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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 [광주문화관광해설사] 이원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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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나라로부터 忠臣旌閭를 받은 의향의 고장 [광주의 3忠臣]***
1)임진왜란 때 의병장 포충사의 충렬공 제봉 고경명[일문 충효열 고씨 정려 삼강문]
2)임진왜란 때 의병장 충장사의 충장공 김덕령[충효리 정려비각]
3)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순절한 충민공 전상의장군[숙종 때 충신 정려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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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光州의 대표적인 祠宇***
1)고려 말 해군의 영웅으로 왜구를 물리친 명장....경렬공 정지장군 경렬사
[정지장군 예장석묘] [경렬로]
2)임진왜란(조선선조)때 호남의병 6천여명을 을 창의하여 충남 금산전투에서
둘째 아들과 종사관 및 수많은 의병들과 용전분투 혈전을 벌리다
60세의 나이로 장렬히 순절한 의병장 충렬공 제봉 고경명의 포충사][사액사당][제봉로]
3)임진왜란(조선 선조)때 무등산 전설의 주인공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의 충장사[충장로]
4)정묘호란(조선 인조)때 청나라 3만 대군과 안주성 싸움 중 53세의 일기로 순국한
충민공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전상의장군 예장석묘][구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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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임진왜란의 시대적 배경]
***임진왜란 초기***
1. 文중심의 붕당정치로 군역의 문란으로 군사력의 약화
2. 1591년[선조 24년] 일본 통신사들의 학파, 정파에 따른 증언
1)서인 정사 황윤길...일본이 많은 전함을 준비하고
곧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함[율곡 이이의 기호학파...서인][이율곡의 10만 양병설]
2)동인 부사 김성일...풍신수길의 눈이 쥐와 같은 것을 보아 군사를 일으킬 위인이
못 된다며 전쟁 가능성을 부인함.[퇴계 이황의 영남학파...동인]
3)결국 실권을 쥔 동인편의 말을 듣고 서인들은 유배시켜, 사전 전쟁 대비를 못한 점
[일본의 승려 현소...일본이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귀국함.]
3. 일본은 풍신수길이 전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무기 조총을 앞세
700여척의 전함에 15만 8천여명의 원정군으로 1592년 4월 14일 부산을 침공함
4. 관군의 패배와 선조임금의 평양 피난과 의주몽진
*동래성함락[동래부사 송상현 전사]
*충주전투 패배[조령...문경새재]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
[일본군은 20여 일만에 한성을 점령하고, 60여 일만에 평양에
진격하였으니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조선을 유린하였던 것이다.
5.임진왜란은 1592년(선조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7년 동안 계속되며
조선에 처참한 피해를 남겼다.
**임진왜란의 반전**
1. 이순신 장군의 해상 재해권 장악으로 일본군의 보급 물자 차단
2. 군대와 관리들의 무능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지방의 사대부, 선비, 식자층,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3. 제봉 고경명의 6천여명의 호남 의병창의와 금산전투의 혈전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창의의 기폭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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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의 왕은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유일한 정점이었지만,
왜란의 발발로 선조 임금이 궁을 버리고 몽진을 가버리자 그 정점은 무너지고 말았다.
백성들은 나라의 상징인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갈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왜병이 도성에 닿기전에 궁궐로 난입하여
불을 지르고 파괴한 것은 바로 도성의 백성들이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던 시대의 막이 내린 것이었다.
그 이후 소위 당파싸움의 온상인 붕당정치가 형성되었고
대 부분의 사대부들은 국왕보다 자신들의 당수가 으뜸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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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봉 고경명 선생☸
[1.] 문인 선비로서의 제봉 고경명 선생...
[제봉집 목판...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20호]
******경명]은 약관 20세 때인 명종 7년 봄 사마시 진사시험에 제1인으로 합격 ☸명종 13년 26세로 문과 갑과에 장원 급제[기대승은 을과에 합격] ☸ 문장가 시인으로서의 활약 [제봉문집목판]==[제봉문집+유서석록+정기록+제하휘록+제봉연보+포충사지] [제봉의 막내아들 [고용후]가 남원 부사로 있을 때 그 지역 부호들의 기부를 받아 재질은 모두 박달나무로 양면에 새긴 17세기 개인 문집 목판으로 목판인쇄의 기술사 연구자료 등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로 평가 받는 문화유산 이다.] |
1)제봉집...고경명의 980여편 시문을 모은 시문집
2)유서석록"(遊瑞石錄).... 제봉 고경명 선생이 여러 사람들과
서석산[지금의 무등산]에 다녀온 기행문으로 순수한 제봉의 遺文이다.
'유서석록'은 제봉 고경명(1533~1592)이 나이 41세 되던 해인
1574년(선조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당시 74세인 광주목사 갈천 임훈(1500~1584)의 일행과 함께
[5일간]에 걸쳐 무등산에 오른 감상을 4,800자의 순한문으로 기술한
기행문으로, 430년 전 16세기의 무등산과 그 인근의 모습을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무등산=화순 적벽=담양 소쇄원]
[1574년 음력 4월 20일.. 41세의 제봉 고경명은 무등산에 올랐다.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참으로 산은 우리 인간에게 말없이 교훈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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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기록...임란 때 제봉 삼부자의 활약 내용과 충절의 사실을 기록한 것
[격문, 통문, 각종편지 등을 모아 만든 책]
[고경명의 아들 [유후]가 이 책을 편찬하고, 막내아들[용후]가 증보 간행함]
[정기록 서문...윤근수, 이덕형, 이항복 등]
4)제하휘록...고씨 문중의 갖가지 내용을 정리한 것
5) [제봉연보, 포충사지[포충사에 관한 문헌록] 등 여러 문적을 합쳐 간행함]
6)*식영정 4仙人
[석천 임억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제봉은 식영정 4선답게 현재까지 전하는 그의 시문은 985수에 이른다.
그는 의병장이기 이전에 문인으로서 선비요 시인이며 문장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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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경명 문적[시지정유형문화재 제21호]
[사후 관리를 위한 후손들의 노력과 나라에서 충신. 효자를 예우하기 위한 문서] 1)명문2점 2)입안문 1점 3)교지 4점 4)유물 2점 |
1)명문2점... 1601년 나라에서 고경명 3부자를 위해 포충사를 지어
춘추로 제향하도록 하고, 사액까지 내리니 고경명의 부인과 아들들이 감격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전답과 노비를 영원히 포충사에 헌납한 일을 기록한 것
[명문 2점....포충사 관리의 중요한 자료]
2)입안문 1점...재산의 헌납에 관한 관청의 인가 증명서
[입안문서는 [충효지가]에 대한 국가의 예우를 말할 수 있는 자료
3)교지 [4점]
*고경명이 문과에 장원급제 했을 때 받은 교지
*제봉 고경명이 의정부 좌찬성 증직과 [충렬공]시호를 받을 때 교지
*준봉 고종후가 이조판서 증직과 [효열공]시호를 받을 때 교지
*학봉 고인후가 의정부 영의정 증직과 [의열공]시호를 받을 때 교지
4)유물 [2점]...마상격문 과 세독충정
[*제봉 고경명이 직접 쓴 마상격문]
[☸馬上檄文☸]...말안장에 앉아
고경명 선생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의병을 모아 출전하던 중
관군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 해 5월에 고경명은
각도의 수령과 사대부, 선비 ,전직관료, 식자층 등 백성, 군인들에게 격문을 보내는데
이것이 말위에서 쓴 그 유명한 [馬上격문]이다.
이 격문은 당시 식자층을 감동시켰고, 많은 의병들을 결집시켰다.
식자들의 심금을 울린 이 격문을 후대 사람들은
최치원의[토황소격문]이나, 제갈량의 [출사표]에 비견되는
명문으로 평가한다.
[**馬上檄文...조선의 명 연설문...1592. 6. 24***]
[경명은 晩節의 丹心이요, 흰 머리의 선비다.
밤중에 닭소리 들으니 난리를 감당할 수 없으나 中流의 돛대를 치면서
외로운 忠誠을 다짐한다.
다만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忠誠만을 품고,
모기나 등에가 태산을 짊어질 힘이 없음을 생각지 아니한다.
이에 드디어 의병을 규합하여 바로 서울로 향할 것이니,
소매를 떨치고 將壇에 올라 눈물을 뿌리어 여러 동지에게 맹세하노라.
곰을 치고 범을 잡는 장수들이 우레같이 일어나고 바람같이 달려오며,
말을 뛰어 타고 關門을 뛰어 넘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비오듯 몰아온다.
대개 협박당하여 응하거나 강요하여서 쫓아온 것이 아니고, 오직 臣子로서
忠義의 마음이 다같이 지성에서 나왔다.
국가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에 있어서 어찌 감히 작은 제 몸을 아낄 수 있으랴.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 지었으니 처음부터 직책상의 관직이나 지역에 상관이 없고
군사는 正義가 힘이니, 强하냐 弱하냐는 논할 바가 아니다.
후략......
***[제갈량의 출사표]***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에 감복해 유비를 도왔는데, 유비의 숙원인 북방의 [위]나라 땅을 수복하지 못하고 유비가 철천지한을 품고 죽으면서, 유비가 북방을 수복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이윽고 북방의 [위]나라를 치기위해 떠나던 날 아침 유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유선]왕 에게 군대 거병의 상소문을 올린 출사표의 명문 [출사표의 [출사란...군대를 거병하는 것을 뜻하고 [표란...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형식의 상소문을 뜻한다.] |
***[최치원의 토황소격문]*** 신라 말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 6년만인 18세에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벼슬을 지내다, 당시 당나라 농민 [황소]가 일으킨 [황소의 난]이 크게 세를 떨치자 [황소의 난]을 토벌해야 한다는 격문을 써서 난을 평정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준 당나라에서 뛰어난 문장 솜씨를 인정받은 [토황소격문] |
*제봉 고경명이 직접 쓴 세독충정 휘호
7) *☸세독충정(世篤忠貞)☸.....[충효정신과 애국정신, 선비정신]
[임란 의병장 고경명 선생이 평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실천하였다는 좌우명.]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
[篤.....도타(두터울)울 독, 貞.....곧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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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인 의병대장으로서의 고경명,,,,,[59세에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낙향함]
1)임란 초기 담양 추성관에서 6천여명의 호남 의병 창의
2)60세의 고령에도 의병대장으로 추대
3)두 아들 종후, 인후, 종사관 곡성출신의 유팽로, 남원출신의 안영 등과 의병 6천여명을 출병시킴.
4)금산성 전투에서 둘째 아들 고인후와 종사관 유팽로, 안영과 수많은 의병들과 장렬히 순절함
5)큰아들 종후는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수많은 의병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의병]을 창의해 경상도 진주성 싸움에서 혈전을 벌이다 진주성이 함락 되자
호남의 의병장 나주의 김천일, 화순의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해
장렬히 순절한 촉석루의 삼장사로 진주의 창렬사에 배향 됨
6)충노 봉이와 귀인은 주인을 위해 충성과 의리를 지키다 장렬히 순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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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순절 후 국가로부터 받은 추숭[포충 공로]
1)사당 건립...1601년
2)1603년 [포충]이라는 사액을 선조로부터 받아 사액사당의 되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전국의 1,700여개 서원 가운데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 되었는데,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포충사는
훼철되지 않은 호남의 대표적 서원으로 현재 호남의 호국선열의 대표적 유적지다.
3)추증과 시호 받음
고경명과 두 아들은 모두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한 문인으로서
사후 제봉 고경명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충렬공]시호 교지를 받고,
첫째아들 고종후는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효열공]시호를,
둘째아들 고인후는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열공]의 시호를 받음
4)딸은 정유재란 때 남편이[영광의 노상용] 순절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라에서 제봉家에 [충,효,열]정려를 내려
현재 장군의 생가 제봉산 자락 압촌동에 [삼강문]이 세워짐
5)제향 때 왕명으로 사제관을 파견하여 제례집전
6)충노 봉이와 귀인도 주인을 위해 충성과 의리로 순절하자 [충노비]가
세워져 매년 4월 15일 제향일에 함께 제사를 드림
7)고경명은 충남의 금산 칠백의총의 위패를 모신 종용사 앞 와평에 순절비가 세워져 있고,
장성의 제봉산에 하사받은 사패지 사방 10Km의 넓은 묘역의 묘소에는
비석과 신도비가 세워져 있어 정기관에 탁본하여 전시함
8)광주시에서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려 [제봉로]라는 도로명과
월드컵 경기장 무궁화동산에 장군의 기마상을 건립해 애국충절을 기림
9)1978년 호국 유적지 지정[포충사정화기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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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충효열]고씨 정려 삼강문
[현판 승훈문] |
고씨삼강문은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고경명(1533∼1592) 선생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문으로,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의 7명이 표창되어 있다.
1충(忠)은 고경명,
3효(孝)는 그의 장남 종후, 차남 인후, 손자 부금이며,
2열(烈)은 그의 딸 장흥고씨와 조카며느리 광산정씨,
1절의(節義)는 그의 동생 경형이다.
고경명은 조선 명종 13년(1558)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24년(1591)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차남 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현존 건물은 1844년에 세운 것으로 지붕 옆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에
앞면 4칸·옆면 1칸이다.
사방에 홍살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차단하였으며,
앞뒤 2열로 현판을 걸었고, 건물 밖에는 담장을 두르고 외삼문을 세웠다.(문화재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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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南을 義鄕 이라고 부른다, 왜?***
이는 [징 한 기질]에서 온 것으로 본다.
