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는 원래 고구려인이었는데 20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장군이 되었다.
그는 고구려의 후예 답게 말을 잘하고 활을 잘쏴 젊은 나이에 혁혁한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 하였다.
티베트족을 공격하여 다라센과의 연대를 끊어 놓기도 하였고, 사라센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슈켄트를 토벌 하기도 했다. 751년에 사라센 제국과 탈라스에서 맞붙어 싸웠지만 동맹군의 배신으로 아쉽게 패배하고 이후 안녹산의 반란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모함을 입고 아깝게 처형 당하긴 했지만 영국의 동양학자인
마크 아우렐 스타인 Maric Aurel Stein의 말처럼 그는 "유럽의 어느 유능한 사령관 보다 탁월한 전략과 통솔력의 소유자였다.
※안녹산※
안녹산은 진귀한 동물과 금은보화들을 바쳐서 현종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현종이 첩보(捷報, 전승을 보하는 장계)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소수민족 수령과 병사들을 군막 안으로 꾀어들여, 만취해서 쓰러지도록 술을 먹이고는 그들의 귀를 잘라서 조정에 보냈다. 안녹산은 이런 비열한 방법으로 이른바 전공을 보고하곤 했다. 안녹산이 장안에 오면 현종은 친히 그를 접견하곤 했다. 안녹산은 그 기회에 현종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아첨을 다 했다. 안녹산은 몸이 특별히 비대하고 생김새 또한 어수룩했으나 이상하게도 현종은 이런 안녹산을 좋아했다.
현종과 이임보의 신임을 얻은 안녹산은 범양(范陽), 평로, 하동(河東, 산서성 태원시 일대)의 절도사가 되어, 북방 변경의 대부분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은밀히 군사를 확충하는 한편 사사명(史思明), 채희덕(蔡希德) 같은 맹장들을 발탁하고 고상(高商), 엄장(嚴庄)과 같은 한족 선비들을 등용하여 모략을 꾸미게 했다. 그리고 군량을 대대적으로 비축하고 무기들을 대량으로 제조하면서 현종이 죽기만을 기다렸다. 현종이 죽기만 하면 즉시 반란을 일으킬 작정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임보가 병들어 죽고, 양귀비의 친척인 양국충(楊國忠)이 외척의 지위를 빌어 재상이 되었다. 양국충은 원래 아무 재능도 없는 건달잡배였다. 그래서 안녹산은 양국충을 깔보았고, 양국충도 안녹산을 안 좋게 보았다. 둘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다. 양국충은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누차 말했으나 안녹산을 총신하는 현종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755년 10월, 준비를 끝마친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결심했다. 마침 바로 그때 관원 하나가 장안에서 범양으로 왔다. 안녹산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현종이 조서를 보내왔다고 거짓으로 꾸며 장병들에게 선포했다.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가서 양국충을 섬멸하라는 황제의 밀령이 내렸노라.” 장병들은 너무 돌연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조서가 의심스럽다고 감히 나서지는 못했다. 이튿날 아침 안녹산은 보병과 기병 15만을 데리고 남하하여 하북 평원으로 진군했다. 길 위에서는 북소리가 진동하고 희뿌옇게 흩날리는 먼지로 인해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중원 일대는 1백여 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 몇 대가 지나도록 백성들은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살아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전쟁이 터지자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관리들마저 황급히 도망치거나 항복해 왔다. 안녹산의 반란군은 저항다운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파죽지세로 내려갔다.
반란군이 범양에서 내려온다는 소식이 장안에 전해지자 현종은 유언비어가 아닌가 의심했다. 급보가 연이어 올라오자 그제야 다급해진 현종은 부랴부랴 문무백관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란을 겪어보지 못한 대신들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서로 쳐다만 볼 뿐 누구 하나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자 양국충은 득의양양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이 뭐라고 했습니까? 안녹산이 역모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의 말이 맞지요? 하오나 폐하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장수들이 안녹산을 따르지는 않을 겁니다. 열흘이 못 되어 안녹산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가 있을 겁니다.” 양국충의 말에 현종은 한결 마음이 놓여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양국충의 호언장담을 조롱이나 하듯이 안녹산의 반란군은 짧은 시일 내에 승승장구로 쳐내려와 황하를 건너 낙양을 단번에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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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기※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으로, 절도사가 되었다가 이후로 어지러워진 당나라 후기의 혼란을 틈타 지역에서 사실상 자립했다.
고선지나 , 왕사례, 고문간 등과 더불어 고구려 유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에서 크게 출세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한반도와 마주보는 산둥 섬은 물론 안후이 섬과 장쑤성 일대까지 점령 지역을 넓혀 나갔는데 이는 당시 한반도 이남 지역을 장악한 신라보다 몇배나 넓은 영토였다.. 아쉽게도 한창 세력을 넓혀 가던 시기에 이정기가 등장으로 급시 하는 바람에 세력이 꺾이고 말았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니면 당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세력으로 떠 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듯 고구려는 멸망 이후에도 꽤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고 그들은 고구려의 기상을 드높였다. 이는 모두 고구려의 인재육성 정책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기업집단이기도 하지만 삼성 출신들은 퇴직 이후에도 어디에서나 환영 받았으며 큰 성과를 나타내곤 한다.
