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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CEO] 윤윤수 휠라코리아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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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윤수(尹潤洙ㆍ56) 휠라코리아(www.fila .co.kr) 대표이사 사장은 IMF쇼크 이후 가장 유명해진 경영자다. 신문과 잡지, 방송 등에 수시로 등장했고, 어떤 날엔 하루 두번 이상 언론매체와 인터뷰한 적도 있다. 그런 탓에 웬만한 기업 담당 기자들은 그의 성공 스토리를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가 됐다.
취재기자가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은 최근 너무 유명해진 사람의 인터뷰 기사를 작성할 때다. 개성있는 내용을 담지 않으면 독자들을 식상하게 만든다. 그래서 윤 사장과의 만남은 적지않은 부담이었다. 9월 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우면산이 창 밖으로 솟아있는 휠라코리아 사장실에서 윤윤수 사장을 만났다. 약간 벗겨진 머리, 낮고 굵은 바리톤 음성. 인터뷰에 많이 응해 본 사람에게서 나오는 여유가 느껴졌다.
윤윤수 사장은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심장협심증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은 매우 건강해 보였다. 그는 최근에도 계속 ‘뉴스 메이커’였다. 삼성증권 광고모델로 받은 돈 수천만원을 모두 중증(重症) 장애인용 전동 스쿠터를 구입하는 데 기증했다. 그는 “기부하면서 저는 모두 삼성증권 돈이니 그쪽에 감사하라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얼마 전엔 휠라코리아의 성공사(史)를 담은 ‘생각의 속도가 빨라야 산다’라는 책을 펴냈다.
세간에서는 윤 사장의 성공 비결을 흔히 '투명 경영' '유리알 경영'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가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람은 아니다. 반드시 뒷돈을 싫어했던 사람도 아니다. 다만 여느 경영자와 차별화되는 점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쉬쉬 하는 반면 뒤로는 엉큼하게 모두 다 챙기는 관행을 양성화’했다는 데 있다. ‘가식 없는 경영’인 것이다.
임직원 누구든 사용할 돈이 필요하면 떳떳하게 회사에 요구하면 되지 왜 괜히 쭈뼛거리며 뒷돈과 비자금을 마련하느라 온갖 부정을 저지르느냐는 게 윤 사장의 주장.
"한국 기업인들은 모든 일을 공식화하지 않고 편법으로 하길 좋아하지요. 가령 한달에 축의금을 여러 차례 보내야 한다면 ‘괜히 사장이 그런 곳에다 돈을 지출하나’란 소리를 들을까봐 비자금으로 뒷돈을 만들곤 하는데 그게 잘못됐다는 겁니다. 만일 축의금이 필요하고 정당하다면 떳떳하게 회사 예산으로 하는 겁니다. 얼핏 회사 돈이 많이 지출될 것 같지만 그렇게 해야 회계가 투명해지고 궁극적으로 돈이 적게 들어가는 겁니다."
투명경영은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요구한다. 그는 직원들에게 협력업체나 대리점의 향응도 단호히 금지시켰다. 윤 사장 자신도 경영정보를 직원들에게 최대한 공개하고 자신의 연봉도 공표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지난 97년 국내 전문경영인 가운데 연봉 1위(18억원)에 올랐다. 당시 조선일보사 출판부가 펴낸 ‘내가 18억원을 받는 이유’란 책은 샐러리맨들에게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근무시간 기준으로 한 시간에 60만원 정도를 버는 꼴. 물론 그같은 연봉액도 외환위기를 맞자 18억원에서 15억원으로 깎였지만 올해는 다시 24억원으로 늘어났다.
■"CEO에게 충분히 예우해줄 필요 있다"
"한국 기업은 CEO에게 충분히 예우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 기업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박(薄)하지요. 사장이 급여가 적으면 엉뚱하게 돈을 모아야겠다는 유혹에 빠집니다. 사장이 이상한 짓 하면 그 밑의 사람은 두 배로 해먹지요. 부패 사슬을 끊으려면 CEO에게 정당하고 충분한 보상을 주는 것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 자신 연봉 24억원 중에서 세금으로 절반이 나가고 나머지 절반 중 또 반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과 나눈다고 한다. 결국 집에 가져가는 것은 연봉의 4분의 1. 지난해까지 그가 받은 연봉은 모두 139억원 정도라고 한다. 그중 62억여원을 세금으로 내 지난해 납세자의 날엔 표창까지 받았다.