호남지방의 방언에 흔히 쓰는 [징 하다]라는 말은
[앗 따, 징 하다], [워-매 징 한 것], [저, 징 한 놈 좀 보소]등에서
사용하는 바와 같이 그 내포 된 의미는
[무섭도록 끈질기고 악착같이 엉겨 붙어 끝장을 내고 말며,
무섭도록 끝까지 붙들고 물고 늘어지는 상태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표준어의 [징그럽다]나 [쟁그럽다]는
보기에 불쾌하도록 흉하고 끔찍하다든가,
만지거나 보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가 아니라
[악착같은 끈기, 끝장을 보고 마는 패기의 뜻이 간직되어 있다.]
민속놀이에서 [이, 징 한 기질]을 그대로 표출되고 있으니
호남지방의 줄다리기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참여하여
끝장이 날 때까지 며칠이고 계속된다.
또, 고싸움이 패기 넘친 악착같은 놀이로 정월 16일에 시작 된 놀이로
진편이 도전하면 재차 붙고 하여 스무날 까지 계속 된다.
그래도 승패가 나지 않을 때에는 2월 초 하루날 [고]를 풀어
줄을 만들고 이 줄을 당겨 승패를 가린다.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편싸움 놀이들은
악착같은 끈질긴 투지와 일사불란한 통제력 밑에 협동심을 바탕으로 한
패기가 충천하는 승벽심을 필요요건으로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징 한 기질]이 바탕이 된 [징 한 놀이]이다.
이 같은 민속놀이에 투영 된 [징 한] 기질은
불의에 항거하는 기질로 나타난다.
임란직전에 중앙정부의 부패상에 격분하여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자진한 전주의 [정여립]을 비롯해서,
탐관오리 제거와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동학민중의거와
전남 암태도의 농민항거,
나아가 식민지 교육정책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모두 호남 땅의 호남인에 의해서 주도 되었다.
이 사실이 앞서 말한 [징 한 기질]의 발현이다.
임란정유재란 때 고경명 일가를 비롯해, 김덕령, 김천일, 최경회 등이
의병을 일으켜 왜구에 항거한 것도 이 같은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의병 전체의 60%가 호남출신들로 나타나고 있는데,
앞에서 열거한 인사들이 선두에 서서 의병을 일으키려 해도
민중의 호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민속놀이에 투영 된 [징 한 기질]을 갖고 있는 호남인들이기에
이들을 따랐고, 끝내는 장렬한 죽음으로 끝장을 내고 만 것이다.
그러기에 호남인은 언제나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위해 투쟁하여 왔다.
이 같은 기질은 설화에도 나타나고 있으니,
이태조가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전국의 산신에게 허락을 받고 돌아다닐 때
지리산 신이 불응하므로 경상도 땅에 있던 지리산을 전라도로 귀향 보냈다고 전하고,
또 광주의 무등산 신도 끝까지 이를 거역하였다는 민담이
이 호남지방에 널리 전승되고 있다.
이는 호남이 의향임을 뒷받침해주는 설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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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향 광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광주5.18민주화운동은 신군부의 독재에 항거하는 두 불의의 세력에
의한 이들의 실제적인 억압이 義를 촉발시켰다.
*광주의 의병사...[포충사와 충장사]
1.김덕령...무등산의 사나이[충장공, 충장사, 무등산...수많은 전설]
[충절을 다했던 의병장 김덕령이 오히려 국가 권력에 의해서 역적으로 몰려
형장에서 매를 맞다가 죽음으로 인해서,
지역민들은 그의 애통한 심경을 무등산의 전설로 새겨 놓은 것이다.
의병장으로 倡義도 그렇고 그가 가졌던 忠義정신도 義를 현창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의 세력으로 간주되는 중앙권력에 의해
역신으로 몰려 죽은 김덕령을
지역민들이 해원의 차원에서 많은 전설을 만들어 냈다.
김덕령과 무등산과 연결되는 고리가 수많은 민간전설이 있듯이
고경명과 광주가 연결되는 고리 역시
[고싸움]이라는 민속놀이가 아닌가 싶다.
고경명이라는 인물자원과 고싸움이라는 민속자원이 서로 연계
고경명의 충의정신이 발현 된 하나의 사례로서
고싸움에 대한 내용적 측면과 가치현창에 대한 방법적 고민이 있다.
2. 고경명...1533년 광주남구 대촌동 압촌 부락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몽진을 하게 되자 倡義하여 6천여명의 의병을 모집, 두 아들 종후, 인후와 함께 참전했던 당시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전장에서 두 아들과 함께 순절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현재 광주 포충사, 금산의 성곡서원, 종용사
순창의 화산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의병은 국가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국민스스로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 충장공 김덕령**(1568-1596)☸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으나
이몽학 반란과 연류된 소문으로 인하여 국문을 받아 목숨을 거둠
[어머니 상중에 거병]
1)이몽학...왕손의 서얼
김덕령은 반란군 진압을 위해 가던 중 반란이 평정되어 되돌아옴
[김덕령만 반란군 진압에 호응함, 한음 이덕형과 권율은 참여 안함]
2)김덕령의 출중한 용력 때문에 시기한 사람이 많았다.(겸손하자)
3)선조 임금 앞에서 친국을 6차례 받으면서도 머리 숙이지 않고 의연한
태도에 선조임금의 괘씸죄로 죽음을 당함
4)장군의 죽음에 전라도 사람들이 다 울었다고 함
5)김덕령의 짧은 생애 흔적은 신화적 존재로 각인
6)옥살이중 지은 춘산가.(사직공원에 시비가 세워짐)
7)취가정 주인... 광해군 때 유명한 시인 권필의 꿈에 나타나 김덕령의 취시가
8)형 김덕홍...고경명과 같이 금산전투에서 순절,
동생..김덕보:풍암정사 *광주 충효마을,
[이몽학의 반란]...충청지역 장악(농민들 큰 호응...병력 수천에 달해)
선조29년(1596)7월 선봉장 한순의 군량 담당관 이몽학이 정산성에서
군사를 모아 충청도 주요 지역의 관아를 습격,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됨.
처음 반란을 지시한 것은 한순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몽학은 부여 도천사에서 모의 김경창, 이운, 승려 능운 등과 함께
6-7백명의 군사를 모아 충청도 일부를 점령하고 나서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는 식으로 점령지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데
추종세력이 늘어나 그 병력이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 됨
[이몽학]은 적장 가토가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니
의병을 일으켜 이를 치자는 말로 군사를 모았는데,
각종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이 호응 삽, 몽둥이를 들고 반란군에 가담함.
특히 5도가 같은 날에 군사를 일으켜 한성에 쳐들어가는 데
의병장 김덕령과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도아 주며,
병조판서 이덕형, 각도의 병사와 어사들이 호응하고 있다]는
이몽학군의 유언비어 작전이 먹혀들어 가면서 정부의 대응에
혼선이 빚어진 반란사건.
[춘산의 불이 나니 - 김덕령 -]
춘산(춘山)의 불이 나니 못다 픤 꼿 다 붓난다
져 뫼 져 불은 끌 물이나 잇거니와
이 몸의 내 업슨 불이 나니 끌 물 업서 하노라.
<김충장공유사, 근화악부>
[현대어 풀이]
봄 동산에 불이 나니 미처 못다 핀 꽃들이 모두 불에 타 죽는구나.
저 산의 저 불은 끌 수 있는 물이나 있지만
이 몸의 연기 없는 불은 끌 수 있는 물이 없구나.
[창작 배경]
작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무인이나, 반란군 이몽학과 내통이 있다는 모함으로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였다. 그 일로 인해 옥에 갇히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노래한 시조이다.
[이해와 감상]
초장의 '춘산의 불'은 '임진왜란'을 비유한 것이며, 못다 핀 곳'은
전쟁을 통해 수없이 쓰러져 간 꽃다운 나이의 청년들 내지는 할 일을
다 못하고 죽어가야만 하는 자기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중장의 '물'은 전쟁에서의 승전이나 화해 등을 비유한 것이며,
종장에서 말한 작자 자신에게 일어난 '내 업슨 불'은 '알아 주는 이 없는 억울한 심정'을 비유한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뜻하지 않은 억울한 상황을 갑작스럽게 '불'이 난 것으로 표현한 점이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현명하지 못한 임금과 간신배가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진정한 애국 충렬이, 유용한 명장이 화를 입고, 국운이 더욱 기울어져 버리는 실례를 우리는 역사상에서 흔히 접할 수가 있다. 젊은 용장 김덕령의 경우도 그것의 하나이다. 훌륭한 인재가 불의의 희생이 된다는 것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정리]
□ 성격 : 평시조, 한탄가
□ 표현 : 비유적 심상
□ 주제 : 자신의 억울한 신세를 한탄함.
□ 지은이 : 김덕령(1567~1596) ―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 '조선의 조자룡'이라 불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조좌랑으로 의병을 일으켜 20대 젊은 나이에 익호 장군이란 칭호를 받았다.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용맹을 떨쳐 왜군이 감히 범접하지도 못하였으나, 반란군과 내통하였다는 이몽학의 모반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고문을 당한 후 옥사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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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군 정충신(1576년 선조 9년 광주에서 정지장군 9대손으로 태어남)☸.
1. 지혜와 용기로 국난을 극복한 금남군 정충신
2. 17세에 임진왜란 때 (1592년 7.8-9) 이치전투에 참여하여 권율의 명령으로
의주 행제소에가서 장개를 올림. 이항복의 눈에 들어 벼슬
3. 신동으로 17세에 무과급제
4. 조선에 출영하여 기고만장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마음을 눌렀다는 일화
5. 후금(청)의 적지에 들어가 적의 형편을 살피고 북방 호적들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예언을 함
6.안주목사 시절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움
(1636. 인조 14년 62세로 숨을 거둠)
7. 하동 정씨 가문의 서얼로 태어나 경렬사에 배향되지 못함
8. 장군의 업적을 기려 광주 중심가에 금남로 이름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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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렬사 정지 장군☸.
1)고려말 왜구를 몰아내고 절의를 지킨 명장
2)나주에서 1347년(충목왕 3년)태어나서 1391년(공양왕 3년)에
45세의 나이로 광주별장에서 세상을 떠남
3)해군사령관으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움
4)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성계 일파가 제의한 벼슬도
거부한 충의와 절개가 굳기로 이름난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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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전상의 장군☸.
1)정묘호란 때 안주 남영인 백상루에서 후금(청)3만대군을 물리치다 순절한 장군
2)전상의 장군은 1575년(선조 8년) 광주 구동에서 태어남
3)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활솜씨가 뛰어남
4)선조 3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첫 벼슬길에 오름
5)광해군 9년(1617)에 회답사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우리 동포 150여명을 외교적 담판으로 귀국시킴
6)광해군 교지로 어모장군이 되어 광해군의 신임을 받음
7)인조반정으로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좌천 됨
8)인조 5년(1627)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안주성 남영인 백상루에서 적군과 장렬히
싸우 다 순절함
9)병조판서 증직 교서를 받고 광주 북구 화암동 평두산에 예장으로 묻힘
9)숙종 때 충신 정려를 받아 정려각이 세워짐
10)후손들에게는 완문과 완약이 내려져 부역이나 세금이 면제됨
11)1985년 장군의 사당인 충민사를 세워 충절의 교육도장으로 활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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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의 7명이 표창되어 있다.
1충(忠)은 고경명,
3효(孝)는 그의 장남 종후, 차남 인후, 손자 부금이며,
2열(烈)은 그의 딸 장흥고씨와 조카며느리 광산정씨,
1절의(節義)는 그의 동생 경형이다.
현판에는 열녀와 효자들의 칭송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세독충정
고경명 선생의 좌우명으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한다" 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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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을 기리는 호남의 대표적 호국선열 유적지 광주 포충사.]
[광주광역시 지방기념물 제7호]
[임란 때 호남의병의 주도인물 제봉 고경명 선생의 추모공간 포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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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임진왜란 초기 왜병에게 관군이 계속 참패하자
국난극복을 위해 60세의 노구로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담양 추성관에서
호남의병을 규합 창의하여 6천여명의 의병을 출병시켜
7월10일 충청도 금산전투에서 혈전을 벌리다 장렬히 순절한
고경명, 고인후 부자를 비롯한 종사관 유팽로, 안영과
이듬해 복수의병을 결성 진주성에서 항전하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첫째 아들 고종후.
이들 삼부자의 순절은 호남의병활동을 촉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곳 포충사는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와 종사관 유팽로, 안영을 포함한
다섯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사당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전국의 1,700여개 서원 가운데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 되었는데, 호남에서 유일하게 장성의 하서 김인후 필암서원과
광주 제봉 고경명 포충사만 훼철되지 않은 호남의 대표적 충절의 사액사당 존치로
역사적 위상을 고양시키고 있다.
☸.60세 노선비가 국가가 위란에 처하자 행동으로 실천하는
임진왜란 때 [충]의 자랑스런 인물 충렬공 제봉 고경명선생을 주벽으로 배향.
[동벽에 고종후, 유팽로 ,,, 서벽에 고인후, 안영 배향]
☸.문과에 장원 급제해 주옥같은 글을 남긴 시인이며 문장가인 큰 선비
[제봉문집 목판...광주시지정 유형문화재 제20호]
[식영정 4선인...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명종 때 62폭의 "어병어제화"시문,
제봉집, 유서석록, 정기록, 제하휘록, 포충사기, 제봉연보 등]
☸.예순이 되어 임진왜란이 일자 호남연합의병대장에 추대되어
6천여명의 의병들과 출병하면서 쓴 마상 격문[전국 의병창의의 기폭제가 됨]
[제갈량의 출사표, 최치원의 토황소 격문]과 비견되는 명문]
☸.관군의 패전으로 중과부족의 금산전투 혈전 현장에서 신명을 다하다 아들과 함께 순절
[임란중 "일문충효열 정려" 사후 사액사당, 증직과 시호 교지]
[일문충효열 만고강상[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
[충의의 두 종사관 유팽로와 안영, 충성과 의리의 충노 봉이와 귀인]
***[제봉문적...광주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21호]....9점**
*교지4점[장원급제 교지, 3부자 증직과시호교지]**[명문2점과 입안문1점]
*유물2점[세독충정 휘호, 마상격문]
☸.문무겸전(文武兼全) 세독충정(世篤忠貞)의 충의지사[충효정신,애국정신,선비정신]
☸.1601년 창건, 1603년 사액(褒忠), 창건 이래 원위치 원형유지
☸.조선시대 왕명으로 제향 때 제관이 파견되는 최고의 예우 사액.
