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에 관한 조선 시대의 기록은 한줌도 되지 않는다. 허준은 상상력의 소산인 것이다. 나는 유희춘의 일기인 <미암일기(眉巖日記)>와, 이규상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그리고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서 간단한 기록을 보았을 뿐이다. <실록>에 허준에 관한 기록이 선조와 광해군 대에 걸쳐 1백 회 이상 나오지만, 그것은 궁중 어의로서의 활동일 뿐이다. 소설이나 TV 속 허준의 모습은 거기서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허준은 왜 이토록 유명해졌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동의보감>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 갔을 때 북경의 서점가인 유리창(琉璃廠)에서 팔리는 조선 서적은 <동의보감>이 유일하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중국에서도 인정받은 국제적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허준 개인에 대해서는 별반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알지도 못하는 허준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졸가리가 있는 이야기를 해 보자.
의업의 정도를 실천한 민중의, 조광일, 이계, 홍양호(1724~1802)의 <이계집>에 <침은조생광일전(鍼隱趙生光一傳)>이란 전(傳)이 있다. ‘침은’이라고 했으니, 침술을 주로 하는 의원이다. 작품은 짤막하지만 내용은 사뭇 인상적이다.
조선 시대에는 의원을 맡는 집안이 따로 있었다. 원래 전문적인 의원은 중인에 속한다. 양반이 의술을 익히는 경우가 있으나, 양반 출신 의원은 의원으로 치지 않는다. 중인은 의원·역관·계사(計士)·일관(日官)·화원(畵員)·사자관(寫字官) 등 그 범위가 넓은데, 그 중에서도 의원·역관·계사·음양관은 과거(잡과)를 통해 관직으로 들어서기 때문에 중인 중에서도 지체가 높은 편이고, 그 중에서도 의원과 역관을 가장 높이 친다. 그런데 조광일이란 사람은 그런 의원 가문도 아니다. 홍양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옛부터 전해오는 처방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니, 제대로 된 의원 가문에서 자랐거나 의서를 광범위하게 본 그런 의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원래 정해진 의서란 없다. 병만 나으면 그만 아닌가?
그는 가죽 주머니 속에 구리침․쇠침 열 개를 넣고 다녔다고 한다. 그 침으로 악창(惡瘡)을 터뜨리고 상처를 치료하였으며 어혈을 풀고 풍기(風氣)를 틔우고 절름발이와 곱추를 일으켜 세웠는데, 즉시 효험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니 명의라 부를 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유명한 것은 뛰어난 의술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그는 자기 호를 ‘침은’이라 붙일 정도로 침술에 자부심을 가진 명의였으나, 돈벌이에는 아주 손방이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어느 날 홍양호가 우연히 조광일의 오두막을 지나다 보니, 웬 노파가 "아들놈이 병이 나 거의 죽게 되었으니 제발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홍양호가 보아도 돈이 안 될 환자다. 그런데 조광일은 "그럽시다" 하면서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선뜻 길을 따라나서는 것이 아닌가. 뒤에 홍양호가 물었다.
의술이란 천한 기술이고, 시정은 비천한 곳이다. 그대의 재능으로 귀하고 현달한 사람들과 사귀면 명성을 얻을 것인데, 어찌하여 시정의 보잘것없는 백성들이나 치료하고 다니는가? 조광일의 대답인즉 이렇다. 나는 세상 의원들이 제 의술을 믿고 사람들에게 교만을 떨어 서너 번 청을 한 뒤에야 몸을 움직이는 작태를 미워합니다. 또 그런 작자들은 귀인의 집이 아니면 부잣집에나 갑니다. 가난하고 권세 없는 집이라면 백 번을 청해도 한 번도 일어서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어진 사람의 마음이겠습니까? 나는 이런 인간들이 싫습니다. 불쌍하고 딱한 사람은 저 시정의 궁박한 백성들입니다. 내가 침을 잡고 사람들 속에 돌아다닌 지 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살려낸 사람은 아무리 못 잡아도 수천 명은 될 것입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니 다시 십 년이 지난다면 아마도 만 명은 살려낼 수 있을 것이고, 만 명을 살려내면 내 일도 끝이 날 것입니다.
