로서 우리는 바톤 비그스(Barton Biggs)의 ‘부와 전쟁과 지혜(Wealth, War and Wisdom)’에서 소개된 유태인들의 학살 사례를 제시해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독일에서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그 당시 독일에 체류하고 있던 약 55만 여명의 유태인들 가운데 약 10만 여명은 위험을 느끼고 1935년 말까지 독일을 떠났으나, 그 이후까지 남아 있었던 약 45만 여명의 유태인들은 최소한 최악의 상황이 지나갔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또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갖고 독일에 그대로 잔류하다가 결국 수용소로 끌려가 무참한 학살을 당하는 불행을 맞이하였는데, 이러한 유태인의 학살 사례는 정상화 편향(Normalcy Bias)의 대표적 사례가 되고 있다. 이 외에도 정상화 편향(Normalcy Bias) 사례로서 1982년 나까사기 집중 호우사태로 인한 대규모 인명 피해사고, 1987년 영국 킹크러스역 지하터널 화재 사고, 2001년 9.11 테러사태 간 세계 무역기구 빌딩 내 체류자들의 즉각적인 대피지연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인명 피해 사태, 그리고 2005년 9월 20일의 미국 뉴오올리언즈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사태 등 무수한 정상화 편향(Normalcy Bias)사례를 제시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위기관리 의식과 능력의 부족을 의미하는 정상화 편향(Normalcy Bias)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두 번째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영국의 사회 심리학자 웨이슨(Peter Wason)이 1960년 제시한 가설로서, 특히 아집이 강하여 남의 의견을 경청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선입관(Preconceived Notion)이나 최초의 잘못된 믿음에 기초하여, 이것과 일치한 정보나 보강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을 의미하고 있다. 쉽게 말해 이러한 편향에 빠진 지도자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잘못된 믿음 경향을 갖는데, 이러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은 한마디로 내적 일관성의 부족 또는 결여라는 인지 부조화와 비교하여, 외적 일관성의 결여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의 사례들은 페로(Charles Perrow)의 ‘정상 사고(Normal Accident)’에서 언급된 것처럼, 인류가 겪어 온 수많은 참사를 얘기하는 전쟁사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정치·사회적 퍼풀리즘의 유행과 한치의 인지적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 똑바로 지향해야 할 의무론적 도덕관에 기초하여 올바른 공의와 공공의 선을 지향하고, 또 이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사회를 구성하는 각개 구성요원, 특히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와 위정자들, 그리고 사회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다양한 관점과 정보를 수용하려는 자세를 갖춘 가운데,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갖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주의 깊게 경청함은 물론, 또 이를 실천해 나가는 도덕적 실천 의지와 덕목을 갖추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 p.s : 제게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본 문우회 카페에 일요산책의 글을 당분간 멈추고자 하오니, 문우회 제위들께서는 널리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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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정상화 편향은
관료조직의 무사안일주의와 일맥상
통하고, 확증편향의 대표적 산물은
M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공의(公義)에 대한 담론을 대하고 보니,
공유지의 비극에 관한 이론이 떠오르네요. 어느 여성경제학자가 이 이론에 대한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기도 했지요.
이분은 상식의 공유를 바탕으로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측면의 연구결과를 제시했지요.
역설적으로 우리사회는 518사태나 세월호침몰사건과 같은 것들을 민주와 정의라는 이름의 공의로 공의의 영역을 확장하는 과잉 공의에 함몰되어 있는 게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도 점차 정상을 찾고 상식과 이성의 공의를 보다 더중시하는 사회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휴일 오후에 수준 높은 글을 읽고, 역시 오랫동안 수련하고 공부한 고수다운 분석과 해법에 박수를 보냅니다. 다만 어차피 현대 사회는 끝내 역사적 진실과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자신만의 아집과 확증편견에 몰입하여 궤변과 불만에 휩싸여 살아가는 일부와, 열린 자세로 경청하고 배려하며 미래를 향해 항상 새로운 창의력을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공의로운 대다수가 대치하고 있는듯한 생각이 언뜻 스쳐 갑니다. 다양성이 이 사회의 생명과도 같지만 기본적인 사실 조차도 애써 외면하려는 목소리에 실망하던차에 김교수의 글에 힘을 얻고 갑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나 빠른 시일 내에 복귀하여 새로운 옥고를 설파하길 기다려 봅니다~
좋은 글을 쓰신 벽송의 박식과 세밀한 분석에 감탄합니다. 무슨 일인지---- ? 빠른 시일내 좋은 글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