☸.서원훼철령에도 존치된 전국 47개 원사 중 호남의 대표적 사우
[*1603년 [포충]이라는 사액을 선조로부터 받아 사액사당이 되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전국의 1,700여개 서원 가운데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 되었는데,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포충사는 훼철되지 않은 [일문충효열] 위상이 드높은
호남의 대표적 사액 사당으로, 현재 호남의 호국선열의 대표적 유적지다.]
☸현재 지방기념물을 국가지정 유적지로 승격 시키기 위해 노력 중
[한석봉이 쓴 포충사 편액(1603년 宣賜)]
☸.호국선열 유적지로 정화사업☸.
**1978년 박정희 정권시절 제봉산 자락에 애국충절을 기리는
호국선열유적지로 1만3천 여평에 정화사업이 시작되어
충렬공 제봉 고경명 의병장과 효열공 종후, 의열공 인후
그리고 종사관 유팽로와 안영의 위패를 모신
새 사당[포충사]와 유물전시관인 정기관, 내외삼문, 정화기념비,
관리사무소, 한글판 포충사묘정비 등과 주변 환경정화로
1980년 만3천여평에 정화사업을 완성하여 호남제일의 애국충절의 교육도장과
시민들에게 휴식의 힐링 쉼터를 제공하고 있는 호국선열의 유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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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우가[병인](褒忠祠宇歌[幷引]) 현판(포충사 전시관)
[1614년 청음 김상헌이 제봉 고경명의 충절을 추앙하여 지은 글.]
[ 일종의 제봉 일대기 형식의 시가(詩歌).]
[幷引(병인)...‘포충사우가’라는 본문 詩歌에 앞서
그 경위를 짧게 적은 글(引)을 함께(幷) 쓴다는 것.]
[서문, 자기의 뜻을 부연하여 함께 서술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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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적인 인물로 17세기 병자호란 때 척화신(斥和臣)으로 .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어 끌려가면서 읊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는 시대를 넘어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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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우가[병인] (褒忠祠宇歌[幷引])는
1)광주와 무등산의 입지와 역사성, 2) 제봉의 출사와 행적,
3)임진란 의병 창의, 의병군의 활약과 순절, 4)사우 건립과 추숭,
5)마지막에 다시 광주와 무등산 극락강으로 돌아와 그 정신
계승되기를 축원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褒忠祠宇歌[幷引...첫머리는
광주는 들이 넓고 기름져 [光州之野 彌迤漫衍沃饒]
호남의 명도(名都)로 불리웠네. [曰湖南名都]
무등산 높이 솟아 하늘을 찌르고 [無等巉嵓 穹窿揷雲漢]
그 아래 극락(極樂)의 호수 맑게 흐르네. [其下極樂之澄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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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찍하고 기름진 들녁의 호남 명도 광주.
높이 솟은 무등산과 그 아래 흐르는 맑은 강.
한마디로 광주를 잘 나태내고 있다.
두어마디 짧은 글이지만 산과 강도 잘 표현 했다.
가벼운 듯 하지만 광주를 잘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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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관에 그려진 창의 그림 가운데 있는 분이 제봉 고경명선생이다.
임진왜란 때 일문충효열 아비[고경명]은 나라를 위한 [忠]에 죽었고, 두 아들[종후, 인후]는 아비의 복수를 위해 [忠孝]에 죽었고, 종사관[유팽로, 안영]은 의병대장을 위해 [忠義]에 죽었고, 선생의 따님도 정유재란 때 왜병을 꾸짖으며 순절하고, 심지어 忠奴 봉이, 귀인까지 주인을 위해 충성과 의리로 죽었으니 하나의 싸움에서 忠臣, 孝子, 烈士, 烈婦, 忠奴가 한꺼번에 나왔으니 제봉 선생의 좌우명 世篤忠貞의 충효정신과 애국정신, 선비정신이 포충사에 우뚝하여 실로 한 시대의 全人이시옵니다. [광주 포충사와 금산의 칠백의총 [종용사]에 배향되어있고, 광주 제봉로, 금산의 순절비, 장성의 신도비에 충렬공 제봉 고경명선생의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다. 이곳 포충사는 호남지방의 대표적 호국선열의 유적지로, 시민들에게 휴식의 힐링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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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褒忠祠 정화기념비]
임진왜란 때 선비로서 창의격문을 지어 전국에 돌리고, 의병을 일으키어
겨레와 강토를 지키고, 갈팡질팡하는 백성들을 깨우쳐서 의병대열에
서게 하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왜병들을 몰아내다가 의로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 분이 우리겨레가 추앙하는 충렬공 제봉 고경명 선생이다.
선생은 중종 28년 서기 1533년에 광주에서 태어나서
선조 25년 서기 1592년 임진4월에 불의로 왜적이 침범해오자
이를 몰아내기 위하여 그해 5월에 호남 의병 7천명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그해 7월에 전사하니 향년 60세로 절사하였다.
둘째 아들 학봉 인후도 같이 전사하였으며, 맏아들 준봉 종후 역시 군사를
일으키어 복수장으로서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려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아! 장하도다. 어버이는 나라위해 순절하고, 아들은 어버이 원수 갚다가
순절하니 忠과 孝가 같이 빛나도다.
그리고 선생의 따님도 정유재란 때 남편 따라 순절하니
忠孝에 烈이 더하여 一門 三綱의 이름이 높았도다.
글 읽는 선비로서 뜻을 숭상하지 않은 이가 없지만,
능히 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이는 드물고,
조행을 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지만
능히 國亂을 당하여 殉節로써 뜻을 지킨 이는 적다.
더구나 文學에 뛰어나면 行實이 따르기가 어렵고,
行實이 敦篤하면 學文이 따르지 못함이 상사인데,
先生의 3父子는 모두 文科에 及第한 文學에 뛰어난 분이지만,
國亂을 당해서 나라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쳤으니
온 겨레가 모두 그 뜻과 행실을 우러러 보았다.
後學들이 이곳 제봉산에 祠堂을 세우자 [포충사]로 賜額되어
선생을 主壁으로 두 아드님 [효열공 준봉]과 [의열공 학봉] 그리고
같이 의병으로 순절한 [증 좌승지 월파 유팽로] [증 좌승지 청계 안영]등
다섯 분 선생들의 祭享을 받들어 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민심이 쇠퇴하여 민족정기를 다시 드높이고
충효정신과 호국정신을 더 한 층 선양할 때가 되자
1978년 민족정신을 드높이자는 국가의 시책에 따라 문화공보부와
전라남도가 정성을 다하여 포충사 성역화 공사를 담당하였다.
[포충사]는 湖南의 代表的인 護國聖地로 定하여 이에 完工하였으니
우리 국민은 선생의 忠義精神과 義士들의 護國精神을 더 한 층
본받아야 할 것이다. 西紀 1980년 6月 [강수진 짓고, 구철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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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 ‘한말의병비석’ 6·25전쟁중에 건립”
[한말 의병 비석은 광주 남구 원산동 포충사 옛 사당 홍살문 앞에 있다.]
한말의병비석은 높이 190cm, 폭 50cm로 앞면은 [호남순국열사지비],
뒷면은 고광순, 황현 선생 등 한말 의병장 2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석은 1951년 정월 15일 6·25전쟁중에 건립되었다.
[비석의 큰 글씨는 이시영 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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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6일 초유사 학봉 김성일 선생의 15대 종손과
일행 200명이 심은 주목]
광주광역시 남구에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 종후(從厚,1554~1593), 인후(因厚,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1554~1592) ·안영(安瑛,1564~1592)을 기리는 포충사(褒忠祠,
광주시 기념물 제7호)가 있다.
1603(선조 36)년 고경명의 후손과 제자인 박지효(朴之孝) 등이 임금에게 청하여
포충(褒忠)’으로 사액 받은 대원군이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서원이다.
1980년 사당과 유물전시관(正氣館), 내외삼문, 정화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새로 세우고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를 했으나 옛 사당과 동 ·서재는 본래위치에 그대로 보존했다.
소장된 제봉집 목판(광주시 유형 문화재 제20호)과
문적(文籍)은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 21호)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주향(主享)인 제봉((霽峯) 고경명은 대과에서 장원할 정도로 수재였다.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학업에 열중하던 중 임란이 일어났다.
이때 공의 나이 60이었다.
격문을 돌리니 6,000명이 모였다.
6월 1일에 담양을 출발하여 6월 13일에 전주에 도착했다.
큰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는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군을 막도록 하고,
22일에는 여산(礪山)으로 옮겼다.
27일 은진(恩津)에 도달해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점차
호남에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연산(連山)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금산(錦山)에 도착해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그 후 맏아들 종후는 진주성 싸움에서, 딸은 정유재란 때 남편을 따라 순절했다.
이 때 민간의 신분으로 호남에서 창의했던 제봉과 달리
영남에서는 선조가 임명한 관직(官職)을 가지고 활동했던 분이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다.
학봉은 임란(壬亂)하면 선조와 더불어 연상되는 인물의 한 분으로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가서 실정을 살핀 후,
귀국하여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하여 논란에 중심에 서 있던 분이다.
난이 일어나자 류성룡의 천거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어 의병들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며, 전주성을 방어하는 등 전란수습에 동분서주 하다가 진중에서 병사했다.
7년의 임란은 많은 사상자를 냈고,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제봉집안도 예외 일수 없었다. 막내아들 고용후는 가솔 50여 명을 이끌고
광주에서 경상도 안동의 학봉 집을 찾아가 위탁했다.
학봉의 손자 김시권은 멀리서 찾아온 고용후에게
‘자네나 우리나 두 집이 다 같이 난리를 만나서 자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는 조부님이 돌아가셨으니 서로 마찬가지네.
그렇다고 학문에 힘쓰지 아니하면 나중에 옷 입은 짐승이 아니겠는가?’ 라고
위로하며 각오를 다졌다.
학봉 손자 김시권은 1593년 진주성에서 할아버지를 잃었고,
고경명의 막내 고용후는 아버지와 둘째 형(고인후)을 1592년 금산전투에서 잃었고,
큰 형(고종후)도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에 패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 터여서 두 사람은 동병상련이었다.
이렇게 굳게 언약했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1605년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하고
고용후는 1606년(선조 39), 김시권은 1630년(인조 8)에 대과에 급제해
피란시절의 악속을 지켰다.
1617년(광해군 9) 고용후는 학봉의 종가가 있는 안동 부사(府使)가 됐다.
그리고 학봉의 부인(김시권 할머니)과 학봉 큰아들(김집)을 초청해 보은의 잔치를 열었다.
고용후는 큰절을 하며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라며 울먹였다.’ 라고 했다. (2015,9,4 매일신문 논설위원 정인열의 글 중에서)
이런 400여 년의 오랜 인연에서였는지 포충사 경내에는 2004년 6월 6일
학봉의 종손 김종길(金鍾吉) 외 200명이 주목(朱木) 한 그루를 심고 푯말을 세웠다.
비록 작은 나무이기는 하나, 영호남을 대표하는 명문(名門)인 두 집안에 얽힌
아름다운 미담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증표이기도 하지만
동, 서를 화합할 수 있는 단초도 될 수 있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위치가 연못 부근의 좌측 끝자락 외진 곳이라 일부러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곳이고, 푯말의 재질이 나무라 오래 가지 않을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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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노비]
충노(忠奴)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의 비석.
** 포충사 경내 좌측에 있는 옛 사당으로 올라가는 입구 홍살문 옆에
신분 구별이 엄격하던 시절 두 노비의 주인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기리기 위해 충노(忠奴)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들 두 사람은 고경명 집안의 노비로 있다가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
국난을 당해 신분을 초월해 주인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금산 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하여
1592년 제1차 금산성 전투에서
제봉 고경명과 둘째 아들 고인후 부자가 순절하자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지냈고,
그 이듬해 다시 고경명의 큰 아들 고종후를 따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주인과 함께 순절한 충의의 인물이다.
국난을 당해 신분을 초월한 자기희생을 기리기 위해
고씨 가문에서 자연석에 새긴 비석으로서
이들의 희생과 충의정신을 기리고 있다.
두 家奴를 보면 주군으로 모시는 고경명 선생이
평소 어떻게 하인을 대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이 나면 도망치기 바쁠 것인데 자기를 거두어준
주인을 위하여 충성과 의리를 보여준 두 하인을 통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노비까지 걱정했던
고경명 가문다운 마음씀씀이가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와
가슴까지 어느덧 온기로 데워진 듯 한 느낌을 받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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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포충사 뒷산 제봉산은 400여년 쯤 된 낙락장송들이 시대의 이모저모를
나이테 하나하나에 레코드판 처럼 간직하고 있어
[명종 때 62폭의 "어병어제화"제봉시문의 병풍이 둘러쳐진 듯],
[임란 때 호남의 6천의병들이 결의에 찬 모습들로 소나무로 환생되어 도열해 있는 듯]
보는 것만으로도 엄숙하고 경건함을 갖게하는 곳 [충을 기리는 포충사.]
