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전쟁, 그 시발
인류는 태고 이래 줄곧 전쟁을 해왔다. 평화를 위해 어쩔 수없이 전쟁을 선택한 인간들, 이 말은 삶 자체가 모순덩어리임을 스스로 자처하고도 있는 셈이다. 말을 먹이 사냥감으로부터 운반용으로 생각하자마자 그들은 전쟁을 염두에 두었을 테다. 정복해야 내가 산다는 아니 평화를 가져온다는 그 신념으로. 지금부터서는 말을 동원한 전쟁이야기가 거듭 펼쳐질 것이다.
먼 훗날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전장에서의 승리와 패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흔히, 지휘관의 판단 등이 전투의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1차 아프카니스탄 전쟁( 19세기에 남하정책을 편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밀고 내려오자 아시아 침탈로 재미를 보고있던 영국이 인도를 잃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아프카니스탄을 완충국으로 만들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았다.1839~1842) 때 Willian Elphinstone 소장의 무능함이 1842년 1월 영국군이 카불에서 Jalalabad(잘라바드 현 아프칸 도시이름)로 참담한 후퇴(퇴각 때 수만명이 목숨을 잃엇다)를 한 주요한 이유가 아니었고, 기원전 450년 9월 마라톤 회전에서 Miltiades(말티아데스)의 병력배치가 페르시아 군대를 격퇴하는 데에 귀중한 기여를 했던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학자는 거의 없다.
현세에서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아프카니스탄, 그 이면에는 1842년의 비극이 잠재해 있기도 한 것이다. 야욕의 희생양이 된 우리가 결코 일본을 곱게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프칸에서의 외세는 죽기보다 더 싫은 상처로 그들에게는 남아 있었다. 역사는 단순히 바로 놓인 여정만 가지고 말할 수 없다는 게 이런 맥락이 아닐까.
전쟁은 엄밀히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공적인 결정은 적의 약점과 아군의 힘 사이에 아군에게 유리한 부조화를 가져오지만, 실패한 결정은 그와 반대될 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을 낳고 사기를 저하시킨다. 탁월한 지휘관들은 적어도 전장의 안개(군사 작전에서의 불확실성.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언급함)’에서 명쾌함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전장의 주재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에는 본질적으로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단순히 위대한 정신과 전략적인 교육이 아닌 그 이상의 투쟁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전투의 결과는 크고 작은 다수의 요소들이 결정하는 데 그 요소들 중 많은 경우는 아마도 역사학자들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들일 것이다. 프러시아의 영향력 있는 전쟁철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그 진실에 대하여 ‘전쟁에서의 모든 것은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 가장 어렵다. 그 어려움은 축적되고 결국 경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상상하지 못할 마찰을 일으키며 끝난다.’라고 설명하였다.
마찰의 원인 중 어떤 것은 강력하고 명백하다. 예를 들어 기후의 경우, 어떤 기후에 대처할 자원과 경험 또는 기술이 없다면 군대를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다. 그 유명한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 또는 소련을 상대로 한 군사작전은, 러시아의 겨울, rasputitsa(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도로 유실’이란 뜻. 이 시기가 되면 거대한 평원이 빠져나오기 힘든 진창으로 변한다) 시기의 눈과 진흙 때문에 극적으로 힘을 잃었다.
반대로, 1187년 7월에 있었던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은 아랍 기병대뿐만 아니라 타오르는 듯한 중동의 태양 때문에 궤멸을 당했다. 기후의 부차적인 요소는 지형이다. 푹신한 사막에서부터 우뚝 솟은 화강암 산악지형 등의 불리한 지형은 군사이동을 어렵게 하고, 거의 관통이 불가능하여 전략적인 선택지를 제한하는 장애물을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산악 지형의 경우, 군대의 이동을 위한 길은 보통 하나인 반면, 고지대는 방어 측에는 이점, 공격 측에게는 추가적인 고문을 준다.(몬테 카지노 전투와 디엔디푸 전투를 보라).