어떤가. 감동적이지 않은가? 이 한미한 의원의 말속에 의업의 정도가 담겨 있다. 나는 예전에 요로결석으로 한동안 크게 고생한 적이 있다. 서울의 유명한 대학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그 거룩하신 비뇨기과 과장님께서 비닐 장갑을 낀 손으로 환부를 깊이 찌른다. 너무나 고통스럽다. 고통을 참는 소리가 이빨 사이로 스며 나오자, "아파? 아프긴 뭐가 아파?" 대놓고 반말이다. 사람 대접이 아니다. 통증으로 밤을 꼬박 새는 고통을 겪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런 식의 막말이라니, 병원을 나오면서 다시는 이 병원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냉정한 의료진, 관료적인 병원 시스템, 복잡한 검사와 거대한 의료기기가 주는 공포감에서 환자는 심리적으로 절반은 죽는다. 어디 조광일 같은 헌신적 의원은 없는가?
마의에서 어의로, 종기 치료의 신기원을 연 백광현의 이야기가 실린 정래교의 <백태의전(白太醫傳)>3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백태의전>에 의하면 백광현(白光炫)은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사람이다. 한의학은 원래 외과수술이 발전하지 않은 의학으로 종기의 치료도 그러했다. 그런 가운데 백광현은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종기 치료사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왔다.
백광현은 원래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馬醫)였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원도 별 볼일 없는데, 마의라니 지체가 형편없이 낮았던 것이다. 그는 마의로서 오로지 침을 써서 말의 병을 고쳤고 의서는 보지 않았다. 정통적인 의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침으로 말의 병을 다스리는 기술이 진보하여 사람의 종기에도 시술해보았더니 효험이 있었다. 그는 이내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전업했고, 수많은 종기의 증상을 보면서 의술이 더욱 정심해졌다. 요즘 말로 하면 임상경험이 풍부해진 것이다.
한데 왜 하필 종기인가? 지금은 종기가 나는 경우도 드물고 병 취급도 하지 않지만, 해방 전까지만 해도 종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큰 병이었다. 종기에 관한 한 불후의 명약인 ‘이명래 고약’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서 헤매고 목숨을 잃었을지 모를 일이다.
필자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종기는 큰 병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하다. 조선시대 효종과 정조는 종기로 목숨을 잃었다. 제왕의 권력도 조그만 종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심지어 조선 전기에는 종기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치종청(治腫廳)’이란 관청까지 있었다. 종기는 참으로 심각한 병이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이제 백광현의 종기 치료 장면을 보자.
독기가 강하고 뿌리가 있는 종기는 옛 처방에 치료법이 없었다. 광현은 그런 종기를 보면 반드시 큰 침을 써서 종기를 찢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아서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침을 너무 사납게 써서 간혹 사람들이 죽기도 했지만, 효험을 보아 살아난 사람이 또 많았기 때문에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집으로 몰렸다. 광현 역시 자신의 의술을 자부하여 환자 치료에 더욱 힘을 쏟았고, 이로 인해 명성을 크게 떨쳐 신의(神醫)라고 불렸다.
과격한 치료술이다. 침을 써서 절개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았다니 아마도 칼 같은 것으로 종기의 뿌리까지 절제했을 것이다. 정래교는 이처럼 "종기를 절개해 치료하는 방법은 백태의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다. 백광현이 종기의 외과적 치료의 신기원을 연 것이다.
정래교는 백광현을 백태의(白太醫)라 부르고 있다. 태의는 곧 어의다. 민간의 무면허 의사 백광현이 어떻게 내의원 의관이 되었는지 그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시대 내의원 의관이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대대로 의원을 하는 집안에서 의과를 통과해 내의원 어의가 되는 경우인데, 대부분의 어의가 이에 속하였다. 이것을 본원인(本院人)이라 한다. 둘째는 의약 동참(醫藥同參)이라 하여 사대부부터 미천한 사람까지 의술만 좋으면 모두 보임될 수 있었다. 백광현은 아마 후자의 길을 밟았을 것이다. 의과방목(醫科榜目:의과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숙종 21년 12월 9일 숙종은 백광현을 각기병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尹趾完)에게 보내는데, 이날 <실록>에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奇效)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라 일컬었다"라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볼 때 종기를 치료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짐작된다. 백광현이 내의원 의원이 된 것은 현종 때다. <현종개수실록> 11년 8월 16일 기록을 보면 현종의 병이 회복된 것을 기념하여 내의원 의관들에게 가자(加資)를 하는데, 그때 처음 백광현의 이름이 보인다. 그는 공이 있을 때마다 품계가 올라 마침내는 현감까지 지낸다. 숙종 10년 5월 2일에 왕은 그를 강령(康翎) 현감에 임명했다가 이어 포천(抱川) 현감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의원이 현감이 된 것은 대단한 출세다. 이쯤 출세하면 교만해지게 마련일 텐데 민중을 치료하는 것으로 의업을 시작했던 백광현은 귀한 몸이 된 뒤에도 초발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병자를 보면 귀천과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았다. 부르는 이가 있으면 즉시 달려갔고,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기량을 다 쏟아 환자의 상태가 나아진 것을 보고서야 그쳤다. 나이가 많고 귀하신 몸이 되었다고 게으름을 피운 일이 없으니, 기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원래 타고난 성품이 그랬던 것이다. 임금의 병을 고치는 귀하신 분이 된 후에도 민중에 대한 헌신적 의료를 잊지 않았다니, 민중의로서의 모습이 약여하지 않은가. 무릇 의원이란 이래야 하는 것 아닐까?