역사의 회한을 막바지 여름 끝자락에 나만의 사유의 시간을 갖는다면......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 듯 피어나던 사당앞 백일홍들도 소명을 다한 듯
무슨 사연 그리 많은지 우수수 꽃비만 훝날리고,
여름 막바지 매미소리만 해설사의 기가폰 소리와 함께 어울리는......
낙낙장송 소나무 그늘의 가을 맛보기 시원한 바람이
땀흘려 칙칙한 몸을 포송포송 기분좋게 한 곳.
구사당의 묘정비 앞 6각형 거북등걸 모양의 노송의 소나무그늘 벤취에 앉아
광주의 8경중 하나인 대촌들녘, 삼복을 이겨낸 벼들이 3마디로 자라 이삭을 피운
풍요로은 논밭들, 허공을 맴도는 빨간 고추잠자리, 유난히 붉게보이는 빨간고추
이모저모 가을이 다가온 모습들이 이렇게 정겨울 수가 있을까요.
멀리 나주 혁신도시의 마천루처럼 우뚯솟은 한전 빌딩
[본인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즐기는 모든 활동]의 줄인말 [본.자.즐.모]하면서...
[세독충정] 제봉선생의 좌우명을 다시한 번 곱씹어 현재를 살아간 우리들에게
내 삶을 유추해보는 시간을 갖지 않으시렵니까......?
하루해가 서산 마루에 걸쳐 숨박꼭질하네요.
저도 하루의 해설사 해설봉사활동 마무리 할 시간이네요'
함께한 시간 감사 인사드립니다.
포충사 광주문화관광해설사 이원창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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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느티나무는 그늘을 쌓고, 배롱나무는 햇살을 쌓는다.
느티나무는 마을로, 배롱나무는 무덤[사당]으로 간다.
느티나무에서 배롱나무까지
파란만장. 나비가 난다,
바위에 앉은 나비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호수에 잠긴 구름은 체온을 남기지 않는다.
바다는 뱃길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문무겸전 세독충정의 충의지사 제봉고경명 선생은
[일문충효열], 충을 기리는 사액사당 포충사를 남겨
호남지방의 대표적 호국선열의 유적지로,
애국충절의 교육도장과 시민들에게 휴식의 힐링 쉼터를
남기고 있다.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나는 노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젊지 않은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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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수. 토]일에만 포충사 문화관광해설활동을 하고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되신분은 포충사를 방문한다면 환영합니다.
옛날 추억의 맛을 되살리는 시골 돼지국밥에 소주한잔...함께 할수있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포충사 [광주문화관광해설사] 이원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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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나라로부터 忠臣旌閭를 받은 의향의 고장 [광주의 3忠臣]***
1)임진왜란 때 의병장 포충사의 충렬공 제봉 고경명[일문 충효열 고씨 정려 삼강문]
2)임진왜란 때 의병장 충장사의 충장공 김덕령[충효리 정려비각]
3)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순절한 충민공 전상의장군[숙종 때 충신 정려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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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光州의 대표적인 祠宇***
1)고려 말 해군의 영웅으로 왜구를 물리친 명장....경렬공 정지장군 경렬사
[정지장군 예장석묘] [경렬로]
2)임진왜란(조선선조)때 호남의병 6천여명을 을 창의하여 충남 금산전투에서
둘째 아들과 종사관 및 수많은 의병들과 용전분투 혈전을 벌리다
60세의 나이로 장렬히 순절한 의병장 충렬공 제봉 고경명의 포충사][사액사당][제봉로]
3)임진왜란(조선 선조)때 무등산 전설의 주인공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의 충장사[충장로]
4)정묘호란(조선 인조)때 청나라 3만 대군과 안주성 싸움 중 53세의 일기로 순국한
충민공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전상의장군 예장석묘][구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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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임진왜란의 시대적 배경]
***임진왜란 초기***
1. 文중심의 붕당정치로 군역의 문란으로 군사력의 약화
2. 1591년[선조 24년] 일본 통신사들의 학파, 정파에 따른 증언
1)서인 정사 황윤길...일본이 많은 전함을 준비하고
곧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함[율곡 이이의 기호학파...서인][이율곡의 10만 양병설]
2)동인 부사 김성일...풍신수길의 눈이 쥐와 같은 것을 보아 군사를 일으킬 위인이
못 된다며 전쟁 가능성을 부인함.[퇴계 이황의 영남학파...동인]
3)결국 실권을 쥔 동인편의 말을 듣고 서인들은 유배시켜, 사전 전쟁 대비를 못한 점
[일본의 승려 현소...일본이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귀국함.]
3. 일본은 풍신수길이 전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무기 조총을 앞세
700여척의 전함에 15만 8천여명의 원정군으로 1592년 4월 14일 부산을 침공함
4. 관군의 패배와 선조임금의 평양 피난과 의주몽진
*동래성함락[동래부사 송상현 전사]
*충주전투 패배[조령...문경새재]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
[일본군은 20여 일만에 한성을 점령하고, 60여 일만에 평양에
진격하였으니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조선을 유린하였던 것이다.
5.임진왜란은 1592년(선조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7년 동안 계속되며
조선에 처참한 피해를 남겼다.
**임진왜란의 반전**
1. 이순신 장군의 해상 재해권 장악으로 일본군의 보급 물자 차단
2. 군대와 관리들의 무능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지방의 사대부, 선비, 식자층,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3. 제봉 고경명의 6천여명의 호남 의병창의와 금산전투의 혈전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창의의 기폭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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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의 왕은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유일한 정점이었지만,
왜란의 발발로 선조 임금이 궁을 버리고 몽진을 가버리자 그 정점은 무너지고 말았다.
백성들은 나라의 상징인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갈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왜병이 도성에 닿기전에 궁궐로 난입하여
불을 지르고 파괴한 것은 바로 도성의 백성들이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던 시대의 막이 내린 것이었다.
그 이후 소위 당파싸움의 온상인 붕당정치가 형성되었고
대 부분의 사대부들은 국왕보다 자신들의 당수가 으뜸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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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봉 고경명 선생☸
[1.] 문인 선비로서의 제봉 고경명 선생...
[제봉집 목판...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20호]
******경명]은 약관 20세 때인 명종 7년 봄 사마시 진사시험에 제1인으로 합격 ☸명종 13년 26세로 문과 갑과에 장원 급제[기대승은 을과에 합격] ☸ 문장가 시인으로서의 활약 [제봉문집목판]==[제봉문집+유서석록+정기록+제하휘록+제봉연보+포충사지] [제봉의 막내아들 [고용후]가 남원 부사로 있을 때 그 지역 부호들의 기부를 받아 재질은 모두 박달나무로 양면에 새긴 17세기 개인 문집 목판으로 목판인쇄의 기술사 연구자료 등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로 평가 받는 문화유산 이다.] |
1)제봉집...고경명의 980여편 시문을 모은 시문집
2)유서석록"(遊瑞石錄).... 제봉 고경명 선생이 여러 사람들과
서석산[지금의 무등산]에 다녀온 기행문으로 순수한 제봉의 遺文이다.
'유서석록'은 제봉 고경명(1533~1592)이 나이 41세 되던 해인
1574년(선조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당시 74세인 광주목사 갈천 임훈(1500~1584)의 일행과 함께
[5일간]에 걸쳐 무등산에 오른 감상을 4,800자의 순한문으로 기술한
기행문으로, 430년 전 16세기의 무등산과 그 인근의 모습을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무등산=화순 적벽=담양 소쇄원]
[1574년 음력 4월 20일.. 41세의 제봉 고경명은 무등산에 올랐다.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참으로 산은 우리 인간에게 말없이 교훈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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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기록...임란 때 제봉 삼부자의 활약 내용과 충절의 사실을 기록한 것
[격문, 통문, 각종편지 등을 모아 만든 책]
[고경명의 아들 [유후]가 이 책을 편찬하고, 막내아들[용후]가 증보 간행함]
[정기록 서문...윤근수, 이덕형, 이항복 등]
4)제하휘록...고씨 문중의 갖가지 내용을 정리한 것
5) [제봉연보, 포충사지[포충사에 관한 문헌록] 등 여러 문적을 합쳐 간행함]
6)*식영정 4仙人
[석천 임억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제봉은 식영정 4선답게 현재까지 전하는 그의 시문은 985수에 이른다.
그는 의병장이기 이전에 문인으로서 선비요 시인이며 문장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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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경명 문적[시지정유형문화재 제21호]
[사후 관리를 위한 후손들의 노력과 나라에서 충신. 효자를 예우하기 위한 문서] 1)명문2점 2)입안문 1점 3)교지 4점 4)유물 2점 |
1)명문2점... 1601년 나라에서 고경명 3부자를 위해 포충사를 지어
춘추로 제향하도록 하고, 사액까지 내리니 고경명의 부인과 아들들이 감격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전답과 노비를 영원히 포충사에 헌납한 일을 기록한 것
[명문 2점....포충사 관리의 중요한 자료]
2)입안문 1점...재산의 헌납에 관한 관청의 인가 증명서
[입안문서는 [충효지가]에 대한 국가의 예우를 말할 수 있는 자료
3)교지 [4점]
*고경명이 문과에 장원급제 했을 때 받은 교지
*제봉 고경명이 의정부 좌찬성 증직과 [충렬공]시호를 받을 때 교지
*준봉 고종후가 이조판서 증직과 [효열공]시호를 받을 때 교지
*학봉 고인후가 의정부 영의정 증직과 [의열공]시호를 받을 때 교지
4)유물 [2점]...마상격문 과 세독충정
[*제봉 고경명이 직접 쓴 마상격문]
[☸馬上檄文☸]...말안장에 앉아
고경명 선생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의병을 모아 출전하던 중
관군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 해 5월에 고경명은
각도의 수령과 사대부, 선비 ,전직관료, 식자층 등 백성, 군인들에게 격문을 보내는데
이것이 말위에서 쓴 그 유명한 [馬上격문]이다.
이 격문은 당시 식자층을 감동시켰고, 많은 의병들을 결집시켰다.
식자들의 심금을 울린 이 격문을 후대 사람들은
최치원의[토황소격문]이나, 제갈량의 [출사표]에 비견되는
명문으로 평가한다.
[**馬上檄文...조선의 명 연설문...1592. 6. 24***]
[경명은 晩節의 丹心이요, 흰 머리의 선비다.
밤중에 닭소리 들으니 난리를 감당할 수 없으나 中流의 돛대를 치면서
외로운 忠誠을 다짐한다.
다만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忠誠만을 품고,
모기나 등에가 태산을 짊어질 힘이 없음을 생각지 아니한다.
이에 드디어 의병을 규합하여 바로 서울로 향할 것이니,
소매를 떨치고 將壇에 올라 눈물을 뿌리어 여러 동지에게 맹세하노라.
곰을 치고 범을 잡는 장수들이 우레같이 일어나고 바람같이 달려오며,
말을 뛰어 타고 關門을 뛰어 넘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비오듯 몰아온다.
대개 협박당하여 응하거나 강요하여서 쫓아온 것이 아니고, 오직 臣子로서
忠義의 마음이 다같이 지성에서 나왔다.
국가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에 있어서 어찌 감히 작은 제 몸을 아낄 수 있으랴.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 지었으니 처음부터 직책상의 관직이나 지역에 상관이 없고
군사는 正義가 힘이니, 强하냐 弱하냐는 논할 바가 아니다.
후략......
***[제갈량의 출사표]***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에 감복해 유비를 도왔는데, 유비의 숙원인 북방의 [위]나라 땅을 수복하지 못하고 유비가 철천지한을 품고 죽으면서, 유비가 북방을 수복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이윽고 북방의 [위]나라를 치기위해 떠나던 날 아침 유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유선]왕 에게 군대 거병의 상소문을 올린 출사표의 명문 [출사표의 [출사란...군대를 거병하는 것을 뜻하고 [표란...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형식의 상소문을 뜻한다.] |
***[최치원의 토황소격문]*** 신라 말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 6년만인 18세에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벼슬을 지내다, 당시 당나라 농민 [황소]가 일으킨 [황소의 난]이 크게 세를 떨치자 [황소의 난]을 토벌해야 한다는 격문을 써서 난을 평정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준 당나라에서 뛰어난 문장 솜씨를 인정받은 [토황소격문] |
*제봉 고경명이 직접 쓴 세독충정 휘호
7) *☸세독충정(世篤忠貞)☸.....[충효정신과 애국정신, 선비정신]
[임란 의병장 고경명 선생이 평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실천하였다는 좌우명.]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
[篤.....도타(두터울)울 독, 貞.....곧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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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인 의병대장으로서의 고경명,,,,,[59세에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낙향함]
1)임란 초기 담양 추성관에서 6천여명의 호남 의병 창의
2)60세의 고령에도 의병대장으로 추대
3)두 아들 종후, 인후, 종사관 곡성출신의 유팽로, 남원출신의 안영 등과 의병 6천여명을 출병시킴.
4)금산성 전투에서 둘째 아들 고인후와 종사관 유팽로, 안영과 수많은 의병들과 장렬히 순절함
5)큰아들 종후는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수많은 의병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의병]을 창의해 경상도 진주성 싸움에서 혈전을 벌이다 진주성이 함락 되자
호남의 의병장 나주의 김천일, 화순의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해
장렬히 순절한 촉석루의 삼장사로 진주의 창렬사에 배향 됨
6)충노 봉이와 귀인은 주인을 위해 충성과 의리를 지키다 장렬히 순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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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순절 후 국가로부터 받은 추숭[포충 공로]
1)사당 건립...1601년
2)1603년 [포충]이라는 사액을 선조로부터 받아 사액사당의 되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전국의 1,700여개 서원 가운데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 되었는데,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포충사는
훼철되지 않은 호남의 대표적 서원으로 현재 호남의 호국선열의 대표적 유적지다.
