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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강좌 |
진주소년운동 표지석 제막식 |
6월강좌 |
동학유적지 답사 |
5월강좌 - 진주소년운동 표지석 제막식
1. 행사개요
어린이날은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제정되었는데 이 천도교소년회가 가장 먼저 조직되고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곳이 진주였다. 경남 진주가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 진주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2010년 11월말 진주시의 예산지원을 받아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라는 표지석을 진주교육지원청 정원에 건립하였고, 2011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해 제막식을 거행하게 됨.
2. 사업추진현황
• 2007. 9. 30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이사장 리영달)에서 “진주소년운동 표지석” 추진위원회 구성
• 2008. 5. 5 진주소년운동발상지 학술대회개최(서경방송합동)
• 2010. 8 부지확정(진주교육지원청협조로 교육청 정원에 부지마련)
• 2010. 11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 표지석 건립
• 2011. 5. 5 표지석 제막식
3. 제막식 식순
• 개식, 국민의례, 내빈소개, 경과보고, 인사말씀(리영달 진주문화사랑모임 이사장), 축사(참석내빈), 비문해설(강동욱박사), 제막식, 폐회
4. 진주소년운동 기념비 제막식 관련하여 중앙총부 협조요청 사항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라는 기념비 제작과 제막식은 천도교진주시 교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야 했으나 진주시교구의 미약한 역량으로 주축이 되지 못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신 인내천강좌의 하나로 기념비 제막식에 진주인근의 천도교인들이 참석하여 기념비 제막을 축하하였으면 합니다. 아울러 진주시교구에서는 총부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건의드립니다.
•건의1 : 기념비 제막식을 주도한 ‘진주문화사랑모임’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감사패를 전달하였으면 합니다. (감사패 내용은 보시고 적당히 수정하셔도 됩니다)
감사패 1920년 강영호, 고경인, 강민호 등 진주지역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진주소년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진주소년회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시발점으로, 1921년 천도교소년회의 선구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념하고자 2011년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사단법인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라는 표지석을 세우게 된 것을 감사드리며 또한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 리영달 이사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들의 노고를 치하하오며 이에 천도교인들의 정성을 모아 감사패를 전달합니다. 포덕 152년(2011년) 5월 5일 천도교중앙총부 교령 임운길 심고 |
•건의2 : 이창번 종무원장님께서 직접 감사패 전달하고 축사를 통해 진주소년운동의 의의와 당시 진주 천도교의 역할을 강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3. 건의3 : 제막식관련 경비지원요청
감사패 제작 |
20만원 |
축하화분 전달 |
10만원 |
제막식 기념 다포 제작 |
45만원 |
합계 |
75만원 |
* 다포에 새겨지는 글귀 1. 해월신사 대인접물편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하느니라] 2. 1923년3월 어린이 창간호 [글방이나 강습소나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회합의 성질을 띄인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맨 처음이었습니다] |
진주소년운동기념 표지석 관련 첨부자료
1. 진주소년운동관련 기록정리
2. 진주소년운동 기념비 사진
6월강좌 - 동학유적지 답사
1. 일시 : 2011년 6월 5일(일)
2. 답사지역
전북 고창지역 동학유적지 답사
3. 답사 참가자
진주성활성화연구회, 진주참여연대, 진주성지킴이회, 진주 인근의 천도교인, 기타 개인 참가자 등 40명이내
4. 행사개요
전북 고창 지역의 동학유적지 답사를 통해 동학혁명의 전개과정을 이해하고 답사를 통해 진주성활성화연구회, 진주참여연대, 진주성지킴이회 등의 회원들과 진주 인근의 천도교인과의 기화를 도모한다.
한편 고창지역의 동학유적지는 ‘고창사람들’,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등 고창지역의 시민단체와 동학단체의 안내로 무장기포지, 전봉준생가, 고창읍성, 선운사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5. 일정
8:30 진주공설운동장 집결 9:00 진주출발 11:30고창도착 12:00 점심식사 오후1:00~4:00 고창지역 답사 4:00경 고창출발 6:00경 진주도착
6. 답사관련 예상경비
버스대절 |
50만원 |
중앙총부 지원요청 |
답사해설 안내비 |
20만원 | |
식사 및 간식 |
45만원 |
자체경비 |
답사 자료집 |
5만원 | |
합계 |
120만원 |
<<첨부자료>>
진주소년운동 관련 기록 정리
자료1 : 개벽』1921년 10월호
“벌써 연전의 일로 기억된다. 경상남도 진주 시내 소년들이 소년회를 조직하야…… 그 사실은 조선 소년으로서 자각의 첫소리가 되었다.”
