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달산 달마사
팔만장경 속 지혜 퍼 담아 세상에 전하는 법기되리
일제강점기 만공 스님 주석
호산 스님 부임 후 중창불사
매년 민주열사 천도재 봉행
대장경 전산화 출판본 소장
“천년 지혜 21세기 전하는
아름다운 장경도량 될 것”
▲서울 흑석동 서달산에 위치한 달마사는 남산을 마주 보고 한강을 굽어 본다.
도심사찰로서는 보기 드문 풍광을 지녔다.
달마사는 서울 동작구 서달산 중턱에 있다.
이름을 듣고 얼핏 달마대사를 떠올리겠지만 대사의 어떤 그림자도 깃들이지 않았다.
다르마(dharma)에서 비롯했으니 법과 진리를 붙들려고 했을 것이다.
1931년 유심 스님이 창건했고, 한 때 만공 큰 스님이 주석했다.
일제 강점기에 왜 이곳에 절을 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만공 스님의 상좌였던 유심 스님이 금강산에서 선몽하고 절을 지었다고만 전해진다.
만공 스님이 직접 절 이름을 짓고 이를 다시 써서 편액을 내렸다.
호방한 기질의 만공 스님은 이곳에서 한강을 굽어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를 앗기고 불교는 왜색에 물들어 갔으니 간밤에 생긴 수심을 아침마다 강물에 던졌을 것이다,
삼성각 위로 거북을 닮은 두 개의 바위가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거북바위는 일 년에 두 번 한강에 내려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올라온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 그 아래에는 차가운 물이 솟는 영천이 있다.
영천은 옛날 용왕제를 지냈던 곳이었고, 지금도 용왕상을 모셔놓았다.
거북바위 아래 삼성각과 영천 주변이 영험한 기도처이다.
용왕에게 빌었던 백성들의 기도와 소원이 쌓이면
거북바위가 이를 등에 지고 한강으로 내려가 용왕에게 전달하고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거북 바위 주변은 무속인들의 굿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일대가 범상치 않다. 인근 사당동에는 이름 그대로 사당이 많았고,
상도동은 상여가 넘어오던 길이었다. 명당이라는 국립 현충원과도 맞닿아 있다.
현충원은 달마사 창건 후 한참 후에,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일 년에 두 번 한강으로 내려간다는 전설을 간직한 거북바위.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문루가 나타난다.
경내에 들어서니 가는 비가 잔설을 부수고 있었다.
겨울임에도 달마사는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정겨웠다.
그을린 커다란 굴뚝에서는 금방이라도 연기가 피어오를 것만 같다.
경내 어디를 봐도 허투른 구석이 없다. 아직 불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달마사는 예뻤다.
산 중턱에 누가 이런 불사를 일으켰을까. 바로 주지 호산 스님이었다.
‘절이 사람을 찾아가야지, 절이 사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사람을 찾아가는 절, 그것은 절에 사람을 오게 하는 것이었다.
곧 가고 싶은 마음을 사는 일이었다.
호산 스님은 은사인 종림 스님이 회주로 있는 달마사에 드문드문 올랐다.
그 때마다 느낌이 좋았다. 스님은 천천히 주변 경관을 살폈다.
멀리 한강도 남산도 보였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이런 절이 있구나.’
2003년 종림 스님이 불쑥 주지를 맡으라고 했다.
대뜸 달마사 전경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대웅전과 삼성각만 서 있었다.
호산 스님은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얼마든지 스님의 구상대로 새로운 사찰을 조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마사를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했다.
백지에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밤마다 짓고 부수고 다시 지었다.
그때부터 불사가 시작되었다. 누구도 스님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인연을 더듬어 누구든 만났다.
날마다 설랬지만 또 날마다 좌절했다. 다행히 부처가 계셨다.
하나하나 정성을 다했고 부처님의 답이 있었다.
바위는 산에서 굴러 내려가야 함에도 바위가 서달산 중턱으로 올라왔다.
트럭이 백번도 넘게 돌을 날랐다. 돌을 쌓고 돌 위에 ‘세월’을 입혔다.
비로소 바위는 제 자리를 잡고 숨을 죽였다.
온갖 나무와 꽃을 심었다. 한그루 한그루마다 임무를 부여했다.
너는 봄을 불러와라, 너는 가을 끝을 장식하라,
너는 햇살이 고우면 향기를 날려라….
문루 옆에 서있는 키 큰 소나무는 비스듬히 심었다.
그렇게 해서 지는 해가 소나무 끝에 걸리도록 만들었다.
맘에 드는 것들은 모두 경내로 끌어들였다.
한번은 속가 친구 집에 들렸다가 그 집 수석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봉안당을 지키는 소나무 곁에 두면 좋을 것 같았다. 애걸하고 위협했다.
결국 친구는 두 손을 들었다. 기어이 수석을 모셔와 소나무 곁에 두었다.
그렇게 해서 200살도 더 먹은 소나무는 봉안당을,
그보다 훨씬 오래된 수석은 소나무를 지키고 있다.
