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의 나이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0대와 20대에는 50이란 나이가 까마득하겠지만, 50이란 나이는 결코 노인이 아니고 오히려 사회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다.
<내일의 기억>의 사에키 역시 그렇다.
광고회사 영업부의 부장으로서 능력도 인정받고 있고, 노후라는 말 자체도 아직 낯설게만 들린다.
여전히 청년같은 기세로 일하던 사에키에게 알츠하이머란 병이 찾아온다.
알츠하이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치매와 비슷한 병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기억을 잃어버린다.
기이한 것은 오래 전 기억부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기억부터 사라지는 것이다.
금방 내가 했던 일들이 기억나지 않고, 엊그제 잡았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난 달 만났던 친구를 잊어버린다.
같이 일했던 동료, 후배들의 이름과 얼굴을 하나씩 잊어버린다.
그리고 함께 살았던 가족들마저 잊어버린다.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기억에 관한 영화에서 주로 말해주는 것은 기억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이다.
기억이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말해주고, 그 사람이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추억으로 남는다.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조차도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한 사람의 인생이란 것은, 업적 자체보다 자신에게 남겨진 기억으로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어떻게 보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수록, 기억 속의 과거가 더욱 소중해진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를 앓는 사람에게는 그런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 둘 기억을 잃어버리고, 성격마저 변해버린다.
의심하게 되고,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되고, 자신이 평생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알츠하이머란 진단을 받았을 때, 사에키는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라고도 생각했던 그에게 의사가 말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십 수 년이 지난 뒤부터는 끊임없이 쇠락해가는 존재라고.
인간의 세포는 10대 후반 정도까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이후는 점점 죽어가고 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인간, 생명체의 본성이다.
태어남에서 죽음까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고, 다만 누군가에게는 조금 더 빨리 오는 것일 뿐이다.
<태양의 노래>나 <1리터의 눈물>에 나오는 소녀들은 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법을 익혀야만 한다.
사에키 역시 마찬가지다.
알츠하이머에 걸렸다고 해서 바로 죽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죽는가보다는, 알츠하이머의 여러 가지 증상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메모해 두어야 하고, 현재의 자신이 점점 사라져 간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말 가혹한 벌이다.
사에키는 이른바 단카이 세대에 속하는 나이다.
단카이 세대는 일본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세대인 동시에, 오로지 직장을 위해 멸사봉공하느라 가족을 소홀히 한 세대다.
가족에게 비난을 받아가면서, 오로지 회사만 생각하며 달려온 그에게 가족이란 행복 자체가 지워져간다.
그건 그의 인생 전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과도 같다.

<내일의 기억>은 정말 슬픈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신파적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TV 드라마 <케이조쿠>와 <트릭>을 연출했던 츠츠미 유키히코는 <내일의 기억>의 전반부를 마치 스릴러처럼 연출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잃어버린 기억을 보완하기 위해 사에키가 애쓰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후반부는 잔잔하게 부부의 여정을 지켜본다.
그런데 묘하게도 부부가 알츠하이머와 싸우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더욱 힘든 것은 부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에키는 자신의 기억을 잃어갈 뿐이지만, 아내는 남편이 자신과 함께 했던 기억을 모두 잃어가며 타인이 되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한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강하고, 다정하다는 것을 <내일의 기억>은 보여준다.
문화평론가 김봉석님의 일본 대중문화 이야기 마케네코의Go!일본문화 중에서
첫댓글 오래전에 봐서 제목은 잊어 버렸지만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만든 미국 영화 생각이 나면서 환자 자신보다 가족이 겪는 고통이 훨씬 크다는 의견에 저도 동의 합니다.
첫 단락을 읽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단어였기에....그리고 그 첫날은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