지형은 또한 순전히 거리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킨다. 군대의 전투효율은 최전선에 이르기까지의 병참선에 좌우된다. 일반적으로 병참선이 길어질수록, 더 빈약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며, 병참라인에 과부하를 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이러한 사실을 북아프리카와 동부전선에서 희생을 치르며 깨달았고, 버마에서의 일본군도 마찬가지였다.
1415년 헨리 5세의 군대는 프랑스 내를 행군하면서 심각한 보급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아쟁쿠르에서 그의 군대는 전장의 승리를 위한 또 다른 중요한 요소 덕택에 운을 다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요소는 바로 화력이다. 아쟁쿠르 전투(헨리 5세의 9천 명의 장궁병이 6만 명의 프랑스 군대를 격파함)에서는 활이 화력이었는데, 그 이후 역사에서는 더 파괴적인 무기 체계가 등장했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세 명의 병사가 운용하는 기관총으로 사실상 한개 중대 전체를 궤멸시킬 수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전사자의 70%는 야포 때문에 사망했다. 만일 화력이 박빙인 상태에서 한 쪽이 명백한 우위에 있다면, 승리조건은 간단해 진다. 바로 적이 가루가 될 때까지 멀리 떨어져서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력만으로는 전체 군사작전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을 갖기 힘들다는 것이 최근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를 통해 입증되었다.
사실 셀 수 없이 많은 요소의 결합으로 나타난 어떤 군대의 강점이 전투와 전쟁의 승리로 이어진다. 이 책에 있는 다양한 예들은, 각 전투마다 특별한 상황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군대 속에서 생존에 일차적인 목표를 둔 병사가 평소의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사실은 아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의 전쟁은 비록 오늘날의 전투와 완전히 다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의 몇몇 핵심 전술은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다수의 병력, 기세, 측면공격 전술, 그리고 안정적인 병참의 필요는 승리의 핵심이었다. 고대 세계에서 위대한 제국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아시리아, 중국, 그리스, 로마)의 성장은 전쟁이 되풀이 하여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뭍 위에서는, 보병, 기병, 궁병, 투척병에 재능 있는 군인들 그리고 공성병기 전문가들의 기술들이 합해져 전투가 이루어졌다.
반면 물 위에서는, 노와 배끼리의 충돌이 주무기였다. 다양한 방법으로, 접전은 양쪽이 근육, 칼날, 창으로 서로에게 육박하여 백병전을 벌여 단숨에 승부가 나는 거친 행위였다. 하지만 이번 장에서는, 탁월한 지휘관은 여전히 지능적인 책략을 통해 그에게 유리하게 전장의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고대 전쟁에서의 교훈은 중세 전쟁에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전쟁하면 지구상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카데시 전투. 물론 그 이전에도 숫하게 많은 전장터가 있었을 것이나 역사는 카데시부터 전쟁의 역사를 설명한다. 아마도 고릿적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권이 충돌한 일대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 람세스 2세 휘하의 보병 18,000명과 전차대 2,000명 그리고 그에 맞서는 히타히트 왕 무와탈리스의 보병 20,000명과 전차대 3,000명.
예전 국경에 접하여 어쩔 수없이 벌어진 미탄니왕국과 이집트 잦은 충돌은 비교도 안 될 엄청난 전쟁의 소용돌이가 카데시(서부 시리아 오론테스 강에 위치한 고대도시)에 휘몰아친다. 이집트의 시리아와 가나안의 지배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달라졌다. 그 지역은 밀접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필요한 다수의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대신에 이집트의 통치권에 도전이 있을 때마다 이집트는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 잇따라 군사작전을 펼쳤다.
