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崔凝)은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의 토산현(土山縣 : 지금의 황해북도 토산군) 사람으로, 부친은 대상(大相) 최우달(崔祐達)이다.
최응의 모친이 임신하였을 때 집에 있는 오이 덩굴에 갑자기 참외가 열렸다. 고을 사람이 궁예에게 알리자 궁예가 점쳐보고,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절대 키우지 말라.”고 하였으나, 부모가 그를 숨겨서 키웠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장성해서는 오경(五經)에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
궁예의 한림랑(翰林郞)이 되어 제고(制誥)를 기초하니 궁예가 그 글을 보고 매우 흡족하여, “이른바 성인(聖人)을 얻었다 함은 바로 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하루는 궁예가 태조를 불러 모반의 혐의가 있다고 무고하자 태조가 이를 변명하였다.
그 때 최응이 장주(掌奏)로 궁예의 곁에 있었는데,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서는 뜰로 내려가서 집고 태조 곁을 스쳐 지나며, “자백하지 않으면 위태롭습니다.”라고 속삭였다. 태조가 알아차리고 마침내 거짓으로 자백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태조가 즉위하자 최응을 옛 관직대로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로 삼았다가 얼마 뒤 광평낭중(廣評郞中)으로 임명하였다. 최응은 삼공(三公)과 보상(輔相)의 도량을 가졌으며 실무에 밝고 통달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크게 칭송하였고, 태조에게서도 우대를 받았다.
밤낮으로 부지런하고 신중하였으며 왕에게 옳고 그름을 따져 건의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태조가 매번 그의 건의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경은 학문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아울러 정치의 요체를 잘 알고 있소. 나라 일을 근심하고 멸사봉공하여 자기 한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하니 옛날의 뛰어난 신하들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을 것이오.”라고 칭찬하였다.
내봉경(內奉卿)으로 옮기게 하였다가 얼마 안되어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임명하자, 최응은, “신의 동료인 윤봉(尹逢)은 신보다 열살 위이니, 바라옵건대 그를 먼저 임명해 주소서.”라 하며 사양하였다. 이에 태조는 “내가 예전에 ‘능히 예로써 양보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서야 그런 사람을 만났도다.”라고 하며, 결국 윤봉을 광평시랑으로 삼았다.
최응은 항상 채식을 하였다. 한번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태조가 동궁(東宮)을 보내어 병 문안하고, “단지 손수 살생하지 않으면 될 뿐인데, 고기 먹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소?”라며 고기 먹을 것을 권하였다.
최응이 굳이 사양하고 먹지 않자, 태조가 몸소 그의 집에 가서,
“경이 고기를 먹지 않으면 두 가지 손실이 있소. 몸을 보전하지 못하여 끝까지 모친을 봉양할 수 없으니 불효요, 오래 살지 못하여 나로 하여금 일찍 훌륭한 신하를 잃게 하니 불충이오.”라고 말하였다. 최응이 그제서야 고기를 먹으니, 과연 건강이 회복되었다.
뒷날 태조가 최응에게, “예전에 신라가 9층탑을 조성하여 마침내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소. 이제 개경(開京 : 지금의 개성직할시)에 7층탑을 세우고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 9층탑을 건립함으로써 부처의 공덕을 빌어 추악한 무리들을 없애고 삼한을 통일하여 한 집안으로 만들기를 바라니, 경은 나를 위하여 발원하는 소(imagefont)를 지어주시오.”
라고 부탁하자, 최응이 이에 소를 지어 올렸다.
태조 15년(932)에 죽으니, 나이는 서른 다섯이었다. 당시 태조가 연산군(燕山郡 :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군 및 청원군)에 있다가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였다.
원보(元甫)로 추증하고, 부의로 보내는 물건이 매우 넉넉하였으며, 여러 차례 추증하여 대광(大匡)·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고 시호를 희개(熙愷)라 하였다 현종 18년(1027) 태조의 묘정에 배향하고, 덕종 2년(1033) 사도(司徒)로 올려 추증하였다. 아들은 최빈(崔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