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공 (墨攻: Battle Of Wits, 2006)
한국,중국
전쟁/드라마, 132분, 장지량 감독
약간 엉성한 점도 있는 그저그런 영화다. 그러나 전국시대 묵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묵공을 보며 나는 묵자와 예수와 이순신을 겹쳐 생각했다. 전쟁은 인류사에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라 대 나라의 전쟁뿐 아니다. 개인 대 개인의 싸움과 다툼이 나를 슬프게 한다. 다툼뿐 아니다. 경쟁이 나를 슬프게 한다. 왜 우린 서로 같은 사람인데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나란히 가지 못하고 앞서가고 더 가지려 하는가?
영화의 마지막처럼 나는 차라리 나라와 사상도 버린 채 유민이 되고 싶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예수의 무엇을? 그의 사랑을! 그는 결코 폭력을 용인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자신을 위해 칼을 들었을 때조차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고했다. 남을 용서하는 법도 무한히 계속하라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의 가르침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두 개의 기둥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자들이 군대에 가고 전쟁에 참여해 무참히 적국의 군인과 백성을 학살한다. 군에는 매주 주일 예배와 미사, 법회가 있다. 군종들은 신의 힘으로 병사들을 격려하고 지켜달라고 기도한다. 그가 거기 섬으로써 전쟁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사이비라고 오히려 매도한다. 그게 우리 기독교의 현실이다. 다수가 다니는 교회만 다니면 정통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오류 가능성에 회의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수가 무섭다.
지난주 일요일 인권영화제에서 <우리학교>를 보고 종로로 나오니, 부처님 오신 날 연등행사를 하고 있었다. 연등제를 보는 건 처음이다. 장관이다. 몇 시간 동안 등을 밝힌 사람들의 행진을 보는 것은 저절로 가슴이 떨리는 일이다. 단지 사람이 이렇게 많이 하나로 모인다는 사실만으로 흥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안에 있는 이런 묘한 흥분의 심리가 두려워졌다. 이들 중 부처를 따라 완전히 비폭력 무저항의 길을 걷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석가족의 왕국이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조언 외에 어떤 무력도 용인하지 않았던 그의 행동을 비겁이나 회피로 알고 있는 불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승병은 한국적 불교인 호국불교의 특징이라고 국사시간에 세뇌된 대로 불교와 폭력을 분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폭력을 용인하는데 동원되었다. 하지만 스님이 칼을 잡았을 때 그것은 자신의 해탈을 버리는 결단이고 교리의 근본을 흔드는 일종의 배교일 수 있다. 호국불교를 권력에 야합한 불교로 합리화 하거나 미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간 실존의 근본적 고뇌에서 나온 결단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비록 통일신라의 세속5계와 고려의 대장경 조판 등 호국불교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졌으나, 전자처럼 칼을 든 호국불교가 받아들여질 때, 폭력은 어느새 용인되고 중들이 주지 자리를 놓고 육박전을 벌이는 지금의 사태까지 자연스러운 꼴이 된다.
묵자는 전국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 예수처럼 평화와 사랑을 외치며 돌아다닌 사람이다. 그는 참으로 특이하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설 것을 강조하고 만민 평등과 사랑을 강조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어느 곳이든 그곳으로 달려가 전쟁을 말렸고, 우선 대화와 설득을 시도했으며, 그것이 불가능할 땐 공격이 아닌 방어전을 도왔다. 그래서 그는 성의 방어전술과 전략에서 탁월한 장치를 개발하고 수완을 보인 인물이다. 예수처럼 초월적이지도 않고, 석가처럼 초탈하지 않으면서, 그는 약자의 구출하기 위해 방어적 폭력을 사용했다. 이 영화에서 보여진 혁리가 바로 묵자의 사람인 것이다. 내 생각엔 스펙타클보다 전쟁과 평화의 사이의 고뇌와 회의를 좀더 심도 깊게 다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가히 <전쟁과 평화>의 웅장함까지 겸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인간의 나약함과 숭고함을 다루기에 전쟁과 묵자의 사상은 분명 좋은 소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묵자는 충분히 현대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조선을 구하다시피하고 죽은 이순신이 또 생각났다. 임진왜란이 끝나면 선조와 정부관료들의 자격지심과 시기로 죽음이 이미 예견된 상태에서 그의 죽음은 거의 자결로 보인다. 도무지 세계 전쟁사에서 이렇게 혁혁한 공을 세우고, 더구나 그 공이 공격전쟁이 아니라 방어전쟁에서 탄생한 영웅은 거의 없다. 때론 적이 아닌 자기가 지키고 있는 나라가 자신을 버리고 전력이 절대적으로 열쇄였던 상황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것은, 나같이 영웅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감탄하게 하는 바가 있다. 그는 참으로 비극적 영웅의 전형이다. 어쩌면 이토록 비극적인 영웅은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 영화의 결말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당했던 상황과 참으로 유사하다. 그런 점에서 이익 앞에서 배신하고 이용하는 것은 권력자와 백성이 가진 나약한 심리적 보편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이 엄청난 격차 속에 언제나 이상은 현실의 모략에 패배해 왔고, 이 좁은 땅에서 이순신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고아들을 데리고 유민이 될 수도 없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나아가 존재에 대한 사랑일 그렇게 어려운가? 편리와 이익 앞에서 우리의 눈은 금세 멀어버린다. 남 탓 할 수 없다. 당장 나의 이익을 위해 살고 모든 일이 벌어진다. 전쟁, 다툼, 경쟁.... 아무도 왜라고 묻지 않는다? 묵자가 말한 사랑(겸애)의 방법은 진실이지만 아직도 멀다.
안성기가 거기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한중 합자영화여서 양국관객을 끌어들이려는 의도 때문이었겠지만, 중국어를 못해 클로즈업도 별로 없고 대장군이지만 꼭 몰모로 잡힌 듯 캐릭터의 매력도 없다. 뭔가 있을 것 같다가 아무것도 없는 성격이 영 궁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