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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광 대사 빛 관정 법사와 짧지만 두터운 법연을 추모하며
보적(김지수,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글쓴이의 요청에 따라 두음법칙과 줄임말은 고치지 않았음※)
1) 천난만험(千難萬險)과 천신만고(千辛萬苦)의 삶
다 전생에 지은 업연에 이끌려 벌어진 일 이리라! 꿈결 같고 영화 같은 한바탕 살림살이가!
일본에 돈벌이도 나가고 일제 징용에 끌려 중화민국 본토까지 다녀오신 선친한테 초등학교 때 한두 자씩 한자를 익히다가, 중학교 들어가 처음 한문을 배우는데 흥미가 일었고, 전주고등학교에서는 한문에 류창하고 호방하신 박시중 선생님께 도연명의 귀거래사며 소동파의 적벽부며 제갈량의 출사표 등을 원문으로 온전히 배워 외우면서 한문에 묘미를 느끼기 시작한 듯하다. 판사가 되겠다는 청운에 꿈을 품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건만, 운명에 나부끼는 바람결은 호락호락 내 맘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입학 한 달 남짓 지나 선친께서 별세하시자, 나는 ‘젊은 베르테르에 슬픔’을 안고 마음이 방황하며, 고시(사법고시)를 위한 법학공부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고향에 있던 아우는 사춘기 질풍노도에 격정을 참지 못하고, 생선행상으로 어렵사리 생계를 꾸리느라 가뜩이나 힘든 어머님의 업장해소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 나는 2학년 겨울방학 때 사법시험 1차 준비를 딱 보름 해보고는 기력이 탈진해 내 길이 아님을 직감하고, 과감히도 혼자서 선뜻 중문학 부전공 길을 선택했고, 그때 돌린 키는 내 인생항로를 확 바꿔놓았다.
황금 같은 대학 3학년 때 1년간 오롯이 한문학에 골몰하면서, 한국고등교육재단에 한학연수장학생으로 3년간 사서삼경을 배운 인연까지 겹쳤으니, 아예 전공을 바꿔 대학원 중문과에 진학하려고 맘먹었다. 허나 운명에 바람은 또 한 번 심술궂게 헤살을 부린 모양이다. 전주고 선배이신 중문과 이병한 교수님이 적극 만류하시어, 법학 전공과 부전공 한문을 함께 살려 한국법제사를 전공하고자 법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고향에 있던 어머님과 아우를 무작정 서울로 이사시켜 신림동에 단칸 셋방살이하면서,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뒤져 세종 때 개척한 사군 육진에 사민실변한 정책을 뒤이어 펼쳐진 “조선조 전가사변률”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데, 조교 업무까지 겸하느라 과로로 만성간염을 앓으며 3년 만에 힘겹게 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우리 전통법을 연구하려면 전통 중국법을 알아야 했다. 만성간염 상태가 더욱 나빠져서 재검으로 병역까지 면제된 나는, 입원료양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중국 전통 법제사와 법사상을 깊이 탐구하기 위해 독단으로 1987년 8월 하순 대만대학 3년 유학길에 올랐다.
중국어도 익고 한문 문리도 더욱 트이면서 중국 전통법에 대한 공부도 제법 깊어졌는데, 금상첨화로 3년차 마지막 학기에는 중일전쟁 당시 도교의 성지 화산에서 8년간 은둔수행하신 함정 로인 부처(夫妻)님을 만나 본격 수행에 입문하였다. 유불선 삼교합일에 전통을 이어받아 우주를 집으로 삼고 천하대동과 종교회통에 큰 뜻을 품은 흉금회포가 평소 내 바람과 맞아, 마지막 제6학기는 등록만 하고 책과 수업을 모두 내려놓은 채 대중현 소재 천제교 천극행궁 도량에서 6개월 운둔수행에 돌입했다. 기약한 3년이 끝나 귀국해 박사과정에 복학했고, 이듬해 여름방학 남투현 뢰력아 도량에 가서 폐관수련에 동참하고 귀국했다.
1990년부터 스님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면서 스님 같은 속인으로 완전 채식하며 학문과 도업을 병행해온 길에는, 천구만한의 업장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지, 천도만과를 방불케 하는 천난만험의 마장과 천산만수의 마련이 끊임없이 몰려와, 그 동안 겪은 천신만고는 천언만어로도 이루 다할 수 없다.
(물론 허운 화상이나 관정 법사가 겪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문화대혁명이나, 또는 우리 조부모, 부모, 스승 세대가 겪은 고초는 분명 천만분의 1도 되지 않을 ‘새발에 피’에 지나지 않으리다. 허나, 윗세대가 다함께 겪은 전란과 혁명에 고난은 누구도 피하기 어려운 공업이었는데, 내가 수행에서 겪어온 고난은 개명천지 평화시대에 오직 나 홀로 치른 별업이기에, 상대적 대비효과가 극명해 주관적 감수 고초는 그 못지않았다고 여겨진다)
2) 휘황찬란한 생명 진리의 빛 「인광대사가언록」
우여곡절 끝에 1994년 2월 박사학위를 받고, 1996년 모교에 지도교수 후임 공채에 두 번 미끄러지면서, 실망과 좌절로 분노와 원망이 끝까지 북받쳐, 1997년 새해 벽두에 나는 그때까지 모은 책들로 금자탑을 쌓고 그 위에 올라가 소신공양하려 결연히 맘먹었다. (기묘하게도 1997년 2월 관정 법사님이 한국에 처음 방문하셨단다.) 허나 곧바로 태고종 종정을 지낸 충담 화상께서 소신공양하셨다는 소식이 전파를 타고 들렸고, 사촌형님이 음독 자신하신 불행이 닥쳤다. ‘수행자의 일념이 우주법계에 금세 메아리치는구나!’ 순간 어리석은 번뇌망상을 일깨우는 불보살님의 경종으로 직감하고, 즉시 그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돌파구를 찾아 유학시절 채식식당서 집어온 「인광대사가언록」을 집어 들어 펼쳤다. 오래된 갱지에 조그만 납판활자로 잉크마저 번진 조잡한 글씨가 빽빽이 찬 볼품없는 책이다.
