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신학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제임스 던 (James D. G. Dunn)
![]() |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Paperback) Dunn, James D. G./Eerdmans Pub Co |
NPP(New Perspective on Paul, 이하 '새관점')의 첨병 제임스 던의 "바울신학"에 대한 소개입니다. 이 책은 1998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으로, 국내에도 2003년도에 크리스챤다이제스트에서 출판된 바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제임스 던의 신학적 탁월함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지 어언 10년이 다 되가는 지금조차 국내 학자들은 이 책에 대한 비평조차 엄두를 못내는데, 어떻게 이렇게 탁월한 책이 본디 15년 전에 출판된 책인지 놀랍습니다.
새관점(NPP)이란 무엇인가: 과연 유대교는 은혜를 배제한 종교였을까?
지난 세기 중후반부터 지금까지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의론 다음으로 논쟁적인 주제를 꼽자면, 바로 이 새관점이 꼽힙니다. 새관점이란 간단히 말해서, 16세기 이후로 관심이 집중된 바울의 신학을 개신교에서 올바로 해석해냈느냐 하는 문제제기로부터 비롯된 바울에 대한 새로운 해석 방법론 입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듯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대체로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의와 가톨릭의 공로에 대한 열의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에 대항하여 "오직 은혜"를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이 은혜를 거부했는가?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가톨릭은 "은혜의 선행" 이후에 행위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는 주의 깊은 독자라면, 칼빈의 '칭의' 이후의 '성화'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외면의 일치가 내면의 일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둘 모두 은혜와 행위 모두 필요없다고 하지는 않았음이 매우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톨릭은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개혁자 이후의 일부 개신교 학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유대교가 은혜를 배제한 상태에서 행위-구원을 주장했냐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새관점의 문제제기입니다. 그리고 이 새관점의 첨병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소개하는 제임스 던의 "바울신학"이라는 이 책인데, 이 거의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 전부를 다룰 수는 없겠고, 이 책과 새관점의 핵심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제임스 던은 바울 시대 유대인들을 단순화시켜서 그저 "율법주의자"(혹은 중세가톨릭 시기의 "공적주의자")로 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구관점의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율법을 구원의 사다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던이 보기에, "율법의 행위"라는 문구는 구원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율법의 행위"는 구원을 성취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명기 30장을 따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이라는 표지를 나타내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적 논점은 많은 신약학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물론 많은 구관점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유대인의 생각을 과장한 면도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이 없는 사실을 지어낸 것은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이 "율법의 행위"라는 항목은 구관점과 새관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관점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용어에서 "율법의 행위"가 하나의 정형어구임을 반드시 숙지해두어야 합니다. 최근까지 이 "율법의 행위"라는 어구는 바울 이전에 사용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쿰란 문서 4QMMT가 발견됨으로써 이 용어에 대한 사용은 인준됩니다(495 참고). 존 파이퍼(John Piper)는 "칭의논쟁"(책보기)이라는 책에서 이 문서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으나, 그의 이러한 반론은 거의 유효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의 이러한 역할의 잠장적 성격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특히 하나님의 율법을 수여받았다는 것으로 나타난 하나님과의 특권적인 관계를 계속해서 전제한 것에서 드러난다." (249) "계약은 하나님의 주도권에 의해서 주어졌고, 율법은 계약 내에서의 삶을 위한 틀을 제시한 것이었다. 율법의 준행은 율법에 맞춰 살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계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470) "율법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삶에 방향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및 계약상의 이스라엘의 지위 및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목들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250, 굵은 글씨 첨부) "옛 관점과 새로운 관점 간의 논쟁에 대한 해법은 의를 이루는 것(achieving)과 의를 유지하는 것(maintaining)의 구별을 명확히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491)
[참고 1. 율법 전부를 준수하느냐, 율법의 일부를 준수하느냐?]
많은 구관점의 학자들은 바울의 초점은 율법 전부를 준수하는 것이 사도 바울이 다루고 있는 율법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임스 던은 안식일 준수, 할례, 음식 규례 준수 같은 특정한 행위 등의 "율법의 변질"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2. 개인인가, 공동체인가?]
