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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장자권!(15) : 장자여! 불가능을 부정하라!”
+ 본 문 : 로 마 서 4장 17절 - 22절 (신약성경 244쪽)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멘!
서로 축복 / “나는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의 근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복의 근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장자 –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권세를 회복하고, 그 권세를 누리며 살아갑시다.
지난 부활주일 예배에서 “장자여! 꿈의 성취를 믿으라!” 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저를 따라 선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장자인 나는 / 꿈 꾼 대로 됨을 믿으며 / 살아가리라! 아멘!”
오늘 주일은 여러분에게 “장자여! 불가능을 부정하라!” 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저를 따라 선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장자인 나는 / 불가능을 부정하며 / 살아가리라! 아멘!”
“나비처럼 날아가 벌처럼 쏜다.” 는 말을 했던, 유명한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그의 권투 인생에서 딱 두 번 참패를 당했는데, 그 두 번의 참패에는 똑같은 공통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시합을 시작하기 전 “만일 내가 이번 싸움에서 지게 되면” 이라는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이라는 표현이나 “불가능” 이라는 부정적 단어를 쓸수록 약해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불가항력적 문제에도 하나님을 믿을 때, 기적같이 도와주십니다.
나폴레옹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100% 없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이런 신조로 불가능을 정복했습니다. "불가능이란 시간이 약간 더 걸리는 일일뿐이다."
백화점의 창시자였고, 오직 믿음! 오직 주님 중심으로 살았던 워너 메이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믿고 시작한 일을 결과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 수단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불가능을 인정할 것이 아니라, 불가능을 강하게 부정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야합니다.
여기서 뜬금없는 질문,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오시면서 가능한 일이 더 많았을까요?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 더 많았을까요?”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가시면서 가능한 일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 더 많을까요?”
그렇습니다. 살아오면서, 살아가면서 가능한 일보다는 불가능한 일들이 훨씬 더 많았고,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그 불가능한 일들을 만났을 때, 여러분은 그 불가능한 일들을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그래 안돼. 나는 할 수 없어!” - 그러면서 그냥 포기하셨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도전해 보셨습니까?
포기했다면 할 수 없고, 불가능에 도전해 보셨다면 그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한 일로 바뀌어졌습니까?
여기서 분명한 것은, 내 힘으로 그 불가능에 도전했다면 그 불가능한 일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과 함께 하면, 반드시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꿈의 성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꿈을 꾼대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선포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선포하고,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믿음을 너무너무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불가능이라는 생각 자체를 부정하기만 하면, 상황은 얼마든지 가능한 기적의 현실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불가능을 정복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요, 둘째는 능력을 행사하는 믿음입니다.
저는 첫 번째 믿음을 기본적 믿음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 믿음을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거인들은 하나같이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거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불가능도 부정하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로 이 불가능을 부정하는 믿음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아브라함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일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신앙을 두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신앙의 단계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는 기본적 믿음의 단계의 신앙생활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신앙의 단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적 믿음을 체험하고 활용하는 신앙생활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12장부터 16장까지는, 아브라함의 구원받는 믿음 단계를 설명해 주고 있으며,
17장부터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적적 믿음으로 살아가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불가능을 부정하고, 가능하게 하는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그의 삶에 있었던 모든 불가능을 부정하고 기적을 체험하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창조적인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멘!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고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창조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가 새롭게 체험한 하나님을 “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 은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그대로 죽은 자라도 살려내시며,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기적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 입니다. 이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입니다.
바로 이 불가능이 전혀 없으신 절대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창조적인 신앙입니다.
내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을, 기적적으로 이루어내는 신앙이 창조적인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믿음의 사람들이 체험한 하나님은 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능력이 넘치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전능하신 엘 샤다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무한한 그 능력을 내 능력으로 믿고 선포하면,
더 나아가 그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내 능력으로 사용하면, 불가능을 정복하는 승리자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으로 잘 사용하는,
믿음의 사람일수록 그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기적을 체험하는 창조적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능력 이상의 창조적 인생을 살아가므로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에디슨은 초등학교 석 달이 그의 학력의 전부였으나,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세계적인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청력 장애를 앓았던 베토벤은 그의 창조적인 신앙으로, 소위 음악의 성자라고까지 불리게 되었습니다.