허나 표지를 열면 우선, 눈과 얼굴이 눈부시게 빛나고 후광까지 찬란한 진영과 여섯 접시에 가득한 수많은 사리 사진이 눈길을 온통 사로잡았다. 그뿐 아니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자 볼품없는 글자에 담긴 법문에서 정말 상상할 수 없이 휘황찬란한 생명 진리의 빛이 왕창 쏟아져 나와 마음에 눈, 지혜에 눈을 번쩍 뜨이게 해주었다. 당시 내 마음 식신이 온통 칠흑 같은 암흑 동굴에 갇힌 상태라서, 인광 대사 법문에서 쏟아지는 부처님 자비광명이 더더욱 휘황찬란하게 눈부셨을 대비효과도 컸겠지만, 어쨌든 그때 느꼈던 주관적 인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이 몹시 강렬하였다. 몇 십 일이나 걸렸을까? 통권을 꼼꼼히 정독하고 나니, 이제 암흑동굴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듯하였다. 감로 같은 진리의 젖(법유)을 마시자, 비로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중독된 내 마음 식신이 원한의 주술에서 풀려날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법문과 이런 세계가 있었나싶어 깜짝 놀랐고, 이런 소식을 나 혼자 읽고 말 수는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렇게 좋고 훌륭한 복음 법문을 한글로 옮겨 한국에 인연 있는 불자들한테도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원망이 맘속에서 저절로 일었고, 그러지 않으면 불보살님과 3년 유학에 크나큰 빚을 질 것 같았다. 결과론으로 지금 회고하면, 바로 「인광대사가언록」과 「료범사훈」, 「불가록」 등의 법문을 만나러, 나는 치성한 만성간염을 안고 법학도로서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대만 유학을 갔었나 보다. 말하자면 불보살님께 이끌려 나도 모르게 구법려행을 한 셈이다.
「인광대사가언록」은 첫 장을 열면 바로 정토법문이 수승함을 지극히 찬탄하는데, 화두선 일변도의 한국 불교 상황에선 맨 처음부터 소개하기 어려울 듯싶었다. 그래서 직감으로 판단해 먼저 중간에 인과응보 법문을 골라 조금 번역한 뒤, 전화번호부에서 불교잡지를 찾아 눈에 띄는 「불광」지에 전화를 걸어 원고를 보냈다. 한 달이 다 되도록 전혀 소식이 없어 다시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바빠서 깜박 잊고 있었단다. 곧바로 글을 읽어본 편집장이 흔쾌히 싣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인광 대사 법문을 련재하기 시작한 인연으로 적잖은 독자들의 반향이 어어졌고, 강진 백련사에 선용 스님이 련재 내용을 모아 편집해 법공양하고 싶다고 연락이 오기도 했다. 마침내 불광출판부에서 독자들의 렬렬한 호응에 단행본 출판을 결정하고 요청해와 완역을 진행하면서, 한때는 원고를 들고 잠실 석촌호수 건너편 불광사에 몸소 찾아가 광덕 스님을 열반 2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친견하기도 했다.
3) 관정 스님과 첫 인연(2000년 5차 한국 순회법회)
그런데 1999년 11월 중순 강진 백련사 서래(선용) 스님이 관정 법사 「극락세계유람기」 한글판을 한 권 보내와서 답신을 올렸다.
“관정 대법사님 정말 훌륭한 분이시군요.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관정 스님에 대한 소개나 번역한 분 신상 소개가 전혀 없어 일반 독자들이 궁금할 것 같습니다. 「극락세계유람기」 는 내용이 좀 빠진 듯하기도 하고, 문장이 이왕에 좀 더 잘 다듬어졌더라면 더욱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도 좀 남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훌륭한 법문을 옮겨 그것도 무료 법보시하는 법연에 존경과 찬탄을 아낄 수가 없습니다. 「인광대사가언록」은 출판이 다 되면 법공양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00년 2월 하순에 선용 스님이 다시 정토선 책을 보내왔는데, 「가언록」 초판이 발행되기 직전인 5월 하순에는 마침내 선용 스님이 전화로 중국에서 극락세계 다녀오신 관정 스님께서 래한해 백련사서 법회를 가지는데 한번 내려오라고 권청해왔다. 당시 운동 삼아 이틀에 한번 꼴로 관악산에만 다니고, 이따금 곡성 성륜사 청화 스님 정기법회에나 나다닐 뿐, 그밖에는 거의 두문불출하던 나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특별한 려행으로 5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강진까지 내려가, 고려시대 만일념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던 백련사에 들어가 관정 스님을 친견하였다. 법회에도 참석하고, 5월 28일 밤1시간과 이튿날 아침 2시간 동석하였다.
관정 스님께 인사드리고 「인광대사가언록」 한글번역 불사를 여쭙자, 스님은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뻐하시며 법담을 들려주셨다. 내가 중국어를 조금 해 말이 통하는지라 더욱 반겨하시며 어린애처럼 천진미소를 연신 보이셨다. 더구나 당신 사진을 특별히 나한테만 한 장 꺼내주셨는데, 내가 기념으로 서명을 부탁하자 흔쾌히 응해 주셨다.(그 사진은 나중에 서래 스님이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 드렸다) 대화 내용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여러 스님이 궁금해 묻는 질문에 몇몇이 전생에 아라한이었다고 말씀하셨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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