자료2 : 『천도교회월보』 1922년 5월호
朝鮮에서 처음 듣는 어린이의 날 5月 1日의 天道敎少年會 創立記念日을 그대로 引用하여
“...금일의 소년문제는 실로 천하의 문제이며 소년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데 의하여 비로소 천지운절(天地隕絶)의 기를 보할 수 있다하는 것이 금일 식자배(識者輩)의 공통으로 떠드는 소리이외다....춘만건곤(春滿乾坤)에 복만가(福滿家)라. 우내(宇內)의 태운(泰運)이 청제(靑帝)의 수레를 타고 동출(東出)의 고국(故國)을 두루 찾을 때 그 태화(泰和)의 일지운(一技運)이 어리고 고운 소년의 사회에까지 핑돌게 되었습니다. 경남 진주의 소년들이 제일착으로 그의 대운에 참여하였으며, 천도교의 소년 남녀들이 연(連)하여서 새빨간 횃불을 들었습니다....”
자료3 : 『어린이』 1923년 3월(창간호)
“글방이나 강습소나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회합의 성질을 띄인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맨 처음이었습니다”
자료4 : <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자
“진주지방은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발을 든 곳인데, 오늘은 300명의 회원을 가진 천도교 소년회 주최로 오후 3시에 선언문을 돌리고 밤에는 기념강연을 한다더라”
자료5 : 한국 근대 소년운동 고찰
- 초기 천도교의 소년운동을 중심으로
------ (김정의, 한국사상 제21집, 한국사상연구회, 1989.12)160쪽~162쪽
(....)
(2) 소년운동의 효시
3·1운동을 계기로 실력양성운동이 거족적인 사회운동으로 대두되었고 이 운동의 한 갈래로 소년운동이 태동되기 시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년회의 효시는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안변소년회와 왜관소년회로부터 비롯되는 듯하다. 안변소년회에 대해 기록된 “기미년에 창립한 바 당시 15, 6세 전후의 소년들이 창립한 것인 바, 전조선을 통하여 가장 솔선하여 조직되엇슨죽 이 일만 하여도 큰 자랑거리라 하겠다.”라는 기사와 왜관소년회에 대하여 기록된 “1919에 왜관소년회를 처음 조직하고 수백명 회원이 맹렬히 노력...”이라는 순회탐당란의 기사가 각각 입중해 주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지 창간호에는 “글방이나 강습소나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회합의 성질을 띤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맨 처음이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고, 또 윤석중도 “천도교소년회가 생기기 전에 경상도 진주, 평안도 안변, 전라도 광주에도 소년회가 생겼으나 ...”라고 진주소년회를 안변소년회 앞에 기술함으로써 진주소년회가 효시인 듯이 언급하고 있지만 어느 것이 효시인지 분간키 어렵다.
다만 소년운동계이 큰 자각을 불러 일어키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1920)가 그 효시가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개벽>지의 기록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벌써 년전의 일로 기억된다. 경상남도 진주시내의 소년들이 소년회를 조직하여 그 하는 일이 매우 재미스럽던 중 그만 중도에 만세운동을 일으킨 탓으로 그 간부는 일체로 검거되고 그 회는 해산되었다. 이 사실은 당시 신문지상으로 누차 보도된 바 생각하면 일반의 기억이 오히려 새로울 것이다.
말하면 그 소년회가 우리 사회에 나타나자 곧 없어진 것은 마치 우담화가 잠간 웃다가 곧 슬어짐과 한가지이었다. 그러나 소년회! 라 하는 그 곱고 아름다운 이름은 영원히 우리들 기억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소년회를 조직하였었다! 하는 그 사실은 조선소년으로서 자각이 첫소리가 되었다.
반듯이 그 소년회의 울림에 응하여서 그리된 것은 아니겠지마는 조선소년들은 작년이래로 자각의 정도가 훨씬 나위여서 혹은 단, 혹은 구락부, 혹은 계의 명칭 등으로써 기다의 소년집회가 다수 지역에서 일어남을 보게 되었으며 소년 즉 아동의 일이라 하면 눈도 거듭떠 보지 아니하던 우리 어른들 사회에서도 이 소년들의 놀음을 얼마큼 흥미있게 관찰케 되었다. ....
소년들이 스스로 각오하여 분발하여 건전한 소년이 되겠다 하며 건전한 소년이 될 일을 한다 하도다.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이며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뜻이 있는 어른이어든 한번 그들을 향하여 만폭의 동정을 기울여 가하며 이를 동기로 하여 써 우리 어른 사회에서는 다투어 소년문제를 연구하며 소년에 대한 시설을 행함이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진주소년회의 조직과 활동은 특히 이들의 만세음모사건에 대한 관련기사가 신문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을 계기로 하여 국권침탈기에 전개된 각종 소년운동 발생의 촉매제 역할을 하였음이 자명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3)천도교소년회의 부상
진주소년회의 조직과 활동이 도화선이 되어 소년운동다운 운동이 처음으로 고동치기 시작한 것은 천도교소년회(1921)의 탄생에서부터라고 보여진다. (....)
첫댓글 심국보동덕님의 순일한 정성에 뜨거운 감사올립니다. 부암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