― 출전 :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2003)
▣ 독해 도우미
∘어의(御醫) 시의. 궁중에서 임금과 왕족의 진료를 맡아보는 의사.
∘별반(別般) 그다지. 특별하게.
∘졸가리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쓸데없이 덧붙은 것을 다 떼어낸 사물의 고갱이.
∘악창(惡瘡) 잘 낫지 않는 악성 부스럼.
∘어혈(瘀血) 무엇에 부딪히거나 타박을 입어 한 곳에 퍼렇게 피가 맺혀 있는 상태.
∘풍기(風氣) 풍병. 한방에서 신경의 탈로 생기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
∘손방(巽方) 할 줄 모르는 솜씨. / ∘시정(市井) 인가가 많이 모인 곳.
∘현달(顯達)하다 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드날리다.
∘궁박(窮迫)하다 몹시 곤궁하다. / ∘한미(寒微)하다 가난하고 문벌이 변변치 못하다.
∘임상 경험(臨床經驗) 병상에 임한 경험. 환자를 직접 치료해 본 경험.
∘내의원 조선 시대 궁중에 쓰이는 의약을 맡아보던 관아.
∘가자(加資) 조선 시대 정삼품 통정대부 이상인 당상관의 품계.
∘초발심(初發心) 처음으로 불도를 깨닫고자 발원하는 마음.
∘약여(躍如)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름.
▣ 독해 포인트 확인하기
1. 위 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① 조선 시대에는 의원을 맡는 집안이 따로 있었다.
② 조선 시대에 대부분의 의원들은 병든 백성들에게 매우 친절했다.
③ 조선 시대 마의(馬醫)는 일반 의원보다도 더 천한 일로 여겨졌다.
④ 백광현은 종기를 치료하다 환자를 죽이기도 하였다.
⑤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들도 의원이 될 수 있었다.
2. ‘백광현’과 <보기>의 ‘노먼 베쑨’을 견주어 볼 때,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에 해당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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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쑨은 그가 가장 잘 아는 무기, 즉 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무기로 투쟁에 참여했다. 캐나다의 뛰어난 흉부외과 의사였던 그는 의술을 단지 사람들의 질병만을 돌보는 것이 아닌, 몸의 질병과 사회의 질병을 통합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설하는 것으로까지 그 의미를 확장시켰다. 그는 몸의 질병과 사회의 질병이 함께 고쳐질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인술을 펼 수 있다고 믿었다. 베쑨은 전장의 와중에도 학생들에게 의술을 가르치고 최초로 혈액은행을 운영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부상병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대들이 먼저 그들을 찾아가시오"라는 그의 가르침은 시대가 세계의 민중들에게 짐 지운 투쟁에 의사들 또한 전사의 일부로서 참여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스스로 결핵 환자이기도 했던 그는 많은 사람들을 치료했으나 자신을 패혈증에서 구제할 시간은 갖지 못했다. 닥터 노먼 베쑨의 생애는 이제 대륙과 계급을 뛰어넘어 수많은 민중들의 유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닥터 노먼 베쑨』중에서
① 환자를 대하는 태도 ② 의료 방법 ③ 의술에 대한 인식 ④ 시대 ⑤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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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감동시킨 큰 의사, 노먼 베쑨
『닥터 노먼 베쑨』 또는 『큰 의사 노먼 베쑨』. 캐나다에서 『생명의 칼, 정의의 칼』이란 제목으로 처음 출간된 지 19년이 지난 오늘, 이 전기는 이미 지구를 한 바퀴 돈 셈이다. 이 전기는 세르비아어, 히브리어, 중국어를 포함해서 19개 언어로 출판되었으며, 100만 부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 그리고 지금도 3개 대륙에서 계속해서 번역 출판 중이다. 말하자면 캐나다 역사상 가장 널리 번역 출판된 것이다.