3)추증과 시호 받음
고경명과 두 아들은 모두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한 문인으로서
사후 제봉 고경명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충렬공]시호 교지를 받고,
첫째아들 고종후는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효열공]시호를,
둘째아들 고인후는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열공]의 시호를 받음
4)딸은 정유재란 때 남편이[영광의 노상용] 순절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라에서 제봉家에 [충,효,열]정려를 내려
현재 장군의 생가 제봉산 자락 압촌동에 [삼강문]이 세워짐
5)제향 때 왕명으로 사제관을 파견하여 제례집전
6)충노 봉이와 귀인도 주인을 위해 충성과 의리로 순절하자 [충노비]가
세워져 매년 4월 15일 제향일에 함께 제사를 드림
7)고경명은 충남의 금산 칠백의총의 위패를 모신 종용사 앞 와평에 순절비가 세워져 있고,
장성의 제봉산에 하사받은 사패지 사방 10Km의 넓은 묘역의 묘소에는
비석과 신도비가 세워져 있어 정기관에 탁본하여 전시함
8)광주시에서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려 [제봉로]라는 도로명과
월드컵 경기장 무궁화동산에 장군의 기마상을 건립해 애국충절을 기림
9)1978년 호국 유적지 지정[포충사정화기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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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충효열]고씨 정려 삼강문
[현판 승훈문] |
고씨삼강문은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고경명(1533∼1592) 선생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문으로,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의 7명이 표창되어 있다.
1충(忠)은 고경명,
3효(孝)는 그의 장남 종후, 차남 인후, 손자 부금이며,
2열(烈)은 그의 딸 장흥고씨와 조카며느리 광산정씨,
1절의(節義)는 그의 동생 경형이다.
고경명은 조선 명종 13년(1558)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24년(1591)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차남 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현존 건물은 1844년에 세운 것으로 지붕 옆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에
앞면 4칸·옆면 1칸이다.
사방에 홍살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차단하였으며,
앞뒤 2열로 현판을 걸었고, 건물 밖에는 담장을 두르고 외삼문을 세웠다.(문화재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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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南을 義鄕 이라고 부른다, 왜?***
이는 [징 한 기질]에서 온 것으로 본다.
호남지방의 방언에 흔히 쓰는 [징 하다]라는 말은
[앗 따, 징 하다], [워-매 징 한 것], [저, 징 한 놈 좀 보소]등에서
사용하는 바와 같이 그 내포 된 의미는
[무섭도록 끈질기고 악착같이 엉겨 붙어 끝장을 내고 말며,
무섭도록 끝까지 붙들고 물고 늘어지는 상태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표준어의 [징그럽다]나 [쟁그럽다]는
보기에 불쾌하도록 흉하고 끔찍하다든가,
만지거나 보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가 아니라
[악착같은 끈기, 끝장을 보고 마는 패기의 뜻이 간직되어 있다.]
민속놀이에서 [이, 징 한 기질]을 그대로 표출되고 있으니
호남지방의 줄다리기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참여하여
끝장이 날 때까지 며칠이고 계속된다.
또, 고싸움이 패기 넘친 악착같은 놀이로 정월 16일에 시작 된 놀이로
진편이 도전하면 재차 붙고 하여 스무날 까지 계속 된다.
그래도 승패가 나지 않을 때에는 2월 초 하루날 [고]를 풀어
줄을 만들고 이 줄을 당겨 승패를 가린다.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편싸움 놀이들은
악착같은 끈질긴 투지와 일사불란한 통제력 밑에 협동심을 바탕으로 한
패기가 충천하는 승벽심을 필요요건으로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징 한 기질]이 바탕이 된 [징 한 놀이]이다.
이 같은 민속놀이에 투영 된 [징 한] 기질은
불의에 항거하는 기질로 나타난다.
임란직전에 중앙정부의 부패상에 격분하여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자진한 전주의 [정여립]을 비롯해서,
탐관오리 제거와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동학민중의거와
전남 암태도의 농민항거,
나아가 식민지 교육정책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모두 호남 땅의 호남인에 의해서 주도 되었다.
이 사실이 앞서 말한 [징 한 기질]의 발현이다.
임란정유재란 때 고경명 일가를 비롯해, 김덕령, 김천일, 최경회 등이
의병을 일으켜 왜구에 항거한 것도 이 같은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의병 전체의 60%가 호남출신들로 나타나고 있는데,
앞에서 열거한 인사들이 선두에 서서 의병을 일으키려 해도
민중의 호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민속놀이에 투영 된 [징 한 기질]을 갖고 있는 호남인들이기에
이들을 따랐고, 끝내는 장렬한 죽음으로 끝장을 내고 만 것이다.
그러기에 호남인은 언제나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위해 투쟁하여 왔다.
이 같은 기질은 설화에도 나타나고 있으니,
이태조가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전국의 산신에게 허락을 받고 돌아다닐 때
지리산 신이 불응하므로 경상도 땅에 있던 지리산을 전라도로 귀향 보냈다고 전하고,
또 광주의 무등산 신도 끝까지 이를 거역하였다는 민담이
이 호남지방에 널리 전승되고 있다.
이는 호남이 의향임을 뒷받침해주는 설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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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향 광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광주5.18민주화운동은 신군부의 독재에 항거하는 두 불의의 세력에
의한 이들의 실제적인 억압이 義를 촉발시켰다.
*광주의 의병사...[포충사와 충장사]
1.김덕령...무등산의 사나이[충장공, 충장사, 무등산...수많은 전설]
[충절을 다했던 의병장 김덕령이 오히려 국가 권력에 의해서 역적으로 몰려
형장에서 매를 맞다가 죽음으로 인해서,
지역민들은 그의 애통한 심경을 무등산의 전설로 새겨 놓은 것이다.
의병장으로 倡義도 그렇고 그가 가졌던 忠義정신도 義를 현창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의 세력으로 간주되는 중앙권력에 의해
역신으로 몰려 죽은 김덕령을
지역민들이 해원의 차원에서 많은 전설을 만들어 냈다.
김덕령과 무등산과 연결되는 고리가 수많은 민간전설이 있듯이
고경명과 광주가 연결되는 고리 역시
[고싸움]이라는 민속놀이가 아닌가 싶다.
고경명이라는 인물자원과 고싸움이라는 민속자원이 서로 연계
고경명의 충의정신이 발현 된 하나의 사례로서
고싸움에 대한 내용적 측면과 가치현창에 대한 방법적 고민이 있다.
2. 고경명...1533년 광주남구 대촌동 압촌 부락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몽진을 하게 되자 倡義하여 6천여명의 의병을 모집, 두 아들 종후, 인후와 함께 참전했던 당시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전장에서 두 아들과 함께 순절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현재 광주 포충사, 금산의 성곡서원, 종용사
순창의 화산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의병은 국가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국민스스로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 충장공 김덕령**(1568-1596)☸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으나
이몽학 반란과 연류된 소문으로 인하여 국문을 받아 목숨을 거둠
[어머니 상중에 거병]
1)이몽학...왕손의 서얼
김덕령은 반란군 진압을 위해 가던 중 반란이 평정되어 되돌아옴
[김덕령만 반란군 진압에 호응함, 한음 이덕형과 권율은 참여 안함]
2)김덕령의 출중한 용력 때문에 시기한 사람이 많았다.(겸손하자)
3)선조 임금 앞에서 친국을 6차례 받으면서도 머리 숙이지 않고 의연한
태도에 선조임금의 괘씸죄로 죽음을 당함
4)장군의 죽음에 전라도 사람들이 다 울었다고 함
5)김덕령의 짧은 생애 흔적은 신화적 존재로 각인
6)옥살이중 지은 춘산가.(사직공원에 시비가 세워짐)
7)취가정 주인... 광해군 때 유명한 시인 권필의 꿈에 나타나 김덕령의 취시가
8)형 김덕홍...고경명과 같이 금산전투에서 순절,
동생..김덕보:풍암정사 *광주 충효마을,
[이몽학의 반란]...충청지역 장악(농민들 큰 호응...병력 수천에 달해)
선조29년(1596)7월 선봉장 한순의 군량 담당관 이몽학이 정산성에서
군사를 모아 충청도 주요 지역의 관아를 습격,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됨.
처음 반란을 지시한 것은 한순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몽학은 부여 도천사에서 모의 김경창, 이운, 승려 능운 등과 함께
6-7백명의 군사를 모아 충청도 일부를 점령하고 나서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는 식으로 점령지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데
추종세력이 늘어나 그 병력이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 됨
[이몽학]은 적장 가토가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니
의병을 일으켜 이를 치자는 말로 군사를 모았는데,
각종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이 호응 삽, 몽둥이를 들고 반란군에 가담함.
특히 5도가 같은 날에 군사를 일으켜 한성에 쳐들어가는 데
의병장 김덕령과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도아 주며,
병조판서 이덕형, 각도의 병사와 어사들이 호응하고 있다]는
이몽학군의 유언비어 작전이 먹혀들어 가면서 정부의 대응에
혼선이 빚어진 반란사건.
[춘산의 불이 나니 - 김덕령 -]
춘산(춘山)의 불이 나니 못다 픤 꼿 다 붓난다
져 뫼 져 불은 끌 물이나 잇거니와
이 몸의 내 업슨 불이 나니 끌 물 업서 하노라.
<김충장공유사, 근화악부>
[현대어 풀이]
봄 동산에 불이 나니 미처 못다 핀 꽃들이 모두 불에 타 죽는구나.
저 산의 저 불은 끌 수 있는 물이나 있지만
이 몸의 연기 없는 불은 끌 수 있는 물이 없구나.
[창작 배경]
작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무인이나, 반란군 이몽학과 내통이 있다는 모함으로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였다. 그 일로 인해 옥에 갇히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노래한 시조이다.
[이해와 감상]
초장의 '춘산의 불'은 '임진왜란'을 비유한 것이며, 못다 핀 곳'은
전쟁을 통해 수없이 쓰러져 간 꽃다운 나이의 청년들 내지는 할 일을
다 못하고 죽어가야만 하는 자기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중장의 '물'은 전쟁에서의 승전이나 화해 등을 비유한 것이며,
종장에서 말한 작자 자신에게 일어난 '내 업슨 불'은 '알아 주는 이 없는 억울한 심정'을 비유한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뜻하지 않은 억울한 상황을 갑작스럽게 '불'이 난 것으로 표현한 점이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현명하지 못한 임금과 간신배가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진정한 애국 충렬이, 유용한 명장이 화를 입고, 국운이 더욱 기울어져 버리는 실례를 우리는 역사상에서 흔히 접할 수가 있다. 젊은 용장 김덕령의 경우도 그것의 하나이다. 훌륭한 인재가 불의의 희생이 된다는 것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정리]
□ 성격 : 평시조, 한탄가
□ 표현 : 비유적 심상
□ 주제 : 자신의 억울한 신세를 한탄함.
□ 지은이 : 김덕령(1567~1596) ―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 '조선의 조자룡'이라 불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조좌랑으로 의병을 일으켜 20대 젊은 나이에 익호 장군이란 칭호를 받았다.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용맹을 떨쳐 왜군이 감히 범접하지도 못하였으나, 반란군과 내통하였다는 이몽학의 모반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고문을 당한 후 옥사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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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군 정충신(1576년 선조 9년 광주에서 정지장군 9대손으로 태어남)☸.
1. 지혜와 용기로 국난을 극복한 금남군 정충신
2. 17세에 임진왜란 때 (1592년 7.8-9) 이치전투에 참여하여 권율의 명령으로
의주 행제소에가서 장개를 올림. 이항복의 눈에 들어 벼슬
3. 신동으로 17세에 무과급제
4. 조선에 출영하여 기고만장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마음을 눌렀다는 일화
5. 후금(청)의 적지에 들어가 적의 형편을 살피고 북방 호적들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예언을 함
6.안주목사 시절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움
(1636. 인조 14년 62세로 숨을 거둠)
7. 하동 정씨 가문의 서얼로 태어나 경렬사에 배향되지 못함
8. 장군의 업적을 기려 광주 중심가에 금남로 이름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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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렬사 정지 장군☸.
1)고려말 왜구를 몰아내고 절의를 지킨 명장
2)나주에서 1347년(충목왕 3년)태어나서 1391년(공양왕 3년)에
45세의 나이로 광주별장에서 세상을 떠남
3)해군사령관으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움
4)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성계 일파가 제의한 벼슬도
거부한 충의와 절개가 굳기로 이름난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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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전상의 장군☸.
1)정묘호란 때 안주 남영인 백상루에서 후금(청)3만대군을 물리치다 순절한 장군
2)전상의 장군은 1575년(선조 8년) 광주 구동에서 태어남
3)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활솜씨가 뛰어남
4)선조 3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첫 벼슬길에 오름
5)광해군 9년(1617)에 회답사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우리 동포 150여명을 외교적 담판으로 귀국시킴
6)광해군 교지로 어모장군이 되어 광해군의 신임을 받음
7)인조반정으로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좌천 됨
8)인조 5년(1627)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안주성 남영인 백상루에서 적군과 장렬히
싸우 다 순절함
9)병조판서 증직 교서를 받고 광주 북구 화암동 평두산에 예장으로 묻힘
9)숙종 때 충신 정려를 받아 정려각이 세워짐
10)후손들에게는 완문과 완약이 내려져 부역이나 세금이 면제됨
11)1985년 장군의 사당인 충민사를 세워 충절의 교육도장으로 활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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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의 7명이 표창되어 있다.
1충(忠)은 고경명,
3효(孝)는 그의 장남 종후, 차남 인후, 손자 부금이며,
2열(烈)은 그의 딸 장흥고씨와 조카며느리 광산정씨,
1절의(節義)는 그의 동생 경형이다.