언제부턴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했다.
“절이 예쁘네.”
호산 스님은 주지로 부임한 후 해마다 민주열사 합동천도재를 봉행했다.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생애를 바친 이들을 기리는 일은
산 사람들의 당연한 몫이라고 생각했다.
국내 최초로 전통사찰 내에 봉안당을 공식 인가받고
불교계 민주인사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현충원에 맞닿아 있는 달마사의 이러한 노력은 상징적이다.
“호국영령은 현충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스님의 말이 마음에 닿는다. 현충원에 묻힌 사람들만이 애국애족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모든 인연들이 얽혀있다.
모든 인연이 화엄의 바다에 있을 진대 어찌 나만, 우리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산하에 수많은 절들이 점점이 박혀있지만 민주인사를 모신 공간은 없다.
▲달마사의 옛 대웅전. 걸려있는 편액은 만공 스님의 글씨다.
달마사는 ‘장경(藏經) 도량’이다. 처음 들으면 생경하다.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완성한 고려대장경 전산화본의 출판본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필사본,
지리산 화엄사에 파편조각으로 남아있는 신라화엄석경,
좀먹고 찢긴 서책, 그을린 목판본,
해외에서 찾은 초조대장경 탁본 등을 판독하여 사이버 공간에 담아놓았다.
524종의 경전이 들어있는, 16만 2516매의 ‘디지털 대장경’이다.
거대한 불사, 그 중심에 달마사 회주 종림 스님이 있다.
종림 스님은 80년대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이라는 책을 읽고 미래세계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해인사 도서관장을 할 때였다.
인간이 발명한 컴퓨터를 통해 인류가 일대 혁명기를 맞을 것이라는 내용에 공감했다.
따져볼수록 전혀 다른 미래가 다가오고 있었다.
스님은 격변의 시대에 진리는 무엇이고,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을 거듭했다.
문득 고려대장경이 떠올랐다. 세상은 변해도 불변의 진리는 그 속에 있었다.
자신이 할 일도 생겨났다.
그것은 거대한 창고인 사이버 공간에 지혜와 진리를 저장하는 것이었다.
고려대장경의 전산화였다.
석가모니의 제자 아난이 부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었다면,
고려대장경은 목판에 이를 새겼다.
아난의 뇌는 부처 말씀만 기억했지만
고려대장경은 부처를 섬겼던 당대의 모든 것을 담았다.
그래서 불교경전 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역사, 설화
심지어 이교도의 성전까지 들어있었다.
도구가 마땅찮아서 활용을 안했을 뿐이지 당대의 포탈사이트였던 셈이다.
초조대장경에 이어 교장(속장경)을 완성한 대각국사 의천은
대장경 편찬을 ‘천년의 지혜를 정리해서 천년의 미래로 전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사의 눈은 미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종림 스님은 사이버공간에 ‘천년의 지혜’를 저장하기로 했다.
티끌 속에 우주가 들어있었다(一微塵中含十方). 불교의 가르침인 연기적 세계관,
즉 모든 것들이 그물과 그물코로 연결되어있는
인드라망 사상은 인터넷 구조와 닮아있었다.
컴퓨터를 배우고, 자신이 거처하는 토굴을 팔아서 컴퓨터 두 대를 구입했다.
초기 8비트 컴퓨터였다. 그 속으로 대장경을 옮겨 날랐다.
태산을 옮기는 것처럼 힘든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할수록 빛이 났다.
오윤희 씨는 ‘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불광출판사)에서
작업의 어려움과 전산화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선재동자가 이 사람 저사람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듯,
그저 정처 없이 가르침과 경험을 구하러 다니는 일 뿐이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대장경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매체, 새로운 그릇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들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면서 늘 느끼던 ‘감정’이 있었다.
이 일은 ‘파장(破藏)’, 곧 ‘그릇을 깨는 일’이었다.
그 사이 2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이천오백 년 불전의 역사에서 말 그대로 경천동지할 대혁신이 벌어졌다.
이제까지의 성과들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다시 불전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째야 하나. 해답은 분명해 보인다. 이전의 그릇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달마사 구석 구석에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가득하다.
달마사는 이런 대불사의 결정체를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릇이 일상으로 깨지는 ‘파장의 시대에’
지금의 ‘유일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장경 속의 법과 지혜를 사부대중에게 나눠주기 위해서는
‘그릇을 깨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을 찾아가는 사찰로 열려있어야 가능하다.
호산 스님이 만들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절’도 결국은 ‘그릇 깨기’ 일 것이다.
절이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면
사람을 부르기(찾아가기) 위해 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누리꾼을 맞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를 예쁘게 꾸미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장경을 보관하는 거대한 장경각이 없어도 지난 천년의 법과 지혜가 우러나올 수 있다.
‘장경도량’을 앞세운 달마사는 지금 진화중이다.
일 년이 아닌 하루에 두 번씩
거북바위가 ‘디지털 대장경’을 정보의 바다로 실어 나르고 있다.
보이지 않지만 설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2013. 01. 29
김택근 기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