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암과 함께 카페개설과 직장은퇴 후 새로운 시작 EBS 다큐매거 영상
안녕하세요!
귀암과 함께 카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귀암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에 인터넷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쉽게 카페에 와서 서로 간 의견 (Communication)교환도 하시고 즐거운 시간 되었으면 합니다.
귀암과 함께 카페에는 주로 카페지기가 사진과 동영상을 편집하여 올리고 있으며, 건강정보와 취미생활정보 신문 오피니언 등 인터넷 텍스트 동영상 좋은내용을 카페에 올리고 전하고 있습니다.
저가 오래전에 직장퇴직하고 2001년 12월 26일 조선일보 새로운 인생 앙코르 전여옥 방송인 취재기사와 2002.01.13 EBS 다큐매거진 현장 - 은퇴, 새로운 시작 동영상을 비디오테프로 보관하다가 최근에 변환하고 일부 지나간 옛 추억의 사진을 포함하여 귀암(龜巖) 카페에 올렸습니다.
즐겁게 지내시고 항상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귀암(龜巖) 김재형 (010-3665-1224)
2023년 2월 13일 맞춤법 수정함
조선일보 새로운 인생 앙코르 전여옥 • 방송인 취재기사
再起... ‘아름다운 성탄절’
호프집 ‘증기기관차’ 운영하는 김재형 오정숙 부부
♣ 26년 전 중매로 결혼
26년 전 은행원과 초등학교 교사는 맞선으로 만났다. 부부와 1녀 2남은 단란했다.
성실한 남편은 지점장까지 승진했다.
♣ 은행지점장 때 IMF 맞아
남편이 ‘IMF 명예퇴직’을 당했다, 家長은 남몰래 재취업을 위해 뛰었지만 허탕.
집도 팔았다. 아내는 호프집 주방 설거지 일에 나섰다.
♣ 아내 호프집 취직…. 引受
호프집을 인수했다. 학생들 토사물을 치우며 새벽 5시까지 문을 열었다.
부부는 火傷과 통증으로 밤잠을 설쳤다.
미생년자 단속에도 어이없이 걸렸다.
♣ 새 출발 후 첫 크리스마스
아직 쉽지는 않다. 그래도 새로 사회를 배우며 퇴직의 악몽에서 차 춤 깨어나고 있다.
50代 부부는 이제 서로를 同志로 껴안는다.
26년 전 그들은 맞선 자리에서 만났다. 남자는 당시 최고 직업인 은행원에 잘 생긴 외모, 촉망되는 장래, 넉넉한 집안…. 이라고 중매쟁이는 말했다. 여자는 교대 출신에 초등학교 교사,빠지지 않는 미모…라고 중매쟁이는 소개했다. 남자는 정직하고 성실했고, 여자는 밝고 명랑했다. ‘당연히’ 그들은 결혼했다.
26년이 지난 오늘, 남자는 대학가의 작은 호프집 주인이 되었고 여자는 주방 보조 아줌마가
됐다. 중매쟁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남편 김재형 (54) 씨가 98년 1월 제일은행을 명예퇴직하기 전까지 부인 오정숙 (50) 씨는 ‘지점장 마누라’로 서 중매쟁이의 예언대로 별 탈 없이 살아왔다. 타고난 은행원인 ‘성실 표’ 남편 김 씨와 1녀 2남의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20년 동안 꾸렸다.
그러나 무방비 상태였던 부부의 등에 ‘IMF의 칼’ 이 꽂혔다. 남편 김 씨는 원치 않는 명예
퇴직했다. 김 씨는 실낱같은 재취업의 희망을 품고 남몰래 컴퓨터 재교육을 받으러 쫓아
다녔다. 모조리 허탕이었다. 지인들에겐 “ 50세 명퇴에 취업은 무슨…” 이라고 했지만, 그것
은 거짓말이었다.
남자가 직장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 가사(家死) 상태인 가장의 스트레스와 초조함
은 그대로 가족에게 전해졌다. 역할 분담으로 유지되었던 결혼, 부부 사이에도 갈등과 분노
와 눈물이 찾아왔다. 생활비로 130만 원을 달라는 부인에게 그럴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곶감 빼먹듯 퇴직금을 갉아먹고 사는 마당에,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스스로 장을 보고 하루종일 집안을 돌아다니며 수도꼭지를 잠그고 전깃불을 껐다.
아직도 지점장의 얼굴, 태도, 말씨가 묻어있는 남편은 헛기침을 했다.
“은행을 그만두고도 출근하는 꿈을 매일 밤 꿨어요. 지금도 꿉니다. 어제도 꿨어요. 아직도
아쉬운 것은 어떻게 일 년만 더 버려볼 것을….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심정, 아무도 몰라
요"
김 씨의 퇴직금은 생각보다 적었다. 먹고 살고 아이들 교육비 대느라 은행원 출신인 그는 저
축을 할 수 없었다. 아이들 레슨비 때문에 집도 팔았다.
