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정신과 선생님과 상담을 한지 꽤 오래 지나서였다. 한때 그냥 주식과 코인에 투자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중독된 행동이었다. 요즘 중독에 빠진 나를 경각심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기존에 내가 중독과 관련해서 알고 있는 지식은 정신의학자 스캇 펙이 말한 것이었다. 그는 중독은 영혼의 질병이고, 영광스러운 상처라고 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상처 있다고 깨달음으로써 스스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다양한 이유로 정신과를 찾게 된다. 중독은 그중 대표적인 하나의 증상이다.
저자는 집착이 우리를 중독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 자기의 나르시시즘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불교에서는 본래무일물이라고 하며, 인간이 집착할 대상은 없다고 한다.
책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중독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깊이 깨닫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중독은 우리를 무릎 꿇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책의 제목이 만들어진 듯하다. 중독은 우리가 정말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럼으로써 우리보다 더 높은 대상에게 의지할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우리는 은혜를 받게 된다.
인간은 사랑과 자유를 위해 창조되었는데, 중독이 우리를 훼방하고, 구원을 위해서는 치유 곧 은혜가 필요하다. 성 어거스틴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많은 것을 주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손과 마음 그리고 생각은 항상 꽉 차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일상의 갖은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위대한 영적 전통은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둔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것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을 중독 현상이라고 봤다. 인간은 자유를 가장 추구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다. 인간의 순수한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중독이다. 이때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자연히 자존감 저하로 이어진다.
영적 거장들의 저서를 보면 ‘그들의 순수성이 자라날수록, 그들은 자신의 집착에 분명한 끝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더 겸손해졌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예수님을 만난 단순하고 정직한 세리의 기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중독으로부터 치유가 될수록, 우리는 점점 덜 견고해질 것이다. 우리가 필사적으로 매달라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긴장을 늦추고, 꽉 움켜쥔 손을 펴고, 마음도 상당히 유연해진다. 즉 사람들은 이때 덜 강박적이 된다. 미리 알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기꺼이 허용하게 된다. 그리고 사물을 조금 더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게 될 것이다.
책에 나오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상처받기 쉽고, 중독되기 쉬우며, 제멋대로인 존재로 만드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내면의 깊은 욕구에서 벗어나 유혹되고는 했다. 그리고 인간은 나약함으로 거듭 후퇴한다. 이것은 신학적인 질문일 수 있고, 여기에 답하는 방식은 종교마다 차이가 있다. 힌두교에서는 ‘카르마’라고 부르며, 불교에서는 ‘연기’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다양한 것에 관심을 쏟고 있다. 저자는 사람들 대다수가 중독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그 이유는 순수한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책에서 말하듯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을 소외시하고, 인간은 다른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우선시하는 대상이 모두 다를 것이다.
또한, 저자는 근본적인 문제가 치유되지 않으면, 한 가지 중독은 그저 다른 중독으로 대체될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광야에서 집착과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 광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다음과 같다. “단지 힘든 여행과 위험이 많은 배움이 아니라 회개와 회심, 복잡한 동기들이 정화된 욕구로 변화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