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지역인 원머리, 새터, 용성이라는 곳에 병인박해시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원머리에는 적어도 1850년대에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염전과 논농사를 주로하며 살던 곳으로 박씨, 조씨 등이 박해 때 복음을 전파함으로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순교자 박 마르코는 본래 원머리 사람으로 열심한 모친으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르코는 모친의 뜻을 좇아 진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와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꺼리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본래 그의 집은 세간이 있고 본읍에 권도가 조금 있었다. 수원으로 잡혀갈 때 그는 부모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사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 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의 사촌 마티아와 함께 수원 옥에 갇혔다. 수원에서 고문을 당할 때 마티아가 이를 못이겨 배교하려 하자 마르코는 '대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깨우치도록 하였으니, 이에 마티아는 배교함을 뉘우치고 성교함을 바로 설명하였다. 옥에 갇힌 지 15일 후 포교들은 그들을 교(絞)하여 죽였는데, 죽은 후 시체를 찾아 본 곳(원머리)에 장사하니 시체 정결함이 산 이와 같았다. 이때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그의 사촌 마티아의 나이는 50세 였다." 그들은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셔졌다.
[내용출처 : 대전교구 홈페이지]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순교자 현양비 비문
순교자 박선진(말구)과 박 마지아는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종형제이다. 원머리에는 박해시대인 185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박 말구의 부친은 외교인이었으나 모친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으며,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외교인들의 방해로 마음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1868(무진년) 포교에게 체포되어 수원 감옥에 갇혔으며 옥에 갇힌지 15일 후 순교하였는데 그 때 박 말구는 33세였고, 박 마지아는 50세였다. 순교 후 외교인의 도움으로 그 시신을 찾아 원머리 박씨 집안의 땅에 안장되었다가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내로 이장하였으며 2000년 새 성전을 신축하면서 묘역을 다시 정비하였다. 박 말구가 수원으로 잡혀갈 때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면서 “천주님의 뜻대로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영혼을 구하는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위로하였다. 또한 박 마지아가 모진 고문을 못 이겨 배교할 뜻을 비치자 “주님을 배반하고 영원한 지옥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깨우쳐 함께 순교하니 그 믿음은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될 것이기에 여기 현양비를 세워 그 높은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2000년 11월 21일
천주교 신평 교회 신자 일동
[출처 : 신평 성당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