안녹산은 진귀한 동물과 금은보화들을 바쳐서 현종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현종이 첩보(捷報, 전승을 보하는 장계)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소수민족 수령과 병사들을 군막 안으로 꾀어들여, 만취해서 쓰러지도록 술을 먹이고는 그들의 귀를 잘라서 조정에 보냈다. 안녹산은 이런 비열한 방법으로 이른바 전공을 보고하곤 했다. 안녹산이 장안에 오면 현종은 친히 그를 접견하곤 했다. 안녹산은 그 기회에 현종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아첨을 다 했다. 안녹산은 몸이 특별히 비대하고 생김새 또한 어수룩했으나 이상하게도 현종은 이런 안녹산을 좋아했다.
현종과 이임보의 신임을 얻은 안녹산은 범양(范陽), 평로, 하동(河東, 산서성 태원시 일대)의 절도사가 되어, 북방 변경의 대부분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은밀히 군사를 확충하는 한편 사사명(史思明), 채희덕(蔡希德) 같은 맹장들을 발탁하고 고상(高商), 엄장(嚴庄)과 같은 한족 선비들을 등용하여 모략을 꾸미게 했다. 그리고 군량을 대대적으로 비축하고 무기들을 대량으로 제조하면서 현종이 죽기만을 기다렸다. 현종이 죽기만 하면 즉시 반란을 일으킬 작정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임보가 병들어 죽고, 양귀비의 친척인 양국충(楊國忠)이 외척의 지위를 빌어 재상이 되었다. 양국충은 원래 아무 재능도 없는 건달잡배였다. 그래서 안녹산은 양국충을 깔보았고, 양국충도 안녹산을 안 좋게 보았다. 둘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다. 양국충은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누차 말했으나 안녹산을 총신하는 현종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755년 10월, 준비를 끝마친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결심했다. 마침 바로 그때 관원 하나가 장안에서 범양으로 왔다. 안녹산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현종이 조서를 보내왔다고 거짓으로 꾸며 장병들에게 선포했다.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가서 양국충을 섬멸하라는 황제의 밀령이 내렸노라.” 장병들은 너무 돌연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조서가 의심스럽다고 감히 나서지는 못했다. 이튿날 아침 안녹산은 보병과 기병 15만을 데리고 남하하여 하북 평원으로 진군했다. 길 위에서는 북소리가 진동하고 희뿌옇게 흩날리는 먼지로 인해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중원 일대는 1백여 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 몇 대가 지나도록 백성들은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살아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전쟁이 터지자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관리들마저 황급히 도망치거나 항복해 왔다. 안녹산의 반란군은 저항다운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파죽지세로 내려갔다.
반란군이 범양에서 내려온다는 소식이 장안에 전해지자 현종은 유언비어가 아닌가 의심했다. 급보가 연이어 올라오자 그제야 다급해진 현종은 부랴부랴 문무백관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란을 겪어보지 못한 대신들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서로 쳐다만 볼 뿐 누구 하나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자 양국충은 득의양양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이 뭐라고 했습니까? 안녹산이 역모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의 말이 맞지요? 하오나 폐하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장수들이 안녹산을 따르지는 않을 겁니다. 열흘이 못 되어 안녹산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가 있을 겁니다.” 양국충의 말에 현종은 한결 마음이 놓여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양국충의 호언장담을 조롱이나 하듯이 안녹산의 반란군은 짧은 시일 내에 승승장구로 쳐내려와 황하를 건너 낙양을 단번에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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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구려가 망한지 30년이 지나 길림성 동모산 아래에 도성을 정하고
발해를 건국하였다 초기에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당나라의 속국이 되기도 하였으나 점차 주변지역을 정복하고 세력을 규합하여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함으로써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아우르는 절대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중심이 되어 고구려를 잇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이뿐 아니다 고구려를 정복한 당나라는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으로 무려 20만에 달하는 고구려의 지도층 인사들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내륙 깊숙한 곳에 분산하여 이주시켰다.
그 중에는 만주서 쪽인 요서의 영주 일대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들이 있었는데 이들중 이정기가 나라를 세우고 당나라에 도전하였다. 처음에는 변방의 작은 군대의 장수에 불과하였으나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세력을 넓혀나가 중국에는 당나라와 자웅을 겨루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간다.
※ 이정기※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으로, 절도사가 되었다가 이후로 어지러워진 당나라 후기의 혼란을 틈타 지역에서 사실상 자립했다.
고선지나 , 왕사례, 고문간 등과 더불어 고구려 유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에서 크게 출세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한반도와 마주보는 산둥 섬은 물론 안후이 섬과 장쑤성 일대까지 점령 지역을 넓혀 나갔는데 이는 당시 한반도 이남 지역을 장악한 신라보다 몇배나 넓은 영토였다.. 아쉽게도 한창 세력을 넓혀 가던 시기에 이정기가 등장으로 급시 하는 바람에 세력이 꺾이고 말았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니면 당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세력으로 떠 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듯 고구려는 멸망 이후에도 꽤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고 그들은 고구려의 기상을 드높였다. 이는 모두 고구려의 인재육성 정책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기업집단이기도 하지만 삼성 출신들은 퇴직 이후에도 어디에서나 환영 받았으며 큰 성과를 나타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