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주지 무공 스님
만암· 서옹 스님 선기 서린 ‘고불총림 자긍심’ 굳건히 세워갈 터!
쌀 두되로 산 ‘세계위인전집’ 싯다르타 구도여정 큰 감동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장래희망은 늘 ‘스님’
지인 죽음, ‘난 어디서 왔나?’ 고1 때 지근 스님 은사로 출가
‘부모미생전’ 들자 ‘성성적적’ 법열 밀려오며 환희에 차
고불선원, 동안거 목표 개원, 운문암 칠성전 복원도 박차
근현대 백양사 가풍 정초한 만암 스님 선양사업에 방점
총림품격 지키고 더해 가면 ‘재 인가’ 되리라 ‘확신’
“은퇴자 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 그려가는 일”
백양사 주지 무공 스님은 “우리 사중은 총림의 자부심을 품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 자긍심을 잃지 않을 것”이라며 “총림으로서의 품격을 더해 가는
한 ‘고불총림 인가’는 다시 이뤄지리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하얀 암석 덩어리 하나 자체가 산으로 우뚝 서 있는
백암산(白巖山) 백학봉(白鶴峰)은 압도적이다.
산 아래 펼쳐진 산사와 쌍계루,
계곡과 숲이 어우러지며 계절마다 빚어내는 풍광 또한 절경이다.
하여 옛 시인들도 ‘백암의 풍경은 그림으로도 그리기 어렵다’며
‘천인(天人)의 솜씨’라 감탄했고, ‘남녘에서 또 다시 금강산을 구경한다’며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렀다.
계절마다 묘경이 펼쳐지는 백양사 쌍계루의 여름 전경.
특히 물 위에 떠 있는 백학봉을 품은 쌍계루(雙溪樓)가 자아내는 운치는
‘백암 12경’ 중에서도 묘경(妙境)으로 꼽힌다.
그 풍취에 한 번만이라도 젖어 본 사람들은 안다.
‘금강산에서도 이런 누각 오르지 못한다’는 말이 왜 회자되고 있는지 말이다.
쌍계루 떠난 물은 일광정(日光亭) 옆 호수에 잠시 머무르고는
이내 절 아랫마을로 난 시내를 따라 내려간다.
1977년 늦여름, 한 고등학생이 그 물에 몸을 씻고 있었다.
화순의 한 작은 초등학교 도서관 책을 죄다 독파해 가는
아들이 6학년이 되자 어머니는 보물 하나를 안겼다.
엿장수에게 보리쌀 두 되 주고 산 5권짜리 ‘세계위인전집’이다.
호롱불 아래 펼쳐진 다섯 성현들의 삶은 흥미진진했다.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그리고 석가모니!
왕궁을 떠난 싯다르타가 자신과의 치열한 사투를 벌여가며 깨달음에 이르는
그 숭고한 여정이 소년의 가슴에 파문을 남겼다.
“저는 크면 스님 될 겁니다!”
설마 했던 것일까?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네 인생 네가 사는데 누가 뭐라 하냐?”
그때부터 장래희망을 묻는 설문지 받아들면
어김없이 ‘스님’이란 두 글자를 꾹꾹 눌러 적어 넣었다.
화순에서 나와 광주에서 유학했다.
‘푸른 꿈’ 키워가야 할 중·고등학교 시절 마주한 건 ‘죽음’이었다.
오랫동안 사귄 친구가 병을 얻더니 이내 세상을 떠났다.
어제까지 함께 놀던 친구가 한순간에 사라진 현실은 충격을 넘어 공포로 엄습해 왔다.
나무에 올라간 아이가 떨어져 급사하고, 출산하던 이웃 새댁도 생을 마감했다.
지인의 죽음을 지켜본 것만도 일곱 번이다.
벽에 기대 앉아 반대편 벽을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지금의 나 이전엔 무엇이었을까?’
도서관의 장서 속에서 그 답을 캐어내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다. 통학버스가 고장 나 걸어가는데
등교하던 학생들이 철로 주변에 몰려서는 웅성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졌다. 급히 수습한 시신 옆에는
분홍색 슬리퍼 한 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삶이 고단했구나!’
보름 동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제대로 먹을 수도, 잠에 들 수도 없었다.
피폐해진 심신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애지중지하던 책들을 모두 문 밖으로 내놓고,
유년의 사진마저도 찢어버렸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오늘, 출가합니다!”
