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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外道)가 불도(佛道)가 되는 순간 - 번외편
- 魂魄과 有身, 陰陽
‘魂魄’의 어원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魂飛魄散’이라는 잘 알려진 단어는 참으로 ‘혼’과 ‘백’에 대한 설명을 잘 하고 있다 여깁니다.
‘혼이 날라가고 백이 흩어진다’
왜 혼은 하늘로 날라가고 백은 흩어질까를 ‘陰陽論’을 가져와 설명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또한 사실이 그렇기도 하구요. ‘육신’과 ‘혼백’의 관계를 음양으로 따지면 ‘육신’이 ‘음(-)’이고 ‘혼백’이 ‘양(+)’이겠지요. ‘음양’은 상대적이라 또다시 ‘혼’과 ‘백’의 관계로 들어오면 ‘혼’이 ‘양(+)’이고 ‘백’이 ‘음(-)’ 입니다. 그러하기에 죽음의 순간에, ‘혼’과 ‘백’과 ‘육신’이 분리되는 순간이 오면, 눈앞이 깜깜해지고 팔다리가 천근만근이 되어 중력이 1G에서 2G 혹은 3,4,5....G까지 치솟으며 ‘음’인 땅으로 무너져 내릴 준비로 제일 바빠지는 것이 ‘육신’ 입니다. 동기상응. 유유상종.
이렇게 더이상 회생할 수 없을 것 같은 ‘육신’을 바라보며 ‘혼백’은 떠날 채비를 하는가 하면 혹은 미련이 남아 슬퍼하고 집착이 더욱 승하기도 할 겁니다. 갈림길이라면 갈림길이지요. 이 과정에서 ‘백’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백’은 강한 양인 ‘혼’과 강한 음인 ‘육신’ 사이에서 아교 역할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보통은 이 ‘백’이 ‘육신’을 벗어나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아야 정상인 것이겠지요.
그런데 죽음의 순간이나 혼절의 순간과 같은 긴박한 순간에는 그동안 닦아놓은 ‘백(=의성신:의)’이 중요한 것입니다. 생전에 별 생각 없이 공부없이 살았다면 이 순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잘 닦아놓고 설득이 잘 되어진 ‘백(=의성신:의)’은 그렇게 당황하지 않고 편안한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자신이 흩어지는 길이라도 말입니다. 말이 쉽지 자기파멸의 길을 웃음 한 번에 가는 것이 쉽겠습니까?
공부가 되어있지 않은 ‘백’은 ‘혼’과는 달리 ‘육신’에 대한 집착이 상당하고 개체로서의 성질도 강합니다. 그래서 ‘육신’이 송장이 되어도 일정 기간 흩어지지 않고 머물기도 한다고 봅니다. 물론 집착의 정도에 따라 그 기간에 차이를 보이겠지요. 그러나 보통은 대동소이할 거라고 봅니다. 이 기간 동안 ‘백’이 집착을 놓고 홀가분하게 흩어질 수 있도록 ‘천도재’도 지내주는 거겠지요. 물론 정상적인 경우라면 ‘혼’이 뜨면 ‘백’도 바로 흩어지는 수순이 맞겠습니다.
어떠한 사정으로 다 흩어지지 못한 ‘백’은 생전의 개체에 대한 정보를 디테일하게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마저도 흩어짐이 진행되고 있는 중일 거구요. ‘무당’이 접신을 하여 들려주는 ‘백’의 말들은 그렇게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제한된 정보가 대부분이지요. ‘배가 고프다. 춥다. 원망스럽다. 슬프다. 분노한다.’ 정도이지 일련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며 상황의 배경이나 감정의 근거를 밝히는 경우는 없다시피 합니다. 꼭 접신이 아니더라도 같은 곳을 같은 행동으로 계속 맴돈다거나 무의미하게 같은 말을 계속 한다든가 하는 존재도 있겠지요.