많은 구관점의 학자들은 개인의 신앙을 중시합니다. "오직 믿음"이 잘 보여주듯이, 개인이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 받는 것이 전통적인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임스 던은 이 책에서 믿음의 "공동체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개인이 내면에서 신비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말해서 그리스도 공동체에로의 참여하는 것입니다.
새관점을 지지하든 구관점을 지지하든 상관없이, 대부분의 학자들은 "율법의 행위"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이 "믿음"을 답으로 제시했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옛 관점에서 보자면, 단순하게 "믿음"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혹은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만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새관점에서 보자면, 이 "믿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의 표지이거나 신분증입니다. 물론 많은 새관점의 학자들이 그러하듯 제임스 던은 구관점의 입장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임스 던은 이 책에서 지극히 신중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책에서 "믿음"에 대한 강조점은 충분히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데, 그것은 "믿음"이 전통적인 의미의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일종의 지속적인 '신뢰'(trust)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상술하면 전통적인 의미의 "믿음"은 분명히 순간적인 영적인 변화의 측면과, 동시에 하나님-인간의 수직적 차원이 강하게 강조됩니다. 그러나 새관점의 "믿음"에 대한 '신뢰'의 뉘앙스는 보다 지속적이고, 하나님-인간의 <관계적 측면>이 강합니다. 이는 사실 매우 학문적인 논의인데, 전통적인 의의 '법정적 측면'이 사실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 결과 잘못되었다라는 것이 최근 몇 십년간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약하면, 새관점에서 "믿음"의 의미는 어떤 심오한 <영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칠게 말해서 사람들이 교회 안의 회원으로 가입하는 <수평적 차원>이 강조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갈라디아서의 문맥에서, "율법의 행위"와 연관지어 살펴보면 다음 도표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요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율법의 행위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527, 굵은 글씨 첨부)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서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게 된다(2:16).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행위"는 의를 이루기 위한 행위들이 아니라 계약적 의, 특히 이방인들과의 구별을 유지하기 위하여 준수하도록 명령된 율법의 계명들이었다는 것이다."(498, 굵은 글씨 첨부) ""듣고 믿음"이 가져온 효력은 유대인의 계약적 생활방식("율법의 행위")을 전혀 따를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499).
사실 제임스 던의 이 책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이신칭의라는 주제를 이렇게 단독의 항목으로 떼어놓는 것은 상당히 이 책의 체계를 파괴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어쨌든 많은 독자들에 대한 소개를 위하여 이렇게 항목을 쪼개서 설명하자면, 우선 구관점의 학자들은 새관점이 일반적으로 죄의 중요성을 약화시킨다고 말한다는 것부터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새관점의 '칭의'에 대한 재해석에 있습니다. 새관점은 이신칭의의 핵심이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전통적인 관점의 이신칭의의 핵심이 "죄인인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라는 주장과 상반됩니다. 결국 새관점은 사도 바울 당시의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고, 구관점은 바울의 시대적 상황 그 자체보다는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에 대한 고도의 비평이 진행될수록, 새관점이 점차적으로 많은 학자들의 동의를 얻어가는 현상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교리는 율법에서 자유롭고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 이방 선교에 대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반대에 맞서 형성된 변증적 교리였다. "이신칭의"는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었다: 어떻게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가?"(472)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서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게 된다(2:16).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행위"는 의를 이루기 위한 행위들이 아니라 계약적 의, 특히 이방인들과의 구별을 유지하기 위하여 준수하도록 명령된 율법의 계명들이었다는 것이다."(498)
[3. 칭의의 주된 관심은 이방인의 편입인가? 보편적인 인류의 죄인가?]
새관점은 이신칭의의 핵심이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전통적인 관점의 이신칭의의 핵심이 "죄인인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라는 주장과 상반됩니다.
[4. 1세기 유대교 안에서 바울이 사용한 칭의는 법적인 용어인가? 관계적 용어인가?]
전통적으로 '칭의'(justification)은 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이해하여, '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하나님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바울이 가져온 원래적 '칭의'의 의미는 언약언어 내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새관점은 칭의에서 <죄>보다 <관계>의 의미를 더욱 중시 여깁니다. 구관점 학자들은 이런 강조가 죄에 대한 중요성을 손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5. 칭의의 실질: 죄인의 의인됨인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인가?]