현판에는 열녀와 효자들의 칭송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세독충정
고경명 선생의 좌우명으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한다" 라는 내용이다.
'조아(爪牙)'란……? |
[충을 기리는 호남의 대표적 호국선열 유적지 광주 포충사.] [광주광역시 지방기념물 제7호] [임란 때 호남의병의 주도인물 제봉 고경명 선생의 추모공간 포충사] ********************************************************** 이곳은 임진왜란 초기 왜병에게 관군이 계속 참패하자 국난극복을 위해 60세의 노구로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담양 추성관에서 호남의병을 규합 창의하여 6천여명의 의병을 출병시켜 7월10일 충청도 금산전투에서 혈전을 벌리다 장렬히 순절한 고경명, 고인후 부자를 비롯한 종사관 유팽로, 안영과 이듬해 복수의병을 결성 진주성에서 항전하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첫째 아들 고종후. 이들 삼부자의 순절은 호남의병활동을 촉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곳 포충사는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와 종사관 유팽로, 안영을 포함한 다섯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사당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전국의 1,700여개 서원 가운데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 되었는데, 호남에서 유일하게 장성의 하서 김인후 필암서원과 광주 제봉 고경명 포충사만 훼철되지 않은 호남의 대표적 충절의 사액사당 존치로 역사적 위상을 고양시키고 있다.
임진왜란 때 [충]의 자랑스런 인물 충렬공 제봉 고경명선생을 주벽으로 배향. [동벽에 고종후, 유팽로 ,,, 서벽에 고인후, 안영 배향] [제봉문집 목판...광주시지정 유형문화재 제20호] [식영정 4선인...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명종 때 62폭의 "어병어제화"시문, 제봉집, 유서석록, 정기록, 제하휘록, 포충사기, 제봉연보 등] 6천여명의 의병들과 출병하면서 쓴 마상 격문[전국 의병창의의 기폭제가 됨] [제갈량의 출사표, 최치원의 토황소 격문]과 비견되는 명문] [임란중 "일문충효열 정려" 사후 사액사당, 증직과 시호 교지] [일문충효열 만고강상[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 [충의의 두 종사관 유팽로와 안영, 충성과 의리의 충노 봉이와 귀인] ***[제봉문적...광주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21호]....9점** *교지4점[장원급제 교지, 3부자 증직과시호교지]**[명문2점과 입안문1점] *유물2점[세독충정 휘호, 마상격문] ☸.서원훼철령에도 존치된 전국 47개 원사 중 호남의 대표적 사우 [*1603년 [포충]이라는 사액을 선조로부터 받아 사액사당이 되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전국의 1,700여개 서원 가운데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 되었는데,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포충사는 훼철되지 않은 [일문충효열] 위상이 드높은 호남의 대표적 사액 사당으로, 현재 호남의 호국선열의 대표적 유적지다.] ☸현재 지방기념물을 국가지정 유적지로 승격 시키기 위해 노력 중 [한석봉이 쓴 포충사 편액(1603년 宣賜)] ☸.호국선열 유적지로 정화사업☸. **1978년 박정희 정권시절 제봉산 자락에 애국충절을 기리는 호국선열유적지로 1만3천 여평에 정화사업이 시작되어 충렬공 제봉 고경명 의병장과 효열공 종후, 의열공 인후 그리고 종사관 유팽로와 안영의 위패를 모신 새 사당[포충사]와 유물전시관인 정기관, 내외삼문, 정화기념비, 관리사무소, 한글판 포충사묘정비 등과 주변 환경정화로 1980년 만3천여평에 정화사업을 완성하여 호남제일의 애국충절의 교육도장과 시민들에게 휴식의 힐링 쉼터를 제공하고 있는 호국선열의 유적지다. ******************************************************************************* 포충사우가[병인](褒忠祠宇歌[幷引]) 현판(포충사 전시관) [1614년 청음 김상헌이 제봉 고경명의 충절을 추앙하여 지은 글.] [ 일종의 제봉 일대기 형식의 시가(詩歌).] [幷引(병인)...‘포충사우가’라는 본문 詩歌에 앞서 그 경위를 짧게 적은 글(引)을 함께(幷) 쓴다는 것.] [서문, 자기의 뜻을 부연하여 함께 서술하는 것] ****************************************************************************************** 김상헌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적인 인물로 17세기 병자호란 때 척화신(斥和臣)으로 .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어 끌려가면서 읊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는 시대를 넘어 회자되고 있다. *********************************************************** 포충사우가[병인] (褒忠祠宇歌[幷引])는 1)광주와 무등산의 입지와 역사성, 2) 제봉의 출사와 행적, 3)임진란 의병 창의, 의병군의 활약과 순절, 4)사우 건립과 추숭, 5)마지막에 다시 광주와 무등산 극락강으로 돌아와 그 정신 계승되기를 축원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褒忠祠宇歌[幷引...첫머리는 광주는 들이 넓고 기름져 [光州之野 彌迤漫衍沃饒] 호남의 명도(名都)로 불리웠네. [曰湖南名都] 무등산 높이 솟아 하늘을 찌르고 [無等巉嵓 穹窿揷雲漢] 그 아래 극락(極樂)의 호수 맑게 흐르네. [其下極樂之澄湖] ******************************************************* 널찍하고 기름진 들녁의 호남 명도 광주. 높이 솟은 무등산과 그 아래 흐르는 맑은 강. 한마디로 광주를 잘 나태내고 있다. 두어마디 짧은 글이지만 산과 강도 잘 표현 했다. 가벼운 듯 하지만 광주를 잘 나타냈다. ******************************************** 정기관에 그려진 창의 그림 가운데 있는 분이 제봉 고경명선생이다.
***************************************************** [褒忠祠 정화기념비] 임진왜란 때 선비로서 창의격문을 지어 전국에 돌리고, 의병을 일으키어 겨레와 강토를 지키고, 갈팡질팡하는 백성들을 깨우쳐서 의병대열에 서게 하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왜병들을 몰아내다가 의로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 분이 우리겨레가 추앙하는 충렬공 제봉 고경명 선생이다. 선생은 중종 28년 서기 1533년에 광주에서 태어나서 선조 25년 서기 1592년 임진4월에 불의로 왜적이 침범해오자 이를 몰아내기 위하여 그해 5월에 호남 의병 7천명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그해 7월에 전사하니 향년 60세로 절사하였다. 둘째 아들 학봉 인후도 같이 전사하였으며, 맏아들 준봉 종후 역시 군사를 일으키어 복수장으로서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려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아! 장하도다. 어버이는 나라위해 순절하고, 아들은 어버이 원수 갚다가 순절하니 忠과 孝가 같이 빛나도다. 그리고 선생의 따님도 정유재란 때 남편 따라 순절하니 忠孝에 烈이 더하여 一門 三綱의 이름이 높았도다. 글 읽는 선비로서 뜻을 숭상하지 않은 이가 없지만, 능히 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이는 드물고, 조행을 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지만 능히 國亂을 당하여 殉節로써 뜻을 지킨 이는 적다. 더구나 文學에 뛰어나면 行實이 따르기가 어렵고, 行實이 敦篤하면 學文이 따르지 못함이 상사인데, 先生의 3父子는 모두 文科에 及第한 文學에 뛰어난 분이지만, 國亂을 당해서 나라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쳤으니 온 겨레가 모두 그 뜻과 행실을 우러러 보았다. 後學들이 이곳 제봉산에 祠堂을 세우자 [포충사]로 賜額되어 선생을 主壁으로 두 아드님 [효열공 준봉]과 [의열공 학봉] 그리고 같이 의병으로 순절한 [증 좌승지 월파 유팽로] [증 좌승지 청계 안영]등 다섯 분 선생들의 祭享을 받들어 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민심이 쇠퇴하여 민족정기를 다시 드높이고 충효정신과 호국정신을 더 한 층 선양할 때가 되자 1978년 민족정신을 드높이자는 국가의 시책에 따라 문화공보부와 전라남도가 정성을 다하여 포충사 성역화 공사를 담당하였다. [포충사]는 湖南의 代表的인 護國聖地로 定하여 이에 完工하였으니 우리 국민은 선생의 忠義精神과 義士들의 護國精神을 더 한 층 본받아야 할 것이다. 西紀 1980년 6月 [강수진 짓고, 구철우 쓰다] ************************************************************************ 포충사 ‘한말의병비석’ 6·25전쟁중에 건립” [한말 의병 비석은 광주 남구 원산동 포충사 옛 사당 홍살문 앞에 있다.] 한말의병비석은 높이 190cm, 폭 50cm로 앞면은 [호남순국열사지비], 뒷면은 고광순, 황현 선생 등 한말 의병장 2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석은 1951년 정월 15일 6·25전쟁중에 건립되었다. [비석의 큰 글씨는 이시영 이 씀] ********************************************************* ********************************************************* [2004년 6월 6일 초유사 학봉 김성일 선생의 15대 종손과 일행 200명이 심은 주목] 광주광역시 남구에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 종후(從厚,1554~1593), 인후(因厚,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1554~1592) ·안영(安瑛,1564~1592)을 기리는 포충사(褒忠祠, 광주시 기념물 제7호)가 있다. 1603(선조 36)년 고경명의 후손과 제자인 박지효(朴之孝) 등이 임금에게 청하여 포충(褒忠)’으로 사액 받은 대원군이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서원이다. 1980년 사당과 유물전시관(正氣館), 내외삼문, 정화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새로 세우고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를 했으나 옛 사당과 동 ·서재는 본래위치에 그대로 보존했다. 소장된 제봉집 목판(광주시 유형 문화재 제20호)과 문적(文籍)은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 21호)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주향(主享)인 제봉((霽峯) 고경명은 대과에서 장원할 정도로 수재였다.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학업에 열중하던 중 임란이 일어났다. 이때 공의 나이 60이었다. 격문을 돌리니 6,000명이 모였다. 6월 1일에 담양을 출발하여 6월 13일에 전주에 도착했다. 큰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는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군을 막도록 하고, 22일에는 여산(礪山)으로 옮겼다. 27일 은진(恩津)에 도달해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점차 호남에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연산(連山)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금산(錦山)에 도착해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그 후 맏아들 종후는 진주성 싸움에서, 딸은 정유재란 때 남편을 따라 순절했다. 이 때 민간의 신분으로 호남에서 창의했던 제봉과 달리 영남에서는 선조가 임명한 관직(官職)을 가지고 활동했던 분이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다. 학봉은 임란(壬亂)하면 선조와 더불어 연상되는 인물의 한 분으로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가서 실정을 살핀 후, 귀국하여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하여 논란에 중심에 서 있던 분이다. 난이 일어나자 류성룡의 천거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어 의병들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며, 전주성을 방어하는 등 전란수습에 동분서주 하다가 진중에서 병사했다. 7년의 임란은 많은 사상자를 냈고,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제봉집안도 예외 일수 없었다. 막내아들 고용후는 가솔 50여 명을 이끌고 광주에서 경상도 안동의 학봉 집을 찾아가 위탁했다. 학봉의 손자 김시권은 멀리서 찾아온 고용후에게 ‘자네나 우리나 두 집이 다 같이 난리를 만나서 자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는 조부님이 돌아가셨으니 서로 마찬가지네. 그렇다고 학문에 힘쓰지 아니하면 나중에 옷 입은 짐승이 아니겠는가?’ 라고 위로하며 각오를 다졌다. 학봉 손자 김시권은 1593년 진주성에서 할아버지를 잃었고, 고경명의 막내 고용후는 아버지와 둘째 형(고인후)을 1592년 금산전투에서 잃었고, 큰 형(고종후)도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에 패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 터여서 두 사람은 동병상련이었다. 이렇게 굳게 언약했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1605년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하고 고용후는 1606년(선조 39), 김시권은 1630년(인조 8)에 대과에 급제해 피란시절의 악속을 지켰다. 1617년(광해군 9) 고용후는 학봉의 종가가 있는 안동 부사(府使)가 됐다. 그리고 학봉의 부인(김시권 할머니)과 학봉 큰아들(김집)을 초청해 보은의 잔치를 열었다. 고용후는 큰절을 하며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라며 울먹였다.’ 라고 했다. (2015,9,4 매일신문 논설위원 정인열의 글 중에서) 이런 400여 년의 오랜 인연에서였는지 포충사 경내에는 2004년 6월 6일 학봉의 종손 김종길(金鍾吉) 외 200명이 주목(朱木) 한 그루를 심고 푯말을 세웠다. 