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추운 날씨에도 예배 참석하신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씨가 추워서 손발이 얼어도 마음이 얼면 안 됩니다. 요즘 물가는 자꾸 올라가고 세금도 자꾸 올라가는데 어찌 살아야 하나 마음이 얼어붙으려고 한다는데 오늘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녹여주시고 위로해주시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올해 표어를 '성령을 따라 행하자'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행할 때 우리 영혼이 잘 되고 그래야 범사도 잘 되고 육체가 강건하게 되는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성령으로 행하여 영혼과 육체와 범사가 잘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어떤 결과가 있는가에 대해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1.먼저 내 안에 성령이 계시면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5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은 단순히 우리의 영인 soul이 아니라 holy spirit입니다. 좇다는 표현도 controll을 씁니다. 내가 내 육체의 욕망대로 콘트롤 받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영에 콘트롤 받느냐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에 콘트롤 받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영이 육신을 콘트롤해야 하는데 육신의 생각이 더 나를 지배하고 앞서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안에 이 두 가지가 늘 싸운다고 고백합니다. (롬7장 21절-24) 그러니까 성령이 계셔도 늘 이러한 싸움이 있다는 것이고 이 싸움에서 늘 성령의 생각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육의 생각이 이길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그러했다면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2.본문이 말하는 또 하나는 9절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어야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갈4:6에서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 보세요. 그게 믿어지고 그렇게 부른다면 이것이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고전12:3에도 분명히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비록 네게 아무런 은사도 나타나지 않고 네가 아무런 능력도 없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는 표적도 없는데 네게 무슨 성령이 계시겠느냐고 반문할지라도,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나의 죄를 대신 짊어져주셨고 나의 주님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있다면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는 증거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고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을 입으로 주라 시인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육신의 생각에 져서 육신대로 살아가고 있어도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심은 영원한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자식이 말 안 듣고 가출 했다고 절대로 집에 들어오지 마라, 자식 아니다고 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사람은 비록 죄를 범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도 마음 한구석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이르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도 다시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지, 교회를 사랑하고 섬겨야지'하며 자기 영혼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령이 내 안에 계셔도 내가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신을 따르기에 성령은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있어야 우리도 부활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킴같이 우리 또한 일으키십니다. 11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린"답니다. 그래서 고후4:14에서는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내가 예수의 생명에 다시 접붙힌 바 되어 내 영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게 10절의 말씀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즉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였으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흙으로 반드시 돌아가겠지만 영은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을 입는 변화, 즉 부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요 하나님의 명확한 약속인데 이 부활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활에 함께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부활이 우리의 푯대입니다. 이 부활 때문에 우리가 더 힘써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다면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계시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께 쓰임받은 자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요셉이 바로왕 앞에 섰을 때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합니다. 다니엘도 그 안에는 거룩한 신의 영이 있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의 영에 이끌렸기에 그가 시편을 기록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출35:21에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때도 "그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라고 합니다.
대하30:12에 히스기야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청소하고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고 할 때도 "하나님의 손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그들에게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한 마음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고 합니다.
대하36:22에는 이방인 고레스왕도 하나님이 감동시켜 일하게 하십니다.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라고 합니다.
학1:14에서는 성전을 재건할 때도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을 계시로 볼 때도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말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이 내 안에 계시게만 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고 해서 이성을 초월하여 감성적인 사람, 감정이 앞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이성적인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나 감동은 바울이 빌4:8에 말한대로 "무엇이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한 것이지 이성을 잃고 흥분하는 것이 감동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도덕하고 게으르고 나태하고 거짓을 일삼으면서 성령에 감동되는 것이 병행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정결한지, 무엇이 경건한지 더 분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더 절제하고 더 정결하고 더 경건에 이르려고 하게 됩니다. 감동받았다고 고삐 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더 코뚜레를 붙잡혀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멍에를 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자의 삶이요 이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가 결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육신대로 살아갈 것인가, 언제까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지 못하고 육신대로 살아서 그 마지막이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둘 것인가, 아니면 이제부터 영의 소원을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안을 누리며 살 것인가, 이 질문 앞에 함께 서야 합니다. 육신의 일을 생각하느냐, 영의 일을 생각하느냐 그 차이는 분명합니다. 갈6:8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롬8:13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했습니다. 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 합니다.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 사람과 관계가 뒤틀려지고 오해가 생기고 부득불한 사정으로 누구랑 원수가 되더라도 결단코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원수 맺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는 아무도 그 앞에 숨거나 피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감동이 쏟아지거나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 아닙니다. 자유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반드시 희생이 있었듯이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살기 위해서는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주님 앞에 자신을 이끌어 내어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며,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래야 감동도 주시고 충만도 주시는 것입니다.
올 해 우리는 먼저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확신하고 성령의 감동을 따르게 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혀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게 되고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이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