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 머리를 세고
지금은 침 발라 돈을 세지
먼 훗날엔 무얼 셀까
김준태 시인의 ‘감꽃’이라는 시가 강의실에 울려 퍼진다. 음정박자까지 두루 갖춘 게, 밋밋한 시낭송은 아니었다. 낭송자는 이지상 가수. 성공회대 외래교수다.
노래가 끝나자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손바닥이 수없이 부딪힌다. 입에선 탄성이 흘러나온다. 강의실 의자에 앉아 있는 청춘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감나무가 있어야 감을 세지~”
이지상 교수가 노랫말을 빗대 “어릴 때 감꽃 잎 세 본 사람?”이라고 질문하자, 반짝이던 눈빛들이 교수의 눈길을 피한다. 교수는 “저도 집에 감나무 없어서 세 본 적이 없어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강의실에는 어느새 웃음이 가득하다.
“한국역사에 대한 압축표현, 김준태 시인의 ‘감꽃’만한 게 없지요.”
교수는 노래를 통해 한국사회에 대한 설명으로 자연스레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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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시작하며 통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던 그의 모습은 대학이 지식인의 장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
“과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요?” 이지상 교수가 맡은 과목은 ‘노래로 보는 한국사회’다. 교수는 한 시대를 장식한 유명음악들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정치경제를 알기 쉽게 훑어 나간다. 시대의 정서가 담겨 있는 노래를 되새겨 듣고 따라 불러 보면서 80여명의 학생들은 잠시나마 과거를 공유할 수 있다.
“침 발라 돈을 셌다는데, 지금은 어떨까요?”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직 뒤 연봉 얼마냐는 질문을 주로 하지 않나요? 그런 의미에서 침 발라 돈을 세는 것은 현재진행형이라 생각해요.”
이지상 교수의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이어졌다. 사람이 돈 벌이의 수단 정도로 전락하고, 돈을 많이 벌면 되는 사회 구조 속에 자신을 편입시키고, 자신을 속이고 자기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화두를 던진다.
“이렇게 보면 사람과 돈을 바꾸는, 사람을 죽여 돈을 버는 행위도 나오게 되죠. 국가간 고도의 정치적 행위인 전쟁은 어떻습니까. 어느새 전쟁이란 말에 익숙해져 있지 않나요? 노태우 전 대통령 때의 ‘범죄와의 전쟁’은 월드컵 열기 속의 ‘태극전사’라는 말과 무엇이 다를까요?”
침 발라 돈을 세는 것은 “영원히 지속될 명제”라는 것이 그의 강의내용이다.
이지상 교수가 들려주는 비빔밥처럼 맛있는 한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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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파병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에 이르기까지, 크게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역사적 텍스트가 그의 ‘간지 나는’ 설명에 비빔밥처럼 맛있게 비벼진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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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옹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정든 그 얼굴~”
이번엔 느린 박자로 시작돼 절이 바뀔수록 점점 빨라지는 ‘서울의 찬가’(69년, 길옥윤 작, 패티김 노래)가 강의실에 울려 퍼진다.
이지상 교수의 ‘청계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이 됐다.
미국의 원조로 혜택을 봤지만 의존적 경제구조로 민족경제가 파탄 났다는 이야기,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원자재 공급의 정부독점으로 정-경 유착의 고리가 파생됐다는 이야기, 4.19혁명과 베트남 참전, 67년 청계천 정비공사(청계천 주변 대규모 무허가 판자촌 철거)로부터 이어진 광주(성남)폭동사건 이야기까지 그의 시대상에 대한 설명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성남은 분당이라는 부의 ‘대명사’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 이면의 판자촌 이주민들 이야기는 크게 부각돼 오지 않은 게 사실이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또 다른 음악이 흘러나온다. 옛 노래지만 음정 박자 가사 모두 귀에 익다.
이 교수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늦기 전에, 꽃잎 등 김추자 가수의 명곡 등을 설명하며, 경제개발이라는 과제 속에 짓밟히고 숨죽여온 민중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베트남 전쟁 파병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에 이르기까지, 크게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역사적 텍스트가 그의 ‘간지 나는’ 설명에 비빔밥처럼 맛있게 비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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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나는 노래 이야기에도 한국사회의 그늘을 조명할 때면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
이번엔 송대관 가수의 ‘불후의 명곡’(?) ‘해 뜰 날’이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이 노래가 한 때 금지곡이기도 했다는 게 믿어지시나요? 당시 도시인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노래를 군부정권은 다른 의미로 해석했던 거죠. 김민기씨가 작사 작곡한 ‘서울로 가는 길’도 한 번 들어봅시다. 김민기씨가 없었다면 70년대는 어땠을까, 참…….”
“다음 시간까지 노래듣고 울어본 뒤 그 느낌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 하세요” ‘노래로 보는 한국사회’는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도 유별나다.
‘집으로 가는 길’ 또는 ‘걸어서 등교한 느낌’을 보고해야 하고, ‘노래 듣고 눈물 흘린 느낌’을 보고해야 한다.
이 교수의 유별난 ‘보고서 과제’는, 점수로 평가되기 때문에 작성할 수도 있겠지만, 꼭 수업과제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해볼 만한 ‘놀이’가 아닌가 싶다. 대부분 하루쯤은 자기 블로그에 작성해 본 경험이 있지 않을까.
“세상에 넘치는 게 노래잖아요. 세상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네요. 노래를 통해 이 사회에서 자기를 되돌아보고 노래를 통해 자신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등하교시간 걸으면서 땀도 흘려보고, 생동하는 봄을 느끼면서 글로 표현해 보는 것도 좋겠지요.”
수업을 정리하며, 이지상 교수는 노래 ‘청계천 8가’를 소개한다.
청계천을 모티브로 한 노래 중 그룹 ‘천지인’과 ‘엠씨스나이퍼’의 노래가 있는데 어떤 걸 들어보겠냐는 질문에 학생들은 ‘엠씨스나이퍼’를 외친다.
“‘천지인’이 누구야?”라고 자기들끼리 묻는 학생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A4 한 장 분량의 긴 랩이 빼곡 적힌 ‘엠씨스나이퍼’의 노래를 들으며 수업은 끝이 난다. 랩을 따라 움직이던 학생들의 입술은 다른 학생들에게 전염된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노래단 준비위에서 활동하다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조청)의 창단 멤버로 활약했던 민중가요 가수 이지상씨가 공식적으로 강단에 서게 된 것은 3년 전의 일이다.
90년대 학생운동을 풍미했던 신화적 존재 ‘조청’의 멤버 이지상. 문예 활동가였던 그가 강단에 서기까지의 일들을 떠올리니 한 편의 드라마 필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아직 미완성. 그는 여전히 가수로 활동하며 이번에 4집앨범을 낸다.
수업을 시작하며 통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던 그의 모습은 대학이 지식인의 장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