한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던 어머니가 500원을 건네며 말했다.
“우리 집 대문은 항상 열려 있다.”
평소 흠모해 왔던 상인 스님이 머무는 광주 관음사에 들어섰다.
“어디로 가야합니까?”
“백양사로 가거라!”
장성행 마지막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으니 절에서 하룻밤 묵어야 했다.
은행나무 아래서 비질을 하는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찾아왔다.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걷자 가로등 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춘 아버지가 세 번을 물었다.
“꼭, 가야겠느냐? 정말 가야겠느냐? 정말로 가야겠느냐?”
“예!”
“그래. 그럼 가거라!”
처음 보았다. 아버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복받친 슬픔에 페달을 밟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자전거를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날, 아버지와 아들은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냈을 것이다.
중국 도안(道安) 스님의 일언이라도 전해 들었다면 위로가 되었을까.
‘어버이와 이별하는 날 비 오듯 눈물 떨어진다.
애정 끊어내고 불도(佛道) 받드니 그 의지는 하늘에 넘쳐났다!’
(辭親之日 上下涕零 割愛崇道 意凌太淸)
산문에 들어서기 직전 걸음을 멈췄다.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근 채 얼굴을 깨끗이 씻었다.
‘다시는 세속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세간의 티끌 한 점까지도 완전히 털어내려는 나름의 ‘작은 의식’이었을 터다.
은사는 지근 스님과 맺어졌다.
은사인연은 당시 20대 후반의 지근(知根) 스님과 맺어졌다.
“공양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면 은사 스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행자님 밥 좀 줘요!’하며 짓는 너털웃음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미계 받기 전에 ‘제자로 받아 주십사’ 청하니 ‘난 많이 부족하다’하셨습니다.
당돌하게도 ‘스님밖에 안 보입니다!’하니 ‘그래!’ 하시며 승낙하셨습니다.”
지근 스님은 세납 41세에 입적했기에 아쉽게도 사제인연은 10여년 밖에 맺지 못했다.
은사가 남긴 가르침 올곧이 받들고자 부도를 세웠다.
그 불사금 마련하느라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나무를 실어 나르는 상선인
원목선에 승선해 6개월 동안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88 서울 올림픽’이 한창이었던 그해였는데 놀랍게도 바다 위에서 새로운 화두와 직면했다.
“항구에 도착하면 모든 선원들은 저잣거리로 나갔지만
저는 승려였으니 딱히 갈 곳도 없었습니다.
배에 남아 비치된 책들을 한 권씩 골라 읽는 재미로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이종익 선생의 ‘서산대사’를 읽어내려 가는데,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에 그대로 꽂혔습니다.
그 후로는 7년 동안 참구해온 ‘구자무불성(拘子無佛性)’을 드는데
‘부모미생전’이 치고 들어왔습니다.”
번뇌와 화두와의 시시각각 날선 겨룸도 버거웠을 터인데,
화두와 화두가 충돌했으니 그 곤혹스러움이란!
불국선원 조실 월산 스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89년 동안거 때 불국선원에 입방했습니다.
조실이셨던 월산 큰스님에게 이 문제를 털어놓았습니다.
‘인연 화두라는 게 있네. 구자무불성은 잠깐 쉬고 부모미생전을 들어 보게.’
그때 보이신 월산 스님의 미소가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월산 스님에게 인사올리고 조실채를 나서며
‘새 화두 참구해도 된다’는 안도감 속에 ‘부모미생전’을 들었다.
순간, 모든 망상이 끊어지고 화두만이 별처럼 또렷이 빛났다.
“그 이전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법열이 밀려왔습니다. 환희에 찬 순간이었습니다.”
사중의 중요한 일은 종무회의를 통해 논의한 후 결정하는데
어른 스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된 원로운영위원회의에 꼭 보고하고 고견을 청한다.
두 기구의 합의로 도출된 중대불사 하나가 근현대의 백양사 사격과 가풍을
정초한 만암종헌(曼庵宗憲·1875∼1957) 스님 선양사업이다.
“큰스님께서 주지를 맡았던
1916년 때만 해도 번듯한 전각이라고는 극락전 하나였습니다.
10년의 대작불사를 거쳐 ‘승속간의 누가 와서 보아도
환희심이 날만한 대가람’으로 변모시키셨습니다.