비록 작은 나무이기는 하나, 영호남을 대표하는 명문(名門)인 두 집안에 얽힌 아름다운 미담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증표이기도 하지만 동, 서를 화합할 수 있는 단초도 될 수 있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위치가 연못 부근의 좌측 끝자락 외진 곳이라 일부러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곳이고, 푯말의 재질이 나무라 오래 가지 않을 것 같아 아쉽다. ************************************************************************* [충노비] 충노(忠奴)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의 비석. ** 포충사 경내 좌측에 있는 옛 사당으로 올라가는 입구 홍살문 옆에 신분 구별이 엄격하던 시절 두 노비의 주인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기리기 위해 충노(忠奴)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들 두 사람은 고경명 집안의 노비로 있다가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 국난을 당해 신분을 초월해 주인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금산 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하여 1592년 제1차 금산성 전투에서 제봉 고경명과 둘째 아들 고인후 부자가 순절하자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지냈고, 그 이듬해 다시 고경명의 큰 아들 고종후를 따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주인과 함께 순절한 충의의 인물이다. 국난을 당해 신분을 초월한 자기희생을 기리기 위해 고씨 가문에서 자연석에 새긴 비석으로서 이들의 희생과 충의정신을 기리고 있다. 두 家奴를 보면 주군으로 모시는 고경명 선생이 평소 어떻게 하인을 대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이 나면 도망치기 바쁠 것인데 자기를 거두어준 주인을 위하여 충성과 의리를 보여준 두 하인을 통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노비까지 걱정했던 고경명 가문다운 마음씀씀이가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와 가슴까지 어느덧 온기로 데워진 듯 한 느낌을 받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 ******************************************************************** 이곳 포충사 뒷산 제봉산은 400여년 쯤 된 낙락장송들이 시대의 이모저모를 나이테 하나하나에 레코드판 처럼 간직하고 있어 [명종 때 62폭의 "어병어제화"제봉시문의 병풍이 둘러쳐진 듯], [임란 때 호남의 6천의병들이 결의에 찬 모습들로 소나무로 환생되어 도열해 있는 듯] 보는 것만으로도 엄숙하고 경건함을 갖게하는 곳 [충을 기리는 포충사.] 역사의 회한을 막바지 여름 끝자락에 나만의 사유의 시간을 갖는다면......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 듯 피어나던 사당앞 백일홍들도 소명을 다한 듯 무슨 사연 그리 많은지 우수수 꽃비만 훝날리고, 여름 막바지 매미소리만 해설사의 기가폰 소리와 함께 어울리는...... 낙낙장송 소나무 그늘의 가을 맛보기 시원한 바람이 땀흘려 칙칙한 몸을 포송포송 기분좋게 한 곳. 구사당의 묘정비 앞 6각형 거북등걸 모양의 노송의 소나무그늘 벤취에 앉아 광주의 8경중 하나인 대촌들녘, 삼복을 이겨낸 벼들이 3마디로 자라 이삭을 피운 풍요로은 논밭들, 허공을 맴도는 빨간 고추잠자리, 유난히 붉게보이는 빨간고추 이모저모 가을이 다가온 모습들이 이렇게 정겨울 수가 있을까요. 멀리 나주 혁신도시의 마천루처럼 우뚯솟은 한전 빌딩 [본인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즐기는 모든 활동]의 줄인말 [본.자.즐.모]하면서... [세독충정] 제봉선생의 좌우명을 다시한 번 곱씹어 현재를 살아간 우리들에게 내 삶을 유추해보는 시간을 갖지 않으시렵니까......? 하루해가 서산 마루에 걸쳐 숨박꼭질하네요. 저도 하루의 해설사 해설봉사활동 마무리 할 시간이네요' 함께한 시간 감사 인사드립니다. 포충사 광주문화관광해설사 이원창 입니다. ********************************************** [生...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느티나무는 그늘을 쌓고, 배롱나무는 햇살을 쌓는다. 느티나무는 마을로, 배롱나무는 무덤[사당]으로 간다. 느티나무에서 배롱나무까지 파란만장. 나비가 난다, 바위에 앉은 나비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호수에 잠긴 구름은 체온을 남기지 않는다. 바다는 뱃길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문무겸전 세독충정의 충의지사 제봉고경명 선생은 [일문충효열], 충을 기리는 사액사당 포충사를 남겨 호남지방의 대표적 호국선열의 유적지로, 애국충절의 교육도장과 시민들에게 휴식의 힐링 쉼터를 남기고 있다.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나는 노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젊지 않은 사람일 뿐이다.*************************************** ******************************************* 본인은 [수. 토]일에만 포충사 문화관광해설활동을 하고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되신분은 포충사를 방문한다면 환영합니다. 옛날 추억의 맛을 되살리는 시골 돼지국밥에 소주한잔...함께 할수있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 *********************************************************************** *** 조선시대 나라로부터 忠臣旌閭를 받은 의향의 고장 [광주의 3忠臣]*** 1)임진왜란 때 의병장 포충사의 충렬공 제봉 고경명[일문 충효열 고씨 정려 삼강문] 2)임진왜란 때 의병장 충장사의 충장공 김덕령[충효리 정려비각] 3)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순절한 충민공 전상의장군[숙종 때 충신 정려 정려각] **************************************************************************** **************************************************************************** ***. 光州의 대표적인 祠宇*** 1)고려 말 해군의 영웅으로 왜구를 물리친 명장....경렬공 정지장군 경렬사 [정지장군 예장석묘] [경렬로] 2)임진왜란(조선선조)때 호남의병 6천여명을 을 창의하여 충남 금산전투에서 둘째 아들과 종사관 및 수많은 의병들과 용전분투 혈전을 벌리다 60세의 나이로 장렬히 순절한 의병장 충렬공 제봉 고경명의 포충사][사액사당][제봉로] 3)임진왜란(조선 선조)때 무등산 전설의 주인공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의 충장사[충장로] 4)정묘호란(조선 인조)때 청나라 3만 대군과 안주성 싸움 중 53세의 일기로 순국한 충민공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전상의장군 예장석묘][구성로] ******************************************************** ********************************************************** [조선 시대 임진왜란의 시대적 배경] ***임진왜란 초기*** 1. 文중심의 붕당정치로 군역의 문란으로 군사력의 약화 2. 1591년[선조 24년] 일본 통신사들의 학파, 정파에 따른 증언 1)서인 정사 황윤길...일본이 많은 전함을 준비하고 곧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함[율곡 이이의 기호학파...서인][이율곡의 10만 양병설] 2)동인 부사 김성일...풍신수길의 눈이 쥐와 같은 것을 보아 군사를 일으킬 위인이 못 된다며 전쟁 가능성을 부인함.[퇴계 이황의 영남학파...동인] 3)결국 실권을 쥔 동인편의 말을 듣고 서인들은 유배시켜, 사전 전쟁 대비를 못한 점 [일본의 승려 현소...일본이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귀국함.] 3. 일본은 풍신수길이 전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무기 조총을 앞세 700여척의 전함에 15만 8천여명의 원정군으로 1592년 4월 14일 부산을 침공함 4. 관군의 패배와 선조임금의 평양 피난과 의주몽진 *동래성함락[동래부사 송상현 전사] *충주전투 패배[조령...문경새재]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 [일본군은 20여 일만에 한성을 점령하고, 60여 일만에 평양에 진격하였으니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조선을 유린하였던 것이다. 5.임진왜란은 1592년(선조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7년 동안 계속되며 조선에 처참한 피해를 남겼다. **임진왜란의 반전** 1. 이순신 장군의 해상 재해권 장악으로 일본군의 보급 물자 차단 2. 군대와 관리들의 무능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지방의 사대부, 선비, 식자층,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3. 제봉 고경명의 6천여명의 호남 의병창의와 금산전투의 혈전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창의의 기폭제가 됨 ******************************************************* 임진왜란 이전의 왕은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유일한 정점이었지만, 왜란의 발발로 선조 임금이 궁을 버리고 몽진을 가버리자 그 정점은 무너지고 말았다. 백성들은 나라의 상징인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갈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왜병이 도성에 닿기전에 궁궐로 난입하여 불을 지르고 파괴한 것은 바로 도성의 백성들이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던 시대의 막이 내린 것이었다. 그 이후 소위 당파싸움의 온상인 붕당정치가 형성되었고 대 부분의 사대부들은 국왕보다 자신들의 당수가 으뜸이 되어버렸다. ************************************************************************* ☸제봉 고경명 선생☸ [1.] 문인 선비로서의 제봉 고경명 선생... [제봉집 목판...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20호]
1)제봉집...고경명의 980여편 시문을 모은 시문집 2)유서석록"(遊瑞石錄).... 제봉 고경명 선생이 여러 사람들과 서석산[지금의 무등산]에 다녀온 기행문으로 순수한 제봉의 遺文이다. '유서석록'은 제봉 고경명(1533~1592)이 나이 41세 되던 해인 1574년(선조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당시 74세인 광주목사 갈천 임훈(1500~1584)의 일행과 함께 [5일간]에 걸쳐 무등산에 오른 감상을 4,800자의 순한문으로 기술한 기행문으로, 430년 전 16세기의 무등산과 그 인근의 모습을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무등산=화순 적벽=담양 소쇄원]
*************************************************************** 3) *정기록...임란 때 제봉 삼부자의 활약 내용과 충절의 사실을 기록한 것 [격문, 통문, 각종편지 등을 모아 만든 책] [고경명의 아들 [유후]가 이 책을 편찬하고, 막내아들[용후]가 증보 간행함] [정기록 서문...윤근수, 이덕형, 이항복 등] 4)제하휘록...고씨 문중의 갖가지 내용을 정리한 것 5) [제봉연보, 포충사지[포충사에 관한 문헌록] 등 여러 문적을 합쳐 간행함] 6)*식영정 4仙人 [석천 임억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제봉은 식영정 4선답게 현재까지 전하는 그의 시문은 985수에 이른다. 그는 의병장이기 이전에 문인으로서 선비요 시인이며 문장가 였다. ********************************************************************** [2.] 고경명 문적[시지정유형문화재 제21호]
1)명문2점... 1601년 나라에서 고경명 3부자를 위해 포충사를 지어 춘추로 제향하도록 하고, 사액까지 내리니 고경명의 부인과 아들들이 감격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전답과 노비를 영원히 포충사에 헌납한 일을 기록한 것 [명문 2점....포충사 관리의 중요한 자료] 2)입안문 1점...재산의 헌납에 관한 관청의 인가 증명서 [입안문서는 [충효지가]에 대한 국가의 예우를 말할 수 있는 자료 3)교지 [4점] *고경명이 문과에 장원급제 했을 때 받은 교지 *제봉 고경명이 의정부 좌찬성 증직과 [충렬공]시호를 받을 때 교지 *준봉 고종후가 이조판서 증직과 [효열공]시호를 받을 때 교지 *학봉 고인후가 의정부 영의정 증직과 [의열공]시호를 받을 때 교지 4)유물 [2점]...마상격문 과 세독충정 [*제봉 고경명이 직접 쓴 마상격문] [☸馬上檄文☸]...말안장에 앉아 고경명 선생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의병을 모아 출전하던 중 관군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 해 5월에 고경명은 각도의 수령과 사대부, 선비 ,전직관료, 식자층 등 백성, 군인들에게 격문을 보내는데 이것이 말위에서 쓴 그 유명한 [馬上격문]이다. 이 격문은 당시 식자층을 감동시켰고, 많은 의병들을 결집시켰다. 식자들의 심금을 울린 이 격문을 후대 사람들은 최치원의[토황소격문]이나, 제갈량의 [출사표]에 비견되는 명문으로 평가한다. [**馬上檄文...조선의 명 연설문...1592. 6. 24***] [경명은 晩節의 丹心이요, 흰 머리의 선비다. 밤중에 닭소리 들으니 난리를 감당할 수 없으나 中流의 돛대를 치면서 외로운 忠誠을 다짐한다. 다만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忠誠만을 품고, 모기나 등에가 태산을 짊어질 힘이 없음을 생각지 아니한다. 이에 드디어 의병을 규합하여 바로 서울로 향할 것이니, 소매를 떨치고 將壇에 올라 눈물을 뿌리어 여러 동지에게 맹세하노라. 곰을 치고 범을 잡는 장수들이 우레같이 일어나고 바람같이 달려오며, 말을 뛰어 타고 關門을 뛰어 넘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비오듯 몰아온다. 대개 협박당하여 응하거나 강요하여서 쫓아온 것이 아니고, 오직 臣子로서 忠義의 마음이 다같이 지성에서 나왔다. 국가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에 있어서 어찌 감히 작은 제 몸을 아낄 수 있으랴.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 지었으니 처음부터 직책상의 관직이나 지역에 상관이 없고 군사는 正義가 힘이니, 强하냐 弱하냐는 논할 바가 아니다. 후략......
