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묘(精忠廟)의 유래
정충묘는 광주시 초월면 대쌍령리 3번 국도변에 자리 잡고 있다. 정충묘란 병자호란(1636)때에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쳐 순국 하신 장군들의 절의(節義)를 추앙하여 제를 드리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이다. 정충묘에는 병자호란(조선인조14년(1636)때, 남한산성에 몽진(蒙塵)해 있던 인조(仁祖)왕을 구출하기 위하여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병사(兵使)) 허완(許完) 장군, 경상우도병사(慶尙右道 兵使) 민영장군, 안동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장군 과 공청도(公淸道) 병사(兵使) 이의배(李義培)장군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쌍령전투(雙嶺戰鬪)
병자호란은 1636년 음력12월에 발발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40년이 채 안된 때였다. 조선(朝鮮)의 조정은 끔직한 왜란(倭亂)을 당한 후에도 국토방위에 힘을 쓰기는커녕, 정변(政變)이 거듭되어 선조(宣祖)가 죽자 광해군(光海君)이 왕위에 올라, 갖은 폭정(暴政)으로 얼룩지고, 조정(朝廷)의 신하들은 당파 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무능한 능양군 인조(仁祖)를 왕위에 앉히고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이 정권(政權)을 쥐고 있으면서, 명(明)나라만을 추종하면서 정치를 하다가, 청나라를 배척하게 되니, 신흥국(新興國)인 청나라의 막강한 군사 120,000이 습격해 들어오니 졸지에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조정(朝廷)에서는 각도에 긴급 명령을 내려 왕을 구할 것을 지시했으나, 군대라고는 아주 미미하여, 경상도에서 병사(兵使)들이 오합지졸의 군사를 40,000명이나 거느리고 이곳 쌍령에 도착하여 진을 쳤으나, 화력(火力)도 시원치 않고, 훈련도 제대로 안된 군사들이 먹지도 못하고, 추위에 지칠 대로 지쳤고, 날씨는 엄동설한에 싸울 힘도 없었으나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청나라 군사들은 잘 훈련된 기마병(騎馬兵)을 선두로 우리군의 진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청군(淸軍)의 막강한 화력과 기마부대는 우리군의 진지를 종횡무진 유린하게 되어, 급기야 우리 군사는 거의 전멸(全滅)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총지휘관인 허완장군, 민영장군, 선세강 장군도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죽주산성(안성 일죽면)에서 이 보고를 받은 이의배장군이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쌍령리로 오다가, 매복해 있던 청군의 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고, 이의배장군도 장렬히 전사하고 만 것이다.
정충묘 제례
병자호란이 끝난 후, 나라에서는 이곳에 모신 네 분 장군들의 영령(英靈)을 위로하고, 전사(戰死)한 군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사(祭祀)를 올리도록 하게 되었다. 인조왕 이후 계속해서 나라에서 치제(致祭)를 하였으니, 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숙종대(肅宗代)에는 남한산성 행궁(行宮)에서 몇 일을 묵고, 여주의 영릉(英陵)을 가다가 쌍령리에 다다르자, 왕이 말에서 내려 병자호란때에 전사한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간소한 제물(祭物)을 준비하게 하여 제(祭)를 올리고 간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정충묘의 제례는 국가차원에서 치제하였는데, 조선조(朝鮮朝) 말 고종(高宗)이 등극하고 흥선대원군이 집정(執政)하게 되면서, 전국의 서원(書院)을 철폐하고, 국제(國祭)를 폐지함으로서 나라에서 관장(管掌)하던 정충묘의 제사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 후 쌍령리의 동민들이 뜻을 모아 동리에서 주민들이 정성을 드려 매년 동리제사로 모셔왔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전부터 광주시에서 예산을 배정하여 지방정부 차원에서 제례를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금년부터 광주문화원에서 제례절차를 주관하고, 제수준비와 모든 절차, 제후 음복, 접대는 쌍령리에서 담당 하도록 하였다.
정충묘에 모셔진 4위의 행장
1. 허완(許完) 장군
본관은 양천(陽川), 字는 子固, 시호(諡號)는 충장(忠莊)이다. 25세 때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 휘하에 들어가 충무공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선전관 을 거쳐 유성룡의 천거로 남평현감이 되고, 선조37년에는 단천군수(端川郡守), 후에 훈련원 중군(中軍)이 되었다. 1604년(선조5) 경상우도병마절도사, 1629년 회령부사가 되어 국경수비를 담당,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충청도수군절도사, 1635(인조13년)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1636(인조14)년 병자호란때, 이곳 쌍령전투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패하여 많은 군사가 죽자 자결하였다.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2. 민영장군
본관은 여흥(驪興). 조선중기(朝鮮中期)의 무신(武臣)으로 의주부윤을 지내고, 1635년(인조13)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하였다. 병자호란때 과감히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인조(仁祖)를 구하기 위하여 남한산성으로 가다가 이곳 쌍령전투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전쟁 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되었다.
조선 영조때에 척화절인(斥和節人) 26인의 치제(致祭)를 건의 할 때 이에 뽑혔으며, 시호(諡號)를 충장(忠壯)이라고 내렸다.
3. 이의배(李義培) 장군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의백(宜伯),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1599년(선조32)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선전관, 감찰을 역임한 후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한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冊錄)되었고, 한천군(韓川君)에 봉해 졌다. 그는 인조4년 남한산성을 축조한 총융사 이서(李曙)의 매부이기도 하다. 그 후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1636년 병자호란때, 죽주산성에서 남한산성의 인조(仁祖)를 구하려 직접 가려고 하였으나, 광주의 쌍령에서 우리군사가 청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쌍령으로 군사를 이끌고 달려 오다가 적군과 마주쳐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 하였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이목(李穆)은 이괄(李适)의 난 때 순국 하였다. 그의 고향에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4. 선세강(宣世綱)장군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사거(士擧), 호는 매곡(梅곡)이며, 참의(參議) 봉장(鳳章)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36) 무과(武科)에 급제, 평안도 벽단진첨사(碧團鎭僉事)를 제수 받고, 그 뒤 경기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의 축조를 감독하였다. 당상관(堂上官)이 된 뒤 홍주영장(洪州營將), 안동영장(安東營將)을 역임하고, 병자호란때 허완장군과 함께 경기도 쌍령에서 우세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죽였으나, 끝내 패전, 장렬히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의 선조와 함께 전남 장흥의 포충사(褒忠祠)와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배향 되었다.
경상도 감사 심연(沈演)의 위패를 철거한 사유
심연(沈演)은 병자호란 당시 경상도 감사로 있으면서, 인조(仁祖)의 명을 받고도 속히 출정(出征)치 않아 전란(戰亂)중에 잡아다가 국문(鞠問)하라는 상소가 많았고, 나중에 여주에 이르렀다가 쌍령에서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군병(軍兵)을 조발한다는 핑계로, 되돌아 조령(鳥嶺)-문경새재 을 넘어갔다고 하여, 전쟁이 끝난 후 유배(流配)된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명백하며, 다른 곳으로 이배(移配)된 사실도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당시 쌍령전투에는 한푼의 공적도 없음이 밝혀져서 위패(位牌)를 철거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병자록(丙子錄), 남한지(南漢志), 남한일기(南漢日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