고불선원과 근대 승려교육기관인 광성의숙(廣城義塾)을 세우신 분도 만암 큰스님이십니다.
학계와 교계에 퍼져 있는 자료들을 집대성하고 있습니다.
학술회의를 열어 큰스님의 족적을 집중 조명하고
일대기와 관련된 영상제작과 평전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백양사 강원을 졸업한 이후 불국선원, 운문암, 불갑사, 대흥사 등의
제방선원에서만 정진해 온 무공(無空) 스님이다.
그래서인지 그 누구보다 닫혀 있는 고불선원을 안타까워했다.
“제가 출가했을 때만 해도 새벽·저녁예불 시간은 각각 두 시간이었습니다.
1시간의 예불을 마치면 모두 방석 위에 앉아 1시간 동안 정진했습니다.
깨달음을 향한 구도심을 한시도 놓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암(曼庵), 서옹(西翁) 큰스님이 증명해 보이셨듯이 대선지식 한 분이 출현하면
수행가풍은 물론 포교판도까지 일신합니다.
‘닭이 천 마리면 봉황 한 마리 나온다’고 했습니다.
수좌 한 명만 있어도 전력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닫혀있던 선원이기에 보수작업은 필연입니다.
코로나19 여파로 절 살림이 어렵기는 하지만
예산을 투입해 올해 동안거에 맞춰 개원하려 합니다.”
운문암(雲門庵) 칠성전 복원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고려시대의 각진·진묵대사를 필두로 소요, 용성, 만암, 전강, 금타, 서옹 스님 등
당대의 대표 선지식의 숨결이 배인 암자입니다.
예로부터 ‘운문암 대중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건 칠성전(七星殿) 덕’이라 했습니다.
‘칠성각’이 아니라 ‘칠성전’이라 칭했다는 건 기도영험이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새벽정진 마치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북두칠성의 일곱 번째 별이 운문암 위에 떠 있습니다.
‘북두칠성 기운이 운문암으로 떨어진다’ 하신 어른들의 말씀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6·25한국전쟁 때 토벌대에 의해 불에 탔습니다.
현재 시주를 받으며 복원불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종단차원에서 1996년 인가한 ‘고불총림’이 2019년 11월 해제됐다. 아쉬움이 크다.
“1940년 당시 백양사는 말사만도 26개, 포교소 12개를 갖춘 대도량이었습니다.
만암 스님은 해방 후인 1947년 12월 ‘오직 부처님의 대위덕광명과
우리나라 고승선덕의 빛을 이어 받고자 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
‘호남고불총림(湖南古佛叢林) 결성 성명’을 발표하셨습니다.
일제 식민 잔재의 불교청산과 민족정기 함양, 승풍진작에 매진한다는
서릿발 의지가 들어차있습니다. 그 때부터 백양사는 고불총림으로 불렸습니다.
우리 사중은 총림의 자부심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그 자긍심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총림으로서의 품격을 더해 가는 한,
‘고불총림 인가’는 다시 이뤄지리라 확신합니다.”
불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청했다.
계절마다 묘경이 펼쳐지는 백양사 쌍계루의 가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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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거사의 임종게를 음미해 볼만합니다.
단원공제소유(但願空諸所有)
절물실제소무(切勿實諸所無)
호주세간(好住世間)
유여영향(猶如影響)
‘있는 모든 것을 비우기를 원할지언정/
없는 것을 채우지 말라./
세상 잘 살라./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 같다.’
출가연령을 제한 해 온 종단이 은퇴한 사람도 산문에 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새벽예불 올리고, 풀도 매며, 때로는 자신과의 싸움 한 판 벌여보는 겁니다.
자신만의 삶을 온전히 살아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그려가는 일입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산사 옆 쌍계루에 세차게 떨어졌다.
굉연무열(宏演無說) 선사가 지은 시처럼
‘문 밖 석교와 쌍계루는 푸른 산 마주했고(門外橋樓面翠微)/
세속의 정은 물고기와 함께 고요히 흘러가고(世情靜與遊魚逝)’ 있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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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공 스님은
1977년 입산 후 1978년 지근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지.
백양사 강원 졸업 후 불국선원에서 첫 안거를 난 후
백양사, 불갑사, 내소사, 대흥사, 백장암, 운문암 등의
제방선원에서 정진해 왔다. 2020년 백양사 주지로 추대됐다.
2021년 9월 8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