*제봉 고경명이 직접 쓴 세독충정 휘호 7) *☸세독충정(世篤忠貞)☸.....[충효정신과 애국정신, 선비정신] [임란 의병장 고경명 선생이 평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실천하였다는 좌우명.]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 [篤.....도타(두터울)울 독, 貞.....곧을 정]) ***************************************************************** 2. 무인 의병대장으로서의 고경명,,,,,[59세에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낙향함] 1)임란 초기 담양 추성관에서 6천여명의 호남 의병 창의 2)60세의 고령에도 의병대장으로 추대 3)두 아들 종후, 인후, 종사관 곡성출신의 유팽로, 남원출신의 안영 등과 의병 6천여명을 출병시킴. 4)금산성 전투에서 둘째 아들 고인후와 종사관 유팽로, 안영과 수많은 의병들과 장렬히 순절함 5)큰아들 종후는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수많은 의병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의병]을 창의해 경상도 진주성 싸움에서 혈전을 벌이다 진주성이 함락 되자 호남의 의병장 나주의 김천일, 화순의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해 장렬히 순절한 촉석루의 삼장사로 진주의 창렬사에 배향 됨 6)충노 봉이와 귀인은 주인을 위해 충성과 의리를 지키다 장렬히 순절함 ********************************************************************** 3.순절 후 국가로부터 받은 추숭[포충 공로] 1)사당 건립...1601년 2)1603년 [포충]이라는 사액을 선조로부터 받아 사액사당의 되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전국의 1,700여개 서원 가운데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 되었는데,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포충사는 훼철되지 않은 호남의 대표적 서원으로 현재 호남의 호국선열의 대표적 유적지다. 3)추증과 시호 받음 고경명과 두 아들은 모두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한 문인으로서 사후 제봉 고경명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충렬공]시호 교지를 받고, 첫째아들 고종후는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효열공]시호를, 둘째아들 고인후는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열공]의 시호를 받음 4)딸은 정유재란 때 남편이[영광의 노상용] 순절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라에서 제봉家에 [충,효,열]정려를 내려 현재 장군의 생가 제봉산 자락 압촌동에 [삼강문]이 세워짐 5)제향 때 왕명으로 사제관을 파견하여 제례집전 6)충노 봉이와 귀인도 주인을 위해 충성과 의리로 순절하자 [충노비]가 세워져 매년 4월 15일 제향일에 함께 제사를 드림 7)고경명은 충남의 금산 칠백의총의 위패를 모신 종용사 앞 와평에 순절비가 세워져 있고, 장성의 제봉산에 하사받은 사패지 사방 10Km의 넓은 묘역의 묘소에는 비석과 신도비가 세워져 있어 정기관에 탁본하여 전시함 8)광주시에서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려 [제봉로]라는 도로명과 월드컵 경기장 무궁화동산에 장군의 기마상을 건립해 애국충절을 기림 9)1978년 호국 유적지 지정[포충사정화기념 사업] ************************************************************ [일문충효열]고씨 정려 삼강문
고씨삼강문은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고경명(1533∼1592) 선생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문으로,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의 7명이 표창되어 있다. 1충(忠)은 고경명, 3효(孝)는 그의 장남 종후, 차남 인후, 손자 부금이며, 2열(烈)은 그의 딸 장흥고씨와 조카며느리 광산정씨, 1절의(節義)는 그의 동생 경형이다. 고경명은 조선 명종 13년(1558)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24년(1591)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차남 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현존 건물은 1844년에 세운 것으로 지붕 옆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에 앞면 4칸·옆면 1칸이다. 사방에 홍살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차단하였으며, 앞뒤 2열로 현판을 걸었고, 건물 밖에는 담장을 두르고 외삼문을 세웠다.(문화재청 참조) *************************************************************** ***湖南을 義鄕 이라고 부른다, 왜?*** 이는 [징 한 기질]에서 온 것으로 본다. 호남지방의 방언에 흔히 쓰는 [징 하다]라는 말은 [앗 따, 징 하다], [워-매 징 한 것], [저, 징 한 놈 좀 보소]등에서 사용하는 바와 같이 그 내포 된 의미는 [무섭도록 끈질기고 악착같이 엉겨 붙어 끝장을 내고 말며, 무섭도록 끝까지 붙들고 물고 늘어지는 상태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표준어의 [징그럽다]나 [쟁그럽다]는 보기에 불쾌하도록 흉하고 끔찍하다든가, 만지거나 보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가 아니라 [악착같은 끈기, 끝장을 보고 마는 패기의 뜻이 간직되어 있다.] 민속놀이에서 [이, 징 한 기질]을 그대로 표출되고 있으니 호남지방의 줄다리기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참여하여 끝장이 날 때까지 며칠이고 계속된다. 또, 고싸움이 패기 넘친 악착같은 놀이로 정월 16일에 시작 된 놀이로 진편이 도전하면 재차 붙고 하여 스무날 까지 계속 된다. 그래도 승패가 나지 않을 때에는 2월 초 하루날 [고]를 풀어 줄을 만들고 이 줄을 당겨 승패를 가린다.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편싸움 놀이들은 악착같은 끈질긴 투지와 일사불란한 통제력 밑에 협동심을 바탕으로 한 패기가 충천하는 승벽심을 필요요건으로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징 한 기질]이 바탕이 된 [징 한 놀이]이다. 이 같은 민속놀이에 투영 된 [징 한] 기질은 불의에 항거하는 기질로 나타난다. 임란직전에 중앙정부의 부패상에 격분하여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자진한 전주의 [정여립]을 비롯해서, 탐관오리 제거와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동학민중의거와 전남 암태도의 농민항거, 나아가 식민지 교육정책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모두 호남 땅의 호남인에 의해서 주도 되었다. 이 사실이 앞서 말한 [징 한 기질]의 발현이다. 임란정유재란 때 고경명 일가를 비롯해, 김덕령, 김천일, 최경회 등이 의병을 일으켜 왜구에 항거한 것도 이 같은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의병 전체의 60%가 호남출신들로 나타나고 있는데, 앞에서 열거한 인사들이 선두에 서서 의병을 일으키려 해도 민중의 호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민속놀이에 투영 된 [징 한 기질]을 갖고 있는 호남인들이기에 이들을 따랐고, 끝내는 장렬한 죽음으로 끝장을 내고 만 것이다. 그러기에 호남인은 언제나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위해 투쟁하여 왔다. 이 같은 기질은 설화에도 나타나고 있으니, 이태조가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전국의 산신에게 허락을 받고 돌아다닐 때 지리산 신이 불응하므로 경상도 땅에 있던 지리산을 전라도로 귀향 보냈다고 전하고, 또 광주의 무등산 신도 끝까지 이를 거역하였다는 민담이 이 호남지방에 널리 전승되고 있다. 이는 호남이 의향임을 뒷받침해주는 설화라 하겠다. ********************************************** *의향 광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광주5.18민주화운동은 신군부의 독재에 항거하는 두 불의의 세력에 의한 이들의 실제적인 억압이 義를 촉발시켰다. *광주의 의병사...[포충사와 충장사] 1.김덕령...무등산의 사나이[충장공, 충장사, 무등산...수많은 전설] [충절을 다했던 의병장 김덕령이 오히려 국가 권력에 의해서 역적으로 몰려 형장에서 매를 맞다가 죽음으로 인해서, 지역민들은 그의 애통한 심경을 무등산의 전설로 새겨 놓은 것이다. 의병장으로 倡義도 그렇고 그가 가졌던 忠義정신도 義를 현창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의 세력으로 간주되는 중앙권력에 의해 역신으로 몰려 죽은 김덕령을 지역민들이 해원의 차원에서 많은 전설을 만들어 냈다. 김덕령과 무등산과 연결되는 고리가 수많은 민간전설이 있듯이 고경명과 광주가 연결되는 고리 역시 [고싸움]이라는 민속놀이가 아닌가 싶다. 고경명이라는 인물자원과 고싸움이라는 민속자원이 서로 연계 고경명의 충의정신이 발현 된 하나의 사례로서 고싸움에 대한 내용적 측면과 가치현창에 대한 방법적 고민이 있다. 2. 고경명...1533년 광주남구 대촌동 압촌 부락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몽진을 하게 되자 倡義하여 6천여명의 의병을 모집, 두 아들 종후, 인후와 함께 참전했던 당시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전장에서 두 아들과 함께 순절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현재 광주 포충사, 금산의 성곡서원, 종용사 순창의 화산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의병은 국가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국민스스로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 충장공 김덕령**(1568-1596)☸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으나 이몽학 반란과 연류된 소문으로 인하여 국문을 받아 목숨을 거둠 [어머니 상중에 거병] 1)이몽학...왕손의 서얼 김덕령은 반란군 진압을 위해 가던 중 반란이 평정되어 되돌아옴 [김덕령만 반란군 진압에 호응함, 한음 이덕형과 권율은 참여 안함] 2)김덕령의 출중한 용력 때문에 시기한 사람이 많았다.(겸손하자) 3)선조 임금 앞에서 친국을 6차례 받으면서도 머리 숙이지 않고 의연한 태도에 선조임금의 괘씸죄로 죽음을 당함 4)장군의 죽음에 전라도 사람들이 다 울었다고 함 5)김덕령의 짧은 생애 흔적은 신화적 존재로 각인 6)옥살이중 지은 춘산가.(사직공원에 시비가 세워짐) 7)취가정 주인... 광해군 때 유명한 시인 권필의 꿈에 나타나 김덕령의 취시가 8)형 김덕홍...고경명과 같이 금산전투에서 순절, 동생..김덕보:풍암정사 *광주 충효마을, [이몽학의 반란]...충청지역 장악(농민들 큰 호응...병력 수천에 달해) 선조29년(1596)7월 선봉장 한순의 군량 담당관 이몽학이 정산성에서 군사를 모아 충청도 주요 지역의 관아를 습격,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됨. 처음 반란을 지시한 것은 한순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몽학은 부여 도천사에서 모의 김경창, 이운, 승려 능운 등과 함께 6-7백명의 군사를 모아 충청도 일부를 점령하고 나서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는 식으로 점령지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데 추종세력이 늘어나 그 병력이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 됨 [이몽학]은 적장 가토가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니 의병을 일으켜 이를 치자는 말로 군사를 모았는데, 각종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이 호응 삽, 몽둥이를 들고 반란군에 가담함. 특히 5도가 같은 날에 군사를 일으켜 한성에 쳐들어가는 데 의병장 김덕령과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도아 주며, 병조판서 이덕형, 각도의 병사와 어사들이 호응하고 있다]는 이몽학군의 유언비어 작전이 먹혀들어 가면서 정부의 대응에 혼선이 빚어진 반란사건. [춘산의 불이 나니 - 김덕령 -] 춘산(춘山)의 불이 나니 못다 픤 꼿 다 붓난다 져 뫼 져 불은 끌 물이나 잇거니와 이 몸의 내 업슨 불이 나니 끌 물 업서 하노라. <김충장공유사, 근화악부> [현대어 풀이] 봄 동산에 불이 나니 미처 못다 핀 꽃들이 모두 불에 타 죽는구나. 저 산의 저 불은 끌 수 있는 물이나 있지만 이 몸의 연기 없는 불은 끌 수 있는 물이 없구나. [창작 배경] 작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무인이나, 반란군 이몽학과 내통이 있다는 모함으로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였다. 그 일로 인해 옥에 갇히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노래한 시조이다. [이해와 감상] 초장의 '춘산의 불'은 '임진왜란'을 비유한 것이며, 못다 핀 곳'은 전쟁을 통해 수없이 쓰러져 간 꽃다운 나이의 청년들 내지는 할 일을 다 못하고 죽어가야만 하는 자기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중장의 '물'은 전쟁에서의 승전이나 화해 등을 비유한 것이며, 종장에서 말한 작자 자신에게 일어난 '내 업슨 불'은 '알아 주는 이 없는 억울한 심정'을 비유한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뜻하지 않은 억울한 상황을 갑작스럽게 '불'이 난 것으로 표현한 점이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현명하지 못한 임금과 간신배가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진정한 애국 충렬이, 유용한 명장이 화를 입고, 국운이 더욱 기울어져 버리는 실례를 우리는 역사상에서 흔히 접할 수가 있다. 젊은 용장 김덕령의 경우도 그것의 하나이다. 훌륭한 인재가 불의의 희생이 된다는 것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정리] □ 성격 : 평시조, 한탄가 □ 표현 : 비유적 심상 □ 주제 : 자신의 억울한 신세를 한탄함. □ 지은이 : 김덕령(1567~1596) ―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 '조선의 조자룡'이라 불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조좌랑으로 의병을 일으켜 20대 젊은 나이에 익호 장군이란 칭호를 받았다.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용맹을 떨쳐 왜군이 감히 범접하지도 못하였으나, 반란군과 내통하였다는 이몽학의 모반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고문을 당한 후 옥사하게 됨. ************************************************************************************* ************************************************************************************* ☸.금남군 정충신(1576년 선조 9년 광주에서 정지장군 9대손으로 태어남)☸. 1. 지혜와 용기로 국난을 극복한 금남군 정충신 2. 17세에 임진왜란 때 (1592년 7.8-9) 이치전투에 참여하여 권율의 명령으로 의주 행제소에가서 장개를 올림. 이항복의 눈에 들어 벼슬 3. 신동으로 17세에 무과급제 4. 조선에 출영하여 기고만장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마음을 눌렀다는 일화 5. 후금(청)의 적지에 들어가 적의 형편을 살피고 북방 호적들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예언을 함 6.안주목사 시절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움 (1636. 인조 14년 62세로 숨을 거둠) 7. 하동 정씨 가문의 서얼로 태어나 경렬사에 배향되지 못함 8. 장군의 업적을 기려 광주 중심가에 금남로 이름 명명 *************************************************************************** *************************************************************************** ☸.경렬사 정지 장군☸. 1)고려말 왜구를 몰아내고 절의를 지킨 명장 2)나주에서 1347년(충목왕 3년)태어나서 1391년(공양왕 3년)에 45세의 나이로 광주별장에서 세상을 떠남 3)해군사령관으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움 4)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성계 일파가 제의한 벼슬도 거부한 충의와 절개가 굳기로 이름난 장군이다. ******************************************************************** ********************************************************************* ☸.충민사 전상의 장군☸. 1)정묘호란 때 안주 남영인 백상루에서 후금(청)3만대군을 물리치다 순절한 장군 2)전상의 장군은 1575년(선조 8년) 광주 구동에서 태어남 3)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활솜씨가 뛰어남 4)선조 3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첫 벼슬길에 오름 5)광해군 9년(1617)에 회답사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우리 동포 150여명을 외교적 담판으로 귀국시킴 6)광해군 교지로 어모장군이 되어 광해군의 신임을 받음 7)인조반정으로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좌천 됨 8)인조 5년(1627)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안주성 남영인 백상루에서 적군과 장렬히 싸우 다 순절함 9)병조판서 증직 교서를 받고 광주 북구 화암동 평두산에 예장으로 묻힘 9)숙종 때 충신 정려를 받아 정려각이 세워짐 10)후손들에게는 완문과 완약이 내려져 부역이나 세금이 면제됨 11)1985년 장군의 사당인 충민사를 세워 충절의 교육도장으로 활용함. **************************************************************************************************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의 7명이 표창되어 있다. 1충(忠)은 고경명, 3효(孝)는 그의 장남 종후, 차남 인후, 손자 부금이며, 2열(烈)은 그의 딸 장흥고씨와 조카며느리 광산정씨, 1절의(節義)는 그의 동생 경형이다. 현판에는 열녀와 효자들의 칭송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세독충정 고경명 선생의 좌우명으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한다" 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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