닥터 노먼 베쑨, 그의 인생과 그의 활동은 북미의 학생들과 네덜란드의 노동자들과 독일의 의료인들과 이탈리아의 지식인들과 인도의 수많은 헐벗은 사람들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아프리카 투사들과 중국 본토의 거대한 대중들에 의해 그들 자신의 유산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베쑨의 일생이 이처럼 전 세계인들에게 거대한 충격을 준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아마도 이 전기 속에서 가장 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희생 정신과 사랑을 보여준 노먼 베쑨의 삶.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베쑨은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남달랐다. 특히 그는 삶은 닭의 뼈를 가져다가 재조립하는 등 일찍부터 의사로서의 자질을 보여 주었다. 베쑨은 고국 캐나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선언하자마자 육군에 자원 입대한다. 그러나 총상을 입고 6개월만에 제대해야 했고, 의대를 졸업한 후에 또다시 군의관으로 영국군에 입대한다.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그는 동료에 대한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편 방탕하고 자유분방한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개업의가 된 후에 가난한 환자의 진찰 차트에 병명을 ‘폐결핵’이라고 써야 할지 ‘가난’이라고 써야 할지 고민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조금씩 달라진다. 이때 그는 의사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동시에 절박한 현실을 직시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런 그였기에 1936년 7월 선언서를 통해 국민 건강의 책임이 정부에 있음을 역설하기에 이른다. 그 자신도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기에 그의 연구는 자연스럽게 결핵에 집중된다. 아내 프란시스와는 죽음을 앞두고 이혼했다가 병이 낫게 되자 재결합하기도 한다.
의과 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몬트리올 성심 병원의 흉부외과 과장으로 있으면서 ‘베쑨 기흉기’, ‘베쑨 늑골 절단기’ 등 자신을 이름을 딴 수술 기구를 개발해 의료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베쑨은 보건 의료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폐결핵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 다시 태어나면 지금보다 두 배로 열심히 살겠다고 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가 처음 관심을 가진 곳은 내란 중인 스페인이었다. 그는 스페인 민주주의 원호 위원회가 파견하는 의료 지원단을 이끌고 전장으로 들어간다. 이때 처음으로 그는 전장에서 혈액 은행을 운영해 많은 부상병의 목숨을 구한다. 그전까지만 해도 부상병들은 전장에서 의료진이 있는 곳까지 이동해 가는 도중 숨을 거두는 일이 많았다. 그려나 베쑨은 부상병이 있는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수혈을 해서 많은 부상병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베쑨은 스페인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서 싸우는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 의료 봉사대에 자원한다. 의료 지식이 전혀 없는 의료단을 위해 그는 밤에는 의료 관련 책을 집필하고 낮에는 부상병과 마을의 환자를 돌보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한다.
베쑨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군사들은 “백구은(베쑨의 중국식 이름) 동지 만세!”, “우리 뒤에는 백구은이 있다!”고 외치면서 사기를 진작시켜나간다. 베쑨이 조직한 기동 의무대는 최전선을 누비며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펼쳤다. 그는 20여 곳에 기지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 체계를 혁신함으로써 모든 중국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 받는다. 그러던 중 수술 도중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베쑨은 1939년 11월 13일 사망한다. 그가 남긴 <부상>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부상병의 몸의 일부를 잘라내야 하는 의사로서의 고통과 그들이 불구로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베쑨의 명성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가 묻혀 있는 중국의 석가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주제 의원의 참모습
•해제 조선 시대 진정으로 백성들을 치료했던 조광일과 백광현을 통하여 참된 의원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문제 정답 및 해설
1. 정답 ② 2. 정답 ③ / 해설 백광현은 의술을 병든 사람 치료에만 국한하고 있는데 비하여, 노먼 베쑨은 의술을 병든 사람 치료뿐만 아니라 사회 체제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으며, 자신의 신념 실천하기 위해 일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