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할아버지이야기다. 김해허가 관수공파의 派祖이신 觀水公 昊 또는 杜(1600~1662) 자 할아버지이다. 관수공께서는 김수로왕의 비인 허황후의 후손이다. 시조 할아버님들에 대한 관심은 일단 400여년전 그러니까 17세기무렵, 왜 함양 휴천면 산골에 오셔서 묻히게 되셨는가하는 것이다. 관수공할아버님 이후 할아버님들 묘는 적어도 현재 함양군 휴천면 일대 지금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자취가 또렷한 中始祖할아버지이신 南溪공 忠吉(1516~1574) 할아버지부터 시작한다. 당시 우리 쪽 가계는 사림파들과 교류하거나 문하생이었다. 慕齋 김안국의 문하였다. 남계공께서는 1545년(을사) 을사사화 당시 良才驛 壁書[내용: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 기 등이 권세를 농간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 사건에 연루되어 의주로 유배되셨다. 후에 영천군(현 영주시)군수로 부임. 영천군수 재직 당시 1572년 박승임이 퇴계의 戊辰封事와 聖學十圖를 한 권의 책으로 발간토록 그 경비를 영천군수 허충길에게 보내 伊山書院에서 발간토록 했다. 또 1574년 (선조7년) 慕齋集 유고를 수집, 허 엽의 교열을 거쳐 편집 간행하여 의성서원에 판목을 장치하였다. 즉 당시 사림의 핵심과 깊이 교유하고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훈구대신들로부터 내침을 당해야했다. 그런데다가 임란 등을 거치면서 역사의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했다.
그리하여 남계공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족보 등에 기록이 전하여오지 못하고, 임란 이후 증손 뻘인 관수공에 와서 족보에 觀水公 派의 派祖로 부각되어오고 있다.
나를 중심으로 증조부께서는 한때 구례로 이주하셔서 그곳에 사셨다. 할아버지때엔 다시 함양으로 오셔서 휴천면 신기부락에 집성촌을 이뤄 사셨다. 물론 구례로 가셨던 것은 사정이 있었겠다.
하지만 내 의문은 파조 할아버지가 왜 함양 휴천이라는 오지마을에 오셨을까하는 문제였다. 지금도 꽤 산골인데 당시엔 지금보다 더 사람들이 찾기 어려운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함양은 지이산이나 덕유산 등만을 보아도 심산유곡이 많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한편 신라말 최치원선생의 마지막 벼술이 천령(함양)태수였다. 경주로부터 이곳까지 부임해 오셨다.
그런 관련은 우리 파조할아버지와 긴밀한 사연은 아닌지라 400여년 전의 이주 문제를 풀기위해선 조선의 사화 즉 무오사화,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을 겪으면서 이 지역으로 은거 혹은 이주해와야 했던 정여창고택이나 남계서원 그리고 안의 3동 등 左安東 右咸陽의 흐름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먼저 사림의 영수격인 점필재 김종직과 유자광의 일화를 살펴본다. 함양현감 재임중 좋은 이미지(善政)를 남겼다는 점필재 김종직(佔畢齋金宗直)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