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0장 22-34절
찬송가 254장 ‘내 주의 보혈은
북이스라엘의 일곱번째 왕 아합은 바알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합에게 여러 이적을 보여 주셨음에도, 아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년간의 기근으로 곤고하게도 하셨으며, 또한 하늘에서 내리는 불로 제단을 사르는 것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제 본문에서 또 한번 아람을 물리침으로 이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적을 보이실때 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고 선지자의 입을 빌려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또 한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고 하시며, 적은 수의 이스라엘이 많은 수의 아람을 이기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아합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합에게서 보듯이 그 효과는 우리 생각과 달리 좋지 않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사건을 볼 때, 믿음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나 소원의 성취 등과는 다른 문제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아합에게 하나님이심의 증거를 보여주시지만, 아합은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인 것 처럼 행동합니다. 이 문제는 비단 아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모습을 보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2)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
선지자가 아합에게 해가 바뀌면 아람이 다시 치러 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어떤 대비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면, 첫번째는 당장의 눈 앞의 일이 해결됐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아람을 이겼다는 자만심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지만, 결과론적으로 하나님께 도움 받는 자기 자신이 커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아합의 상태는 당시 고대 중동의 신에 대한 관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아합에게는 선지자의 경고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아합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당장 해결해야할 일에만 시야가 머물거나,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신을 크게 여기는 모습입니다.
아람 왕의 신하들의 말이 그 상태에 있는 사람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23-25) 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 또 왕은 이 일을 행하실지니 곧 왕들을 제하여 각각 그 곳에서 떠나게 하고 그들 대신에 총독들을 두시고 또 왕의 잃어버린 군대와 같은 군대를 왕을 위하여 보충하고 말은 말대로, 병거는 병거대로 보충하고 우리가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하리이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그리하니라
신하들의 조언과 아람왕의 대처는 고대 중동 사람들의 신에 대한 관념을 보여줍니다. 신을 일정한 힘과 한계를 가진 개인이나 민족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람 왕의 신하들은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라서 산에서는 우리보다 강하지만, 골짜기에서는 약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뿐만아니라, 아람의 신도 산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수호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람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에 대한 생각이기도 하고 당시의 일반적인 신에 대한 관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아람 사람들 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너희에게 내가 여호와 인줄’ 알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성경의 하나님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지만, 분별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을 신뢰하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계속 자신을 비추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합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26-28) 해가 바뀌니 벤하닷이 아람 사람을 소집하고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매 이스라엘 자손도 소집되어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그들 앞에 진영을 치니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선지자가 말한 대로, 해가 바뀌어 아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올라 왔습니다. 아람은 대책을 세워서 나왔습니다. 앞선 전투에서 술을 마시다 패한 지방의 왕들 대신 총독들을 군지휘관으로 세우고, 말과 병거를 보충해서 산이 아닌 골짜기에서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준비도 안된 군인들을 모아 군량미를 지급하고 진을 쳤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성경은 이스라엘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떼 같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아람의 적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적은 염소 떼 같다는 말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 땅에 가득한 아람 군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다시 하나님의 사람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아합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 아람의 군대를 이스라엘 손에 넘기겠다고 하십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긴다면 하나님이 하신일이 분명하며, 하나님은 산에 사는 신과 같은 수호신이 아님이 증명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아합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십니다.
(29-30) 진영이 서로 대치한 지 칠 일이라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 명을 죽이매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벽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에 의해 전멸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충분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적은 염소떼 같은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군대 십이만칠천 명을 하루에 몰살시켰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거나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믿음의 증거로서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마치 자기가 그 일을 한 것 처럼 혹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용해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31-34)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나아가면 그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이르되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 그 사람들이 좋은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이르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그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그를 병거에 올린지라 하닷이 왕께 아뢰되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보내리이다 또 내 아버지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
아합은 항복해 오는 벤하닷에게 ‘그가 아직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고 하며 살려줍니다. 뿐만아니라 호의를 베풀고 조약을 맺어 자기의 명예와 경제적이익을 챙깁니다. 하나님은 아합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기적을 행하셨지만, 아합은 그 기적을 자기의 명예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합에게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지만, 아합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기에게 득이 됨을 눈으로 보고도 하나님을 섬지기 않은 것이겠습니까? 왜 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갖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그것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 보고자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쫓아오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표적을 보고 따르는 것을 믿음으로 보시고, 떡을 먹음으로 인해 따르는 것은 믿음이 아닌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님이 영원한 양식이다’는 표적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표적 때문에 예수님을 쫓은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를 먹고 그것 때문에 쫓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떡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양식 곧 예수님을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즉 아합은 표적이 아니라 떡을 좇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고, 떡과 같이 필요를 채워주는 수호신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를 도와주고 필요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을 쫓는 것이 아니라, 생명도 소망도 없는 죽은자와 같은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좇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믿음은 자기에게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받아들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기적과 같은 증거를 얻고, 소원과 기도가 응답되는 것에 믿음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합이 아무리 많은 기적을 경험했어도,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만 더 커져가고, 급기야 그 기적으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움켜쥘 때,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혈류병 여인처럼 예수님께로 부터 오는 생명을 위해 움켜쥐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지만, 아합은 하나님 알기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하나님, 아합에게서 저희의 모습을 봅니다. 이런 저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이제는 아합의 길에서 돌아서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제자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합은 왜 하나님께서 아람을 물리치게 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아람의 신하들은 하나님을 산의 신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산의 신이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3. 아합은 하나님께서 아람을 다시 물리칙 해주셨는데도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는지 묵상해봅시다.
4. 믿음은 기적과 같은 일들로 도움을 받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서 나오는 것인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조광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