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깔뱅님 성령춤만은 당연히 우리를 말씀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말씀충만이란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말씀충만과 성령충만을 동일시 하다보면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 당연히 성령충만을 받는 것처럼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소지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성경으로 성령충만 = 말씀충만의 근거와 답변을 원했는데...말씀충만을 외치시는 분이 성경으로 답변을 하지 않으시니 좀 이해하기 어렵네요..
그런 면에서 이해관계가 안 이루어질 수도 있겠죠. 지금 이 명절에 바쁩니다. 성령충만이 말씀충만이라는 의미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해할 분은 이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성경에 대한 지식적인 축적만을 충만이라고 할 것 같나요? 기본이잖아요. 말씀의 풍성한 깨달음과 은혜를 누리며 거기에 따라 거룩한 소원과 정신을 품고 산다면 성령충만한 삶이지 않을까요?
교회에서 개혁신학인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 공부를 하시나요? 모두 성경을 근거로 작성되었죠. 이를 개혁교회가 작성하게 된 계기는,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기독교의 핵심도리들을 빠른 시일내에 효과적으로 정립하고 교육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매주 교리문답을 외우고 공부하는데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합니다. 개혁신학은 철저히 성경을 근거로 하는데,... 이런 외국의 장로교회,개혁교회들이 하는 교리문답공부의 좋은 전통은 안하는 경우가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 님, 주님께서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와 가지 비사>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셨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은사 충만’했던 고린도 교회와 관련해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는 사실을 간단히 적겠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은사 충만은 ‘말씀 충만인 성령 충만’과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즉,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 어린 아이와 같은 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하지 못한 ‘어린 아이와 같은 교회’는 교회의 속성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속성 하나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0~17]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성신의 검을 들 수 있는 “주님의 청년”[요한일서 참고]으로서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한 사람을 두고 “신령한 사람”[고전 2:15]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신령한 사람들은 주님의 전투, 하나님 나라의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은사 충만한 교회였지만 말씀 충만하지 못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댓바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은사 충만이 곧 말씀 충만’이 아님을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1장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5절의 언변을 칼빈은 진리와 교리라고 이해 했습니다. 또한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는 말씀도 풍성한 교회란 의미인데.. 이를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그리고 이 분문은 7절에서 구변과 지식도 모든 은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풀핏님 글을 보면 재치도 정말 뛰어난 분 같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심도 느껴져서 좋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단들을 이길려면 우리들이 성경에 대하여 더 진지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개혁 신앙이라는 전통 안에 안주하려하지 마시고 더욱 성경 본문 안에서 본문이 말하는 뜻을 찾아주시고 그것을 가지고 개혁주의의 주장을 펴셨으면 좋겠습니다. 충분히 잘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이단들이 성경 구절을 여기 저기 끌어들여 자신들의 교리와 교주를 만드는 것을 보면 조직신학과 같은 방식으로는 안됩니다. 먼저 본문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 내어서 반격해야만 그들의 허구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의 권위와 은혜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가난한 자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인도를 받으며 주께서 바라시는 귀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장깔뱅님 성령춤만은 당연히 우리를 말씀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말씀충만이란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말씀충만과 성령충만을 동일시 하다보면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 당연히 성령충만을 받는 것처럼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소지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성경으로 성령충만 = 말씀충만의 근거와 답변을 원했는데...말씀충만을 외치시는 분이 성경으로 답변을 하지 않으시니 좀 이해하기 어렵네요..
그런 면에서 이해관계가 안 이루어질 수도 있겠죠. 지금 이 명절에 바쁩니다.
성령충만이 말씀충만이라는 의미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해할 분은 이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성경에 대한 지식적인 축적만을 충만이라고 할 것 같나요? 기본이잖아요. 말씀의 풍성한 깨달음과 은혜를 누리며 거기에 따라 거룩한 소원과 정신을 품고 산다면 성령충만한 삶이지 않을까요?
교회에서 개혁신학인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 공부를 하시나요? 모두 성경을 근거로 작성되었죠. 이를 개혁교회가 작성하게 된 계기는,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기독교의 핵심도리들을 빠른 시일내에 효과적으로 정립하고 교육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매주 교리문답을 외우고 공부하는데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합니다.
개혁신학은 철저히 성경을 근거로 하는데,... 이런 외국의 장로교회,개혁교회들이 하는 교리문답공부의 좋은 전통은 안하는 경우가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 님, 주님께서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와 가지 비사>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셨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은사 충만’했던 고린도 교회와 관련해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는 사실을 간단히 적겠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은사 충만은 ‘말씀 충만인 성령 충만’과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즉,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 어린 아이와 같은 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하지 못한 ‘어린 아이와 같은 교회’는 교회의 속성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속성 하나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0~17]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성신의 검을 들 수 있는 “주님의 청년”[요한일서 참고]으로서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한 사람을 두고 “신령한 사람”[고전 2:15]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신령한 사람들은 주님의 전투, 하나님 나라의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은사 충만한 교회였지만 말씀 충만하지 못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댓바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은사 충만이 곧 말씀 충만’이 아님을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1,2]
고린도교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은사 충만이 곧 말씀 충만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풀빛님 고린도 교회는 은사만 충만한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장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5절의 언변을 칼빈은 진리와 교리라고 이해 했습니다. 또한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는 말씀도 풍성한 교회란 의미인데.. 이를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그리고 이 분문은 7절에서 구변과 지식도 모든 은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제가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이다.”고 말하며 <포도나무와 가지 비사>를 살펴보시라고 부탁 드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즉, 어떤 열매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은 어떤 열매를 맺었습니까? ‘사랑’에 따른 ‘하나 됨’이라는 열매였습니까? 아니면 ‘교만’에 따른 ‘분열’이라는 열매였습니까?
고린도교회가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으로 바울 사도를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자신들을 바울 사도와 견주며 바울 사도의 사도권을 부정하지 않았습니까?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교회에 두 차례나 서신을 보냈음에도 그것도 “언변이 치졸하다.”[고후 9:9 참고] 하면서 말입니다.
풀핏님 글을 보면 재치도 정말 뛰어난 분 같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심도 느껴져서 좋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단들을 이길려면 우리들이 성경에 대하여 더 진지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개혁 신앙이라는 전통 안에 안주하려하지 마시고 더욱 성경 본문 안에서 본문이 말하는 뜻을 찾아주시고 그것을 가지고 개혁주의의 주장을 펴셨으면 좋겠습니다. 충분히 잘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이단들이 성경 구절을 여기 저기 끌어들여 자신들의 교리와 교주를 만드는 것을 보면 조직신학과 같은 방식으로는 안됩니다. 먼저 본문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 내어서 반격해야만 그들의 허구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