파스칼은 선천적으로 허약한 몸을 가졌으나, 창조적인 신앙으로 924개의 주옥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금세기의 훌륭한 내과 의사이며 상담자였던 폴 투니에르는, 역사를 움직이고 놀라운 영향력을 끼쳤던,
대부분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인생의 고통에 대해, 창조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이라고 정리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창조적인 신앙을 가질수록, 자기 한계를 능가하는 기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믿음의 성도님들이 지금은 없지만, 지금은 불가능으로 내 삶을 가로막고 있지만,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오직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엘 샤다이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잘 활용하여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그의 삶에 있었던 모든 불가능을 부정하고 기적을 체험하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희망적인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망적 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토마스 칼라일의 말대로,
“인간은 희망의 존재이기에, 자기의 소유를 다 빼앗긴다 해도 오직 희망만은 가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간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40일을 살아갈 수 있고,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사흘을 견딜 수 있고,
숨을 쉬지 않고는 8분을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 없이는 단 일초도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불가능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절대 필요한 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면서 믿었기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도무지 바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의 상태가 어느 정도로 절망적이었는가를 오늘 본문 19절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9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할렐루야! 아멘!
여기 ‘몸과 태가 죽은 것 같다.’ 는 말의 원래 단어는 “기능과 활동이 멈추었다.” 는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생산 기능이 멈춘 상태, 그 인생이 고목나무와 같은 절망적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믿었습니다.
초월적 능력, 초월적 지혜, 초월적 섭리, 초월적 경륜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독교 신앙의 매력은 절망 중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마 19:26).
유명한 과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4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하고, 7살 때까지 글도 못 읽었지만,
그의 어머니의 희망적인 교육과 꿈과 용기를 갖게 하는 격려가, 세계적인 석학이 되게 하였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가난한 시골에서 화가가 되려는 꿈을 품고 도시로 올라왔으나 자기 그림이 팔리지 않아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교회 지하실에서 희망의 그림 미키 마우스를 그려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습니다.
빅토르 프랭클리가 그 무서운 나치 수용소에 살아나올 수 있었던 비결은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이렇게 믿음으로 선포했다고 합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희망을 가졌든, 못 가졌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희망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천로역정” 의 저자 존 번연은 인생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수렁을 지나 마지막 벼랑 끝에 섰을 때,
자신의 삶의 처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나를 맞으실 때 칼을 들고 나오실 지라도,
나는 그분의 발아래에 내 몸을 던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나의 최후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무지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는 희망의 신앙을 가집시다.
예례미야 선지자는 바로 이 희망의 신앙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예례미야 29장 11절 말씀입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느니라.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복된 번영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이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모든 불가능을 부정하고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희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이 그의 삶에 있었던 모든 불가능을 부정하고 기적을 체험하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역동적인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 – 21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역동적이었는지를 실감나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의 몸이 해산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오히려 더 굳센 믿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역동적인 믿음에서 세 가지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1) 약해지지 않는 믿음입니다.
2) 더욱 더 강하여지는 굳센 믿음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로 확신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역경이나 난관에 부딪혀도,
결코 약해지지 않는 믿음을 가지며, 오히려 시련이나 연단을 통하여 믿음이 더 견고해지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 11절을 보면, 사라는 이때 믿음이 더 강해져서 잉태하는 힘을 얻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몰랐으나,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지는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실수, 잘못, 죄, 시행착오, 실패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큼은 꿋꿋하게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8장 14절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음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현대 경영학에서는 “스톡데일 패러독스 - Stockdale Paradox” 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최고위 장교였던, Jim Stockdale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의미있는 용어입니다.
그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20여 차례의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인간 승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참혹하리만큼 냉엄한 현실에도 결국엔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나와 미 해군 역사상 조종사 기장과 의회 명예훈장을 동시에 받은 최초의 3성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글의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희망을,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힘겨운 역경을 거쳐, 더 강한 자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역동적인 신앙을 가질 때, 세 가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인생의 연단을 이기게 됩니다. 둘째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셋째로 역사의 거인이 됩니다.
오늘 본문 22절이 이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멘!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음으로 살았던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여길 정도로 높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냉혹한 현실과 뼈아픈 시련 중에서도 불가능을 부정하는 역동적인,
신앙으로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이 의로 여기며 자랑하시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이 친히 자랑하시는 친구와 벗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가능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가능이라는 무의 상태에서도,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므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바라고 믿는 희망적 신앙,
그리고 냉혹한 현실을 알면서도 역동적 신앙으로 불가능을 부정하는 믿음의 거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가능을 부정하므로 큰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그 믿음의 능력을 활용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창조적 신앙, 무에서 유를 만들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엘샤다이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믿음!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처럼, 신체기능과 활동이 고목나무처럼 생산의 능력이 전혀 없을지라도,
잠잠히 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희망적 믿음만이 우리를 큰 사람이 되게 합니다.
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막막함을 다 알고 있더라도 불가능을 부정하는 믿음이 결코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강해지며, 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100% 확신하는 산 믿음과,
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 모두 저를 따라 크게 선포하며, 크게 외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장자인 나는 / 전능하신 / 엘 샤다이의 /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 엘 샤다이의 / 하나님을 믿는 / 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 다 이루어진다. / 아멘! 믿습니다.”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