‘백’과 달리 ‘혼’은 본래 개체성이나 집착이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이 또한 생전에 잘 닦여진 ‘혼(=상성신?:심)’이라면 더욱더 개체성이나 집착이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혼’을 ‘심’과 대응시키는 것은 무리가 없고 자연스럽다고 여깁니다만, ‘상성신’과 ‘혼(=심)’을 대응시키는 것은 약간의 버퍼가 있습니다. {혼과 백}의 관계 혹은 {심과 의}의 관계에서 ‘혼’이 ‘백’으로부터 벗어나고, ‘심’이 ‘의’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상성신’이 개입되는 것이 무언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백번 양보를 해서 ‘想成-‘까지는 받아들여본다 하더라도 (상성-)‘身’이라는 글자가 붙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심’이 ‘의’와 관계를 풀어헤치려는 상황에서 ‘身’이라는 경계를 잡는다는 것이 잡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어려운 지경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두드러지게 개입되는 것이 ‘觸滅’이기 때문입니다. 마찰 zero, 저항 zero.
魂 - 想成:身(갈림길) - 無色界 - 心 차원 - 이것은 내 자아이다
魄 - 意成:身(갈림길) - 色界 - 意 차원 - 이것은 나이다
體 - 거친:身 - 慾界 - 識 차원 - 이것은 나의 것이다
보기 좋게 나열한 도식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제일 의문시 하는 곳이 想成身 입니다. ‘意’成身은 ‘의’ 차원과 글자도 그대로 담고 있고 매칭도 잘 되는데, ‘想’成身은 ‘心’과 ‘想’을 연결지어 생각해보고’心’을 ‘身’과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위 도식이 깔끔한 것인데요. 아는 것이 적어 연결고리를 모르겠습니다. 이를 피해 가기 위한 ‘糊口之策’으로 만들어 본 미친 논리가 있습니다. 바로 위 도식의 ‘:(콜론)’입니다.
魂/魄/體의 체계는 ‘유교’의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想成:身/意成:身/거친:身의 체계는 ‘불교’의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두 체계는 같은 것을 지칭하고 있다고 여깁니다만, 그래도 ‘불교’의 체계가 보다 정확하고 세밀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갈림길’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의 체계는 魂/魄/體 각각을 대개의 상식이 그러하듯 ‘결과물’의 측면만을 고려했다면, ‘불교’의 체계는 심/의/식 차원 각각에서(식 차원은 빠졌지만...) 또다시 ‘원인과 조건과 순서’의 측면인 ‘成’에 방점을 찍느냐, ‘결과물’의 측면인 ‘身’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觸滅’로 향할 것인지 ‘觸集’으로 향할 것인지 ‘갈림길’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점의 분기를 위해 ‘:(콜론)’을 표기해 봤습니다. 이렇게 ‘무색계’와 ‘색계’의 공통인 ‘成:身’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想과 心}의 연결고리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피해 갔습니다.
한 가지 남겨둔 의문은 ‘12연기’ 지분에서 ‘색수( )행식’ 지분은 다 언급되는데 왜 ‘想’은 언급되지 않는가? 혹시 이것과 관련이 있나? 하는 것입니다. 좀더 지켜봐야지요. 도리 있나요.
‘身’ 이야기를 하면 으레 함께 이야기 되어야 할 것이 ‘界’ 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간다고 여기는 이 시공간-우주에 대해서도 陰陽은 그럴듯한 설명력을 제공합니다. ‘아위자’님의 아래 댓글을 다시 陰陽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공간은 <色이 '결핍'돤 마이너스 '色'>
2. <色의 변화[=시간과 공간]>가 있는 것. 말하자면....... 에너지와 마이너스 에너지가 있는 것을 가지고 ........
(1) 공간 = (-)물질
(2) 에너지 = (-)물질, (-)에너지 = 물질
곱으로 정의된 물리학 공식을 (+)/(-)로 표현하는 ‘아위자’님의 서술을 보고 새삼 놀라웠고, (*)/(/)을 (+)/(-)로 치환하는 수학적 기술 방식이 있음을 아는 ‘새벽’은 여기서 또한번 ‘陰陽’을 써먹을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제가 이것은 [시공간]의 단일성과 [E = MC^2]의 상보성 공식을 합쳐서 나온 댓글이라고 하였습니다. 상보성은 ‘질량 보존의 법칙’과 C(광속)이 일정하기 때문에 가능한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입니다. 시간과 공간 간의 변역 또한 시간 딱 공간 딱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시공간이기에 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주는 공간적으로 ‘팽창하는’ 우주이며 시간은 점점 느리게 흐르는 수순을 밟고 있다는 과학적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빅뱅’으로 다가갈 수록 공간은 줄어들고 시간을 빠르게, 손목에 찬 시계가 ‘팽팽팽팽~~’ 돌아간다고 하지요. 이를 식으로 옮겨보면 아래 정도 아니겠습니까?
