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樓亭)의 미학
● 담양의 누정과 원림
1. 누정문학의 중심지, 식영정
1560년(명종15년) 서하당 김성원(1525~1597)이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 이곳에 드나들던 임억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 등은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리었는데 이들은 성산의 경치 스무 곳을 택해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을 지었다. 이것이 송강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2. 정철과 김덕령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환벽당
충효동쪽 언덕배기에 자리한 환벽당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세운 별서정자로 환벽당 아래 넓은 풀밭이 원래 살림집터다. 광주 충효리 태생으로 1532년 벼슬길에 오른 사촌 김윤제는 낙향해 이곳에 환벽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3. 김덕령장군의 넋이 깃든, 취가정
충장공(忠壯公) 김덕령장군(金德齡 1567~15960의 외로운 넋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그의 후손인 김만식등이 고종 27년(1890년)에 창건했는데 1950년 6ㆍ25동란으로 소실된 것을 1955년 재건했다.
4. 조선중기 원림건축의 백미, 소쇄원
스승 조광조(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된 후 결국 죽음을 당하자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벼슬에 대한 꿈을 버리고 자연속에서 살기 위해 고향에 지은 것이다. 소쇄(瀟灑)란 말은 맑고 시원하다는 의미, 유난히 볕이 바른 곳이라는 의미의 애양단(愛陽壇)과 담에 흘러든 물이 다섯 굽이에 이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오곡문(五曲門)’이 보인다.
5. 조선시대 호남가단의 원류, 면앙정
조선 중기 문신으로 면양정 가단의 창설자인 송순(1493~1583)이 41세 되던 1533년에 잠시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6. 정철문학의 산실, 송강정
담양 고서 삼거리에서 담양읍 방향으로 5분정도 지나면 왼쪽 언덕배기 죽록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솔바람 내음 그윽한 소나무 숲사이 계단을 오르면 정자 측면의 죽록정이란 현판이 먼저 눈에 뜬다, 주변의 수려한 풍광과 더불어 이 정자가 특히 깊은 유서를 갖는 이곳이 송강의 가사 작품의 산실이기 때문. 송강은 선조 21년 이곳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는데 이 두 작품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명편이다.
● 누정의 개념
樓亭(누정)은 樓閣(누각)과 亭子(정자)의 개념이다. 누정의 별칭으로는 軒(헌), 堂(당), 臺(대), 閣(각) 등이 밑에 붙기도 한다.
누정은 남성 위주의 공간으로, 실제 생활과는 인연이 먼 조용히 기거하는 곳이다.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사방의 경개를 완상하며 吟風弄月(음풍농월)이나 하면서 시도 읊고 가객을 불러 노래도 감상하는 풍류의 장소가 바로 누정이다.
누정은 마루로 되어 있으나 한두 칸 정도의 온돌방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방이 정자 한 가운데 있기도 하고 한 귀퉁이나 뒤편으로 몰아서 만든 곳도 있다. 이 방은 강학소 혹은 재실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누정은 대개 경개가 뛰어나서 전망이 좋은 背山臨水(배산임수)의 자리에 지어졌고,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성위의 누대, 변경지방에서 적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누정도 있다.
정자는 비교적 누정보다는 작은 건물이다. 벽이나 문이 없고 기둥 위에 지붕만 덮은 집이다. 산수가 좋고 지대가 높은 곳에 세워진 것으로 놀이나 휴식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정자와 비슷한 곳으로 茅亭(모정)이 있다. 대개 짚으로 지붕을 하였는데, 이는 농사일과 관련이 깊다. 경치가 좋은 곳 보다는 농경지를 배경으로해서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모정은 누정이 선비들의 휴식처라면 모정은 농부들의 휴식처이다. 누정에는 현판도 없고 이름도 없다.
현대에 와서 누정이나 모정은 주로 노인들의 집합소로 사용되고 있고, 때로는 노인, 젊은이들이 모여서 시조, 詩會(시회)도 열리고 있어서 시가의 산실 구실을 하고 있다.
우리 나라 누정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그 중에서도 경상북도와 전라남도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 원림의 미학
광주광역시의 동북방향, 무등산 북쪽 기슭과 맞대고 있는 담양 고서면과 봉산면 일대에는 참으로 많은 누각과 정자 그리고 원림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면앙정, 송강정, 명옥헌, 소쇄원, 환벽당, 취가정, 식영정 등 이른바 조선시대 호남가단이라 불리는 가사문학의 본고장으로 조원(造園)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황금 코스이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정자문화가 발달해왔다. 16세기 중종 연간에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이름난 누정(누각과 정자)의 수가 885개나 될 정도이다.