그 무렵 히타이트의 세력은 점점 커졌고, 그들은 시리아를 압박했고, 카데시를 장악했다. 카데시를 수복하기로 결정한 파라오 람세스 2세는 2만 명의 병력을 일으켜 네 개의 사단으로 나눈 후 북쪽으로 진군했다. 잘 훈련된 이집트 군대는 인상적인 행군속도로 진군을 했으며 그들의 목표물 근처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며 전쟁은 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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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역사적 배경 : 페르시아 전쟁
마라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중동과 아시아 지역의 맹주였던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에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기원전 492년에서 479년까지 13년간 지속된 고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전쟁의 발단은 중동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한 페르시아가 세계제국을 꿈꾸며 에게해를 넘어 지중해 일대의 그리스 도시국가를 통합하려는 의지를 펼치면서부터였다. 150여 도시국가로 구성된 그리스 지역의 대부분은 이미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력에 복속되었고, 기원전 499년부터 493년까지 유일하게 이오니아가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도모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Darius) 1세는 반란의 책임을 물어 이오니아를 초토화했고, 계속해서 그리스 쪽으로 진격해 트라키아와 스키타이 그리고 마케도니아를 평정했다. 다리우스 대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세를 몰아 지중해 전역을 자신의 발아래 두기 위해 페르시아의 무적 군대를 진군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이오니아 반란에 원정군을 보내며 끝까지 항전을 고집했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 그리고 스파르타뿐이었다. 이들을 평정하기 위해 10년 넘게 지속된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첫 원정은 기원전 492년 사위인 마르도니오스의 지휘 하에 원정군을 보냈지만 에게해를 건너면서 아토즈 부근에서 만난 폭풍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회군했다. 이듬 해 다리우스는 다시 사절을 보내 복종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아테네는 사신들을 재판에 세워 사형에 처했고, 스파르타는 한술 더 떠서 우물에 빠뜨려 “거기서 실컷 땅과 물을 퍼 가라.”고 했다. 이에 격분한 다리우스는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우선 제압하기 위해 기병을 포함하여 대군을 이끌고 직접 2차 원정길에 나섰다.
그러나 마라톤(Marathon) 평원에 이르러 아테네의 장군이자 전략가인 밀티아데스(Miltiades)는 언덕을 점령하고 선제공격을 가해 페르시아는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하고는 또 다시 실패하고 만다. 결국 다리우스는 두 번의 원정에 실패하면서 지중해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어 황제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의 반란국들을 진압한 뒤, 선조들의 염원을 계승하기 위해 지중해로 대규모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에게는 세 번째가 되는 원정에서 크세르크세스는 막강 육군을 해상으로 투입하여 도시국가를 쓸어버리려는 계획을 갖고 출발했지만 육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테르모필레라는 협곡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Leonidas)가 이끄는 소수 정예군(고대 올림픽 종목들을 소개하면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제전에 대한 참가 규정으로 인해 당시 종교제전 중에 있었던 스파르타는 근위병 300명만 보낼 수 있었다.)을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을 만나면서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3일의 시간을 지체하더니 급기야는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계략에 휘말려 협소한 살라미스의 해협에 1천 2백여 척의 주력을 투입하는 실책을 범함으로써 원정의 파국을 맞이했다.
영화 ‘300’의 배경이 되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한 ‘테르모필레 전투’는 약 7천여 그리스 연합군이 20만명의 페르시아 대육군을 테르모필레라는 좁은 협곡(Hot Gate : 좁은 통로를 의미함)에 몰아넣어 그리스에 시간을 벌어 줌으로써 페르시아의 3차 원정이 파국을 맞게 되는 불씨를 제공했다. 마라톤 평원에서의 패배에 이어 테르모필레에서의 실수가 페르시아가 유럽 진출에 실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5세기 중동을 거점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 대제국은 3차 원정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지중해 진출의 숙원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리스에 이어 지중해의 맹주로 새롭게 등장한 신흥국 마케도니아의 도전을 받아 위대한 맞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에게 무릎을 꿇고 결국 제국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