에너지와 물질의 상보성 : 에너지 = (-)물질
시공간의 변역 : 시간 = (-)공간
이 두 식을 다시 ‘짬뽕’해 보겠습니다. 두 식을 합치기 위해 한 가지 아이디어가 더 필요합니다. 바로 {물질과 공간}의 관계 설정입니다. {물질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아위자’님의 표현이 ‘공간은 <色이 '결핍'돤 마이너스 '色'>’인 것 같습니다. 즉 ‘(1) 공간 = (-)물질’ 이라는 말인데요. 여기서 저는 ‘공간 = 물질’이라는 관계를 제시해 봅니다. 물질과 공간은 함께 생긴 것이며 물질이 배타적으로 공유하는 공간 또한 공간이기는 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3)식을 함께 써 보겠습니다.
(1) 에너지 = (-)물질
(2) 시간 = (-)공간
(3) (-)물질 = (-)공간
이제 (3)번 식을 이용해서 (1)번 식과 (2)번 식을 ‘짬뽕’해 보면 {에너지와 시간}의 관계가 나옵니다. ‘에너지 = 시간, (+)에너지 = (+)시간, (-)에너지 = (-)시간’ 이라는 정(正)의 관계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제가 되도 안한 끼워 맞추기식 SF 소설을 무리하게 지어내는 이유는 바로 ‘시간과 에너지의 정의 관계’ 때문입니다. 이를 다시 陰陽으로 이어보려는 시도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명제를 도입합니다.
‘有身’의 상태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다르다.
시간의 속도가 ‘상성신’일 때 제일 빠르고, ‘의성신’일 때 그 다음으로 빠르고, ‘거친신’일 때가 제일 느리게 흐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좌-수행’을 조금만 해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5분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두세시간이 지나 있었다’ 와 같은 이야기는 숱하게 들어보았지 싶습니다. 선정을 ‘의성신’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면 ‘거친 신’ 상태보다 ‘의성신’ 상태에서 느끼는 시간의 속도가 훨씬 빠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몸이 가볍다거나 사라진 것(물질(-)) 같다고도 하지요. 믿거나 말거나~ 동의하거나 말거나~ ㅎㅎㅎㅎㅎㅎㅎ
여기서 멈추면 안 되죠. 한 걸음 더 뻗어 보겠습니다. {시간과 에너지}의 관계를 말하다가 갑자기 {시간과 有身}의 관계가 툭 튀어 나왔습니다. 그럼 필연적으로 {에너지와 有身}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자~ 이제 소설의 막바지에 다달았습니다. ‘에너지(+)/물질(-)’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有身과 魂魄}의 대응을 염두에 두고 ‘음양’을 고려하면 {有身과 에너지}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상성신’으로 갈수록 ‘에너지(+)(=물질(-))’이며 ‘시간(+)(=공간(-))’이 빠르게 흐르는 상태이고, ‘거친 신’으로 갈수록 ‘에너지(-)(=물질(+))’이며 ‘시간(-)(=공간(+))’이 천천히 흐르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有身과 에너지}의 관계에서 에너지의 陰陽은 어떻게 따지냐? ‘파동’으로 따집니다. ‘파동’에는 파장이 긴 ‘長波’가 있고 파장이 짧은 ‘短波’가 있습니다. 파장이 짧고 진동수가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파장이 길고 진동수가 낮을수록 상대적으로 ‘약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합니다. ‘파동체’에도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하였듯 이는 ‘파동’이 담은 에너지 또한 층계가 다양함을 뜻하며 그들 간에는 ‘강약’의 관계가 설정됨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무색계와 색계의 존재들은 우리같은 욕계 중생들이 누구나 (공식적으로는) 누리는 ‘자유와 평등’이 무언지 모르고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위계질서가 상대적인 에너지의 ‘강약’으로 낙인 찍혀 있을 것이기에. 그런 면이 좋아서 자꾸 ‘욕계’에 드는 것인지 ㅎㅎㅎㅎㅎㅎㅎ
첫댓글 이제 진짜 끝. ㅎ
想은 명색의 명(수’상’사촉작의)로서 12연기 명색 지분에 들어가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