정자는 휴식처이자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다. 한가할 때 홀로 휴식을 취하거나 마음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럿이 오붓하게 모여 정서를 교감하고 흥을 돋우었던 장소인 것이다. 게다가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흥이나면 언제고 시 한 수쯤은 거뜬히 지어낼 수 있을 정도로 문학의 생활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정자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말할 것도 없이 위치 설정이었다. 마을 어귀 사람들이 편안히 모일 수 있는 한쪽켠, 전망이 좋은 언덕, 강변의 한쪽.... 우리가 지나가다 잠시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에는 여지없이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일대에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이 냇물 좌우 언덕에 자리잡아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거나, 비껴보고 있으니 이 유서 갚은 동네의 풍광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아도 단박에 느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중에서도 소쇄원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원림 중에서 단연코 으뜸이다.
● 담양 소쇄원
* 양산보(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정원인 소쇄원을 지었다.
전체적인 면적은 1400여평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조성된 건축물, 조경물은 상징적 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뤄내며, 그 안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의 조성은 조선 중종때의 선비인 소쇄공 양산보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그 정확한 조영 시기는 1520년대 후반과 153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불에 타기도 했지만 다시 복원 중수하고 현재까지 15대에 걸쳐 후손들이 잘 가꾸어 나가고 있는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최고의 민간정원이다.
걸음 걸음 물결을 보며 걷자니
한 걸음에 시 한 수 생각은 깊어지는데
흐르는 물의 근원을 알 수 없으니
물끄러미 담장 밑 계류만 바라보네
"소쇄원 48영가(詠歌)중에서
● 소쇄원의 내력
소쇄원을 조영한 분은 양산보(梁山甫:1503-1557)이다. 본관은 제주, 자는 언진(彦眞)이라 했으며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현량과로 신진사대부로 등용되기도 했으나 사화로 인해 낙향하여 폭포와 못을 이루며 계곡이 깊어지고 주위의 풍광이 수려한 곳에 누각을 짖고 그이름을 소쇄원이라 하였다.
그는 자손들에게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 것" 과 "돌 하나 계곡 한구석 내 손길, 내 발자국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하나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낡고 헐어 무너지고 옛 그대로의 모습은 잃었지만, 1755년에 구조와 건물배치를 자세히 그린 소쇄원도를 목판화로 남겨두어 그 원모습을 남김없이 복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 소쇄원의 구조(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
약 1,400평. 계곡을 낀 곳에 조성되었는데 양산보가 어린시절 미역 감으며 뛰놀았다는 너럭바위를 중심으로 그 옆에 광풍각이라는 정자를 짓고, 위쪽 양지바른 곳에 사랑채와 서재를 겸한 제월당을 세웠다. 또한 주위 지석촌 마을과는 기와를 얹은 읅돌담을 ㄱ 자로 차단하고, 화단을 2단으로 쌓아 매화를 심었다. 계곡의 자연스런 흐름에 인공을 가하여 못을 넓히고 물살의 방향을 나무홈통으로 바꾸어 수차를 돌려 물고기들이 항시 거기에 모이게도 하였다.
1. 대봉대(待鳳臺)
입구가 항시 열려 있는 소쇄원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이 대봉대(待鳳臺)이다. 초가정자로 방문객은 여기에 걸터 앉아 소쇄원의 전경을 살필 수 있다.
사방 1칸의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초정 대봉대는 1985년경에 재건된 것이다. 소쇄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 소정은 시원한 벽오동나무의 그늘에 앉아 봉황새(귀한 손님)를 기다리는 집이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워
사람이 가고 오고 마흔 해로다
시냇물 서늘히 벽오동 아래로 흐르니
손님이 와서 취하고는 깨지도 않네
송강정철이 쓴 "소쇄원 초정에 부치는 시"에서..
2. 광풍각(光風閣)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계곡의 한가운데에 단칸 정자를 짖고 광풍각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은 겨울철 난방을 고려함이고, 사방으로 둘러져 있는 마루는 여름날을 위함이다.
양산보가 계곡 가까이 세운 정자를 광풍각이라 하고 방과 대청마루가 붙은 집을 제월당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春陵의 주무숙(1017~1073)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을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3. 제월당 : 霽月은 ‘비 갠 뒤하늘의 상쾌한 달’
양지바른 언덕에 사랑채와 서재를 겸한 제월당이 주건물이다.
4. 돌다리 담장
흙돌담 밑으로 개울이 흘러갈 수 있도록 설계하여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공미를 절묘하게 연출했다.
5. 주위경관
소쇄원으로 가는 언덕 좌측에 푸르고 빽빽한 대나무 숲이 있다. 통이 굵은 대나무는 담양이 죽세품으로 유명하지만 제법 볼만한 풍경을 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