구관점은 칭의 교리의 핵심이 죄인이 기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칭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해당되며, 율법 준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이는 죄인으로서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관점은 이 구관점의 입장에 일부 동의하면서, 그러나, 칭의 교리의 핵심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하나됨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21세기 초두에 나온 바울 신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에 앞서 제임스 던의 신학적 사고의 핵심은 그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 안에 있습니다. 그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무려 40년 전인 1970년대에 "Baptism In The Holy Spirit"("성령세례")라는 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나오는 그의 기본적인 신학구조가 근래에 출판된 이 책에서 동일하게 전개되는 양상은 그의 독자를 매우 흥미롭게 만듭니다. 제임스 던은 존 스토트, 리처드 개핀, F.F. 브루스 등의 많은 복음주의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구원의 두 단계 과정을 지지하는 성령주의, 오순절교파에 반대를 표합니다. 던은 두 번째 축복이라거나, 방언이 성령 세례의 증거라든가, 성령 세례가 <회심>과 <능력 부음>이라든가 하는 기이한 성령주의 교리 - 비록 한국에서는 순복음교회로 인해 너무나 익숙해진 주장이긴 하지만 - 에 강한 반대를 합니다. 이는 던의 복음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반대라 볼 수 있는데, 솔직한 생각으로는 과연 오순절파의 신학자들이 제임스 던의 이 책에서 드러난 체계적인 성령론을 과연 반박을 해낼 수 있을지 그 향후 방향이 매우 궁금해집니다. 이는 그만큼 던이 체계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제임스 던의 성령론을 바라볼 때 중요한 것은 "보다 큰 관점"입니다. 이 책은 단독으로 떼어놓고 성령론을 다루지 않습니다. 던이 말하는 성령은 신비주의로 그의 신자를 이끌지 않습니다. 성령은 1)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며, 또 중요하게 현실적으로 성령은 2) "이방인"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16.2참고). 반복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2)번인데 성령은 거칠게 말해서 일종의 "그리스도인됨의 현실적인 표지"가 됩니다. 성령은 일종의 '개종' 혹은 '회심'이며, 이는 유대의 분파주의적 정체성에 바울이 반대를 표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던이 말하는 어떤 특정한 주제를 논하기에 앞서, 이보다 더 큰 그림인 칭의론(14장), 그리스도론(15장), 성령론(16장)이 하나가 되어 엮어지는 바울 신학의 핵심을 먼저 이 책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말론적 성령이 실제로 "모든 육체 위에" 부어졌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족속에게 복의 근원이 되리라던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이 마침내 성취되고 있었다(갈3:8, 14)."(573) "바울의 성령론은 고교회파의 신학이나 "두 번째 축복"을 주장하는 분파들 속에서 종종 등장해 온 가르침들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즉, 바울의 성령론은 두 번째 단계의 제자도나 헌신의 때까지는 성령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상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성령의 수여는 본질적으로 구원 과정을 시작한다는 성격을 지닌다."(664)
나가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사실 역설적이게도 그리 새로운 관점은 아닙니다.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상당히 새관점의 위치는 달라질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새관점은 "칭의론"을 중심교리로 삼는 개신교인들에게는 정말 새로운 것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이천 년 역사를 통틀어 넓게 보자면, 바울에 대한 새관점의 전체적 논점은 사실 그리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항상 기독교 교파 내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하나됨과 공동체에 대한 강조, 루터의 이신칭의 해석에 대한 반발, 중심교리의 이동이 있어 왔습니다. 새로운 관점이 가장 큰 반발을 사는 것은 아마 위에서 보듯이 [칭의의 실질: 죄인의 의인됨인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인가?]에 관한 항목이 될 것입니다. 새관점의 해석을 밀어붙일 경우, 하나님과 인간의 죄에 대한 강조가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 걱정할 항목이 아닙니다. 이 항목에 대해 필자가 우려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a. 새관점이 오히려 '죄'에 대한 바울의 이해와 보다 깊은 신학적 이해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 b. 개신교 내에 18-20세기의 복음주의적 경건주의적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새관점이 이제야 원위치로 옮겨놓고 있다는 것. 특별히 후자의 항목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그러하듯이 지나친 '내재적'인 하나님에 대한 강조는 오히려 우리 신앙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항상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기독교 이천 년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강조를 잊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