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덕순, 1880-1950 / 아호는 일선, 단운, 우홍, 우연준
대종교 입교시기_1921년 이전 / 교질 지교 / 서훈 : 독립장(1962)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 출신이다. 어려서 상경하여 한성부의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 ,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본적을 두어, 서울 출신으로도 언급되고 있다. 우덕순은 서울 동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다가 을사늑약 이후인 1906년 초에 러시아연해주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동지들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워 청년 교육에 힘쓰는 한편, 1907년에 는 안중근 · 이범윤등과 더불어 의병 양성에도 노력하였다.
1908년 안중근이 이끄는 300명의 의병과 함께 함경북도 경흥군 홍의동의 일본군과 회령의 일본 군영 공격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회령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도중 탈출하여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국권피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에 동참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지역을 순방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하여 우덕순은 길림성 서북로도 신성부 채가구역에서 대기하고,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대기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는 채가구역에 정차했으나, 일제가 채가구역을 패쇄해 감금되어 거사를 실행하지 못하고, 열차는 그대로 하얼빈역에서 정차하였다. 이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데 성공한 뒤 공범자로 체포되어 여순에서 함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끝내 사형 당했으며, 우덕순은 징역 3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경성감옥에서 수감 중이던 1908년의 함흥감옥 탈옥사건이 드러나 형이 추가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15년 2월 출옥하게 된다.
해방을 맞아서도 흑룡강성의 한인민단 위원장의 자격으로 아들과 함께 동포들의 본국수송에 열정을 기울였다. 그리고 귀국한 뒤인 1948년에는 대한국민당의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으며, 대종교에도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50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사망하였다.
우덕순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엇갈린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해 9월 26일에 북한군에의해 처형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어 그 해 9월 평양형무소에서 학살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대종교 항일투사 이현익의 기록에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병사한 것으로 적고 있다. 좀더 추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우덕순과 관련된 대종교의 입교 기록이나 영계사항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덕순이 1923년 3월 5일(음력, 이하 음력) 대종교 합성시교당의 전무(책임자)를 맡아 시무한 기록이 전한다. 그 당시 우덕순의 대종교에서의 위치는 '형제(여자는 자매'의 지위였다. 형제란 입교하여 영계를 받기 이전의 단계를 일컫는 것이다.
그의 대종교 입교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확인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생존 항일투사로 우덕순과도 함께 활동했던 박명진은 대종교독립운동사 기록에서 1910년대 후반 한기욱이 이끌던 대종교 북일도본사의 주요 교인으로 우덕순을 꼽고 있다. 당시 북일도본사에 속한 주요 교인들의 명단을 보면, 우덕순과 박명진 외에도 윤복영 · 김서중・김백원 · 심근 · 김백 · 김정일, 남진호 · 윤정 등, 항일투쟁의거물들이 속해 있었다. 대종교 항일투사 이현익 역시 대종교인과 독립운동연원라는 글 속에서 우덕순을 1백여명의 대종교 항일투사들의 명단 속에 넣고 있다. 그리고 우덕순이 대종교 항일단체인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및 신민부 요원으로 활약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우덕순의 대종교 입교가 대한군정서 시절일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부분이다.
우덕순이 전무를 맡았던 합성시교당은 빈강현 하얼빈 시내에 소재했던 시교당으로 북일도 본사 제1지사에 속한 시교당이었다. 강윤선과 최종성이 찬무(부책임자)를 맡아 우덕순을 도왔다. 한편 북일도본사는 1922년 2월 11일에 길림성 백두산의 북쪽에 그 지점을 잡고 세워진 도본사로 항일투쟁의 거물이자 지도자였던 정신이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우덕순은 그 해 4월 대종교 비밀조직에도 참여하였다. 만몽산업회가 그것이다. 만몽산업회는 당시 대종교 교주였던 김교헌이 직접 앞장서 주도한 것으로 청산리독립전쟁 이후 각 곳으로 흩어진 대종교 세력의 재건을 위해 도모된 비밀 조직이었다. 그 조직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을 보면 김교헌(당시 대종교 교주)과 우덕순을 비롯하여 김원식,김규식,최계화, 유정근,김좌진, 조성환,현천묵,원풍등모두 대종교의 핵심들이었다.
우덕순이 대종교 재건을 위해 대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만몽산업회에 가담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대종교에 깊이 관여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이 시기 우덕순의 친일 밀정 문제가 걸림돌이다. 우덕순이 1920~30년대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 만주 지역에서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의 간부로 활동했다는 전력이 그 근거가 되었다.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친일단체였다. 일각에서는 우덕순이 그곳에 몸을 담고 일본의 정보기관인 특무기관과 밀접한 관계 였으면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활동 정보를 수집하여 넘겼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대종교 내부에서의 우덕순에 대한 평가는 이와는 다르다. 그의 조선인민회의 참여가 오히려 대종교 비밀결사 활동을 위한 수단이라는 의견이 그것이다. 해방 이후 친일 문제를 어떠한 단체보다도 엄격히 문제삼았던 대종교이고 보면, 그러한 평가가 형식적 결론이 아님을 시사해준다. 특히 그와 하얼빈 지역에서 항일투쟁 활동했던 박명진은, 그를 그 시기 북일도본사의 핵심교인으로 꼽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현익 역시 일제강점기 1백여 명의 대종교 항일투사를 언급함에 우덕순을 빼놓지 않음도 이러한 이유였다.
대종교에서는 환국 직후인 1916년 3월 24일, 우덕순에게 대종교 총본사의 추천으로 지교의 교질을 수여함과 동시에 경의원의 참의(參議)로도 선임하였다. 당시 경의원 원장은 성재 이시영이 추대되었으며, 이동하가 부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비서로 지명된 고평을 비롯하여 윤복영,김승학, 황학수, 신백우 등 수십 명으로 모두 항일투쟁 지도자급 인물들이었다. 우덕순은 같은 해 4월 27일 상무참의로도 천거되어 명실공히 대종교 원로의 반열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