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0:1-29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욥이 대단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욥기 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상황이 이렇게까지 처참한데도 불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하나님을 보리라고 고백합니다. 이 정도라면 그 옆에서 욥의 고백을 듣고 있던 친구들의 반응이 지금처럼 이렇게, 야단치고 다그치고 회개하라고 할 게 아닙니다. ‘정말 대단하구나! 나도 저런 고백의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반응이 나와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합니다. 욥의 말을 듣고 있던 소발이 또 튀어나옵니다. 이전에 소발이 처음 등장할 때는 나름대로 진중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였고, 또 욥을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1-11)
(1-3)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듣자 듣자 하니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며 나선답니다. 소발은 확실한 흑백논리로 욥과 논쟁합니다. 자신이 옳고 욥이 틀렸던지, 욥이 옳고 자신이 잘못 되었던지, 그런데 확실한 건 자기가 무조건 옳답니다. 자기는 무조건 옳고, 욥은 틀렸고 악인이라는 논리입니다. 게다가 굉장히 교만합니다. 소발은 스스로 본인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은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슬기로운 마음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 생각이 옳고, 욥의 억울함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욥을 악인 중에 악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이 가득한 사람은 결코 누군가의 아픔을 헤아릴 수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상대의 아픔을 알려고 하는 마음조차 없습니다. 지금 욥이 얼마나 큰 낙심 가운데 있는지는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욥의 말로 인하여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책망을 들었다며 흥분해서 다그칩니다. 백번 양보해서 지금 욥만큼 아니 그 고통의 절반만큼이라도 눈물 날 사람이 욥의 친구들 중 그 누가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소발의 말은 이전에 친구들이 한 말과 비슷합니다. 계속 반복되고 있을 뿐입니다. 악인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멸망하여 비참한 신세로 전락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마침내 드러날 것이다. 다만 소발은 한 가지를 전제합니다.
(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악인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잘 되는 것 같고, 풍요로워 보인다고 할지라도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6-8)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과거에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자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걸 보아하니, 그게 참 부러웠나 봅니다. 그들이 보기에 욥이 번성하는 것이 배가 아팠던 것입니다. 이제 말하는 걸 보니 욥이 그렇게 잘 될 수 있었던 것이 악한 방법으로 인함임을 전제하여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늘까지 높아지고 구름까지 닿았던 악인의 영화로움이 마침내 똥처럼 망할 것이라며 경고합니다. 바로 욥에게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는 것도 한순간이며, 결국 순식간에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니 회개하라는 경고입니다.
(10-11) 그의 아들들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이젠 자식까지 건드립니다. 악인의 자녀들은 함께 고통당합니다. 악인이 불법으로 착취한 많은 재물은 사라지고, 그 아들들은 용서를 구하며 다닙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시며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시고 세상 질서를 회복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욥은 이미 자식들을 잃었습니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자식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은 정말 무서운 저주입니다. 기골이 장대하여 건강해 보이는 것 같아도, 갑자기 급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온 친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동방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자로 칭송 받았던 욥이었으나, 지금은 모든 걸 잃었습니다. 자식들도 다 잃었고, 온몸에 피부병으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습니다. 수많은 재산과 자녀들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친구들이 말하고 있는 악인의 결말이 정말 욥을 보고 하는 말입니까? 욥이 그렇게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겠습니까? 욥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친구들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단정 지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고, 악인을 무너뜨리는 분이시며, 질서를 바로잡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부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고, 그분의 섭리와 계획을 다 안다고 거침없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밝혀 주신 마음의 눈으로 말미암아 겸손하게 그 기업의 풍성함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악인이 받을 분깃이요(12-29)
이어서 소발은 음식을 먹는 일에 빗대어 악인의 패망을 묘사합니다.
(14-15)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악인이 이룩한 업적은 입에는 달지만 삼키면 죽는 독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악인이 착취한 재물을 마침내 모두 토해내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악인은 결국 독사에 독에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결말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악한 일을 당한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마침내 심판을 받고 선한 사람이 상을 받고 마침내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29)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
악인은 망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정하신 기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잘못 없이 고통 속에 몸부림 치고 있는 욥에게는 소발의 말이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소발과 같은 잘못을 범합니다. 자기는 옳고, 자기는 지혜롭고, 그래서 타인에게 때로는 상처를 주곤 합니다. 전쟁터에서 지휘관이 적군의 사정을 잘못 판단하게 된다면 휘하 군인들을 모조리 죽음으로 내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
전쟁에는 수많은 작은 전투와 그에 따른 여러 작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열 번 싸워 열 번을 모두 이길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길 때가 있으면 또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계에 실패하여 적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한순간에 모든 아군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기 때문에,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휘관이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생사의 기로에 설 수 있습니다.
소발은 잘못된 판단을 내렸습니다. 많이 성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급함 가운데 흥분하여 욥을 몰아 부칩니다. 그리고 욥을 향하여 악의적으로 판단합니다. 욥이 심중에 괴로움 때문에 울부짖고 있는데 그것을 모두 자신을 향한 비난으로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발은 너무나 교만하였습니다.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누가 감히 스스로를 지혜롭게 슬기롭게 여겨 상대를 야단치고 다그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며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기만 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서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는 성도들에게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니까, 내 말만 잘 들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밝혀 주신 마음의 눈으로 말미암아 겸손하게 함께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과 야망을 따라 살 때가 참 많았습니다. 소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욥을 향해 다그칩니다. 네가 바로 악인이라고, 그러니까 회개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밝혀진 주님의 사람이라면 겸손하게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리고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
악인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이것은 소발을 비롯한 그 친구들도 모두 알고 고백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욥은 소발을 비롯한 그 친구들이 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렇게 욥을 악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스스로 악인으로 만들 뿐입니다. 사람이 악과 불의함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그곳에 기쁨과 형통함과 온갖 좋은 것이 다 있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에는 그 어떤 만족과 기쁨도 없습니다. 잠시 잠깐 있는 것처럼 보이나, 아주 잠깐일 뿐입니다.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고백합니다. 욥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신 주님을 향한 창문을 활짝 열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오늘 이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악인의 결국은 패망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압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교만하지 않은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로는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를 넘어뜨릴 때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우리 자신을 깨뜨림으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신 주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잠시 잠깐에 행복에 유혹되지 않게 하여 주옵시고,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며 날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늘 이 하루의 삶 가운데도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소발은 왜 초조한 마음으로 조급하여 대답하였습니까?
2. 때로는 악인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 경건하지 못한 자가 즐거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결국은 어떻습니까?
3. 하나님은 악인이 삼킨 것을 마침내 어떻게 하십니까?
4.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창문을 여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작성: 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