“살을 맞대고 산 부부였는데도, 퇴직 후 함께 있으면서 집사람에게 놀랐어요. 합창단이다,
옆집일 이다, 동창회다… 집에 있을 때가 없어요. 퇴직했는데도 집에서 밥 한 끼 같이 먹어본적이 없어요. 집사람은 나가고 저는 집에서 라면만 끓여 먹었어요
부인 오 씨는 “그렇지 않다”라고 했다 “남편하고 내내 집에 같이 있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남편 눈치 보느라 나가는 경우가 많았지요”
마침내 ‘다혈질’ 오정숙 여사는 취업전선에 나섰다. 호프집 주방의 설거지일. 주말에 이틀
일하고 한 달에 30만 원 받았다. 허리가 휘도록 설거지를 하면서 그녀는 “왜 결혼 후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뒀을까” 뼈저리게 후회했다.
호프집 주방에서 일하면서 그녀는 정세를 살폈다. 그리고 타고난 사교성으로 주방장에게 안
주 만드는 것도 배웠다.
“이건 되는 장사다.” 남편 김 씨를 설득해 지난 5월 한양대 앞에 ‘증기기관차’란 30평짜리
호프집을 인수했다. “물장사가 어떤 건데…. 용기도 참 대단하다.”라는 남들 말도 흘려버렸다.
하지만 3월 초 미어터지던 ‘증기기관차’는, 이들이 막상 가게를 차린 5월 말 썰렁해졌다.
그들은 대학가 장사라는 것이 3~4월 학기초 뿐이라는 것을 몰랐다. 방학 때 파리를 날라며
2학기를 기대했다. 김 씨는 장을 봐오고 카운터일을 하고 온갖 잡일을 했다. 대학생들이 토한
구토물을 치우는 화장실 청소도 물론 그의 일이다. 아내 오 씨는 주방장 보조로 설거지와 서빙을 담당했다. 손님만 있다면 새벽 5시까지도 문을 열었다. 오 씨의 손과 팔은 불에 데인 자국으로 성할 날이 없었고 남편 김 씨는 무거운 짐을 나르느라 통증으로 밤잠을 설쳤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어려움은 그치지 않았다. 미성년자 단속에 적발된 것이다. 업소 경영에 ‘초짜’인
그들은 도무지 누가 미성년자고 대학생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늙수그레한 미성년자가 섞여
들어온 뒤 5분도 안 돼 경찰이 신고를 받고 왔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신고를 한 것이 분명했다. 그 나이 되도록 남의 앙심 살 일 한 적 없는 김 씨는 너무 억울했다. 결국 영업 정지 2개월 조치에 대항해 소송을 하고 탄원서를 내서 벌금 200만 원으로 대체했다. 헛장사를 한 셈이다.
그 뒤 김 씨는 ‘심혈을 기울여’ 신분증을 확인했다. 그러나 수능시험이 끝난 날, 김씨가 업
소를 찾아온 친구 배웅을 나간 새 또 일이 벌어졌다. 임시 아르바이트생이 ‘나이든 대학생’ 같아 보이는 수능생에게 신분증 확인을 하지 않고 술을 주었다. 곧 단속반이 들이닥쳤고 그들은 미성년자에게 상습적으로 술을 팔아온 ‘악덕 업주’ 가 되고 말았다.
“드디어 사회를 제대로 배운 셈이죠. 은행이란 보호망 속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다 된
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회란, 게 얼마나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인지 알았습니다.
어느덧 오후 5시 반. 첫 손님이 왔다. 속내 이야기를 하며 눈물짓던 오 씨는 후닥닥 일어나
“어서 오세요” 하며 웃는 얼굴로 대학생동아리 손님을 맞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편 김 씨는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저 사람에게 오랜만에 키스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성탄절에는 문을 닫고 외식이라도 하실 거냐”고 물었다.
“문은 열어야죠. 돈 벌어야죠. 그리고…. 이곳 ‘증기기관차’에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인
데 어딜 갑니까? 퇴직 후 3년의 악몽에서, 어쨌든 깨게 해준 곳이고, 50 넘은 나이에 세상을 다시 알게 해 준 곳인데, 여기 말고 어딜 갑니까?“
어느새 옆에 온 부인 오 씨는 쑥스러운지 웃었다. 그 웃음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그녀의 어금니 터 몇 곳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새로 이를 해 넣을 금전적,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오늘 이 부부에게는 없다.
오 씨는 “이 가게를 열고 나서 남편과 함께 있는 이유가 사랑도 정도 미움도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이 나이의 부부는 유일한 동지이죠”
50대, 새로 시작한 삶이 여기 ‘증기기관차’처럼 크리스마스 캐럴과 함께 달린다. 단 두 명
의 ‘동지’ 만을 승객으로 태우고….
명퇴… 창업… 再起… ‘아름다운 성탄절’ 김재형 2001년 12월 26일 (수요일) 조선일보 새로운 인생 앙코르 전여옥 • 방송인 취재기사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저도 힘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