"제가 투명경영 한다니까 무슨 비결이 있는가 묻는데 전 그냥 남에게 솔직한 것을 즐기는 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할 때 자기의 경쟁력이 생깁니다. 아마 미국 기업인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진실하면 쓸데없는 ‘과외’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는 외제차 벤츠S600을 몰고 다닌다. 흔히 사장이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쉬쉬 하는데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런 가식 없는 경영 자세를 기본으로 그는 휠라코리아를 국내의 외국 브랜드 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표로 만들었다.
휠라코리아가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91년 7월 10일.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했다. 'FILA(휠라)' 브랜드는 1923년 이탈리아 비엘라에서 탄생됐고 현재 스포츠카로 유명한 ‘FIAT(휘아트)’에 소속되어 있다. 가내수공업으로 시작, 현재 50여개국 9000여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윤 사장의 인생 스토리를 보자. 서른살까지 그의 삶은 매우 어두웠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백일도 안돼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고 그는 고모의 손에서 자랐다. 고교 때 폐암으로 아버지를 잃은 것이 한(恨)이 돼 의과대학을 지원했으나 두번이나 낙방하고 삼수(三修) 끝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3학년 때였다. 학교시험 시간에 공부 안한 친구가 그의 답안지를 바꿔치기 하다가 발각돼나 윤 사장도 1년 정학 처분을 받았다. 윤 사장은 홧김에 카투사(KATUSA) 의무병으로 입대했고 그때 실용 영어를 확실하게 익혔다고 한다.
첫 직장은 해운공사였지만 수출업무를 하고 싶었던 그는 미국 최대 유통업체 중 하나인 JC페니 한국지사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삼성전자가 미국에 전자레인지를 수출하는 데 윤 사장이 크게 기여했다. 그후 화승으로 자리를 옮겨 수출담당 이사를 지냈다.
윤 사장이 휠라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4년 ET인형 수출 실패 건으로 화승을 그만두고 신발이나 인형 등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는 미니 종합상사인 대운무역을 차리면서부터다.
윤 사장은 80년대 초 미국 출장에서 휠라 상표를 접하고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들어 미국에 팔면 장사가 되겠다'고 판단했다. 당시 이미 호머 알티스란 미국인이 휠라의 미국 내 라이선스를 갖고 있었다. 윤 사장은 “신발 강국인 한국에서 만든 신발에 휠라 상표를 붙여서 미국에 팔자”고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다. 결국 사업 파트너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신발 장사가 의류 매출을 뛰어넘을 만큼 장사가 잘되고 ‘진 윤(윤 사장의 미국식 이름)’의 명성이 높아지자 1991년 휠라 본사에서 아예 윤 사장에게 휠라코리아를 차리도록 했다.
휠라 본사는 윤 사장이 뜻하지 않게 신발에서 '휠라' 브랜드를 히트시키자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하게 됐고 첫해 연봉을 5억원으로 결정했다. 휠라코리아를 시작한 윤 사장은 10년 앞서 한국에 진출한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아성을 허물기 위한 전략을 짜냈다. 첫번째는 전산화였다.
그는 대리점과 본사를 연결하는 전산망에 수익의 상당 부분을 투자, 생산과 판매 현장을 직접 연결시켰다. 고객 수요를 제품 기획과 생산에 즉시 반영하는 QRS(Quick Response System; 시장 즉각 대응시스템)를 구축했다. 그러자 재고가 크게 줄었다.
다른 대형 외국 브랜드는 본사에서 계절별로 아이템을 6~12개월 전에 미리 기획한 뒤 전세계에 동시에 풀어놓는다. 하지만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제품을 기획하고 생산하는 휠라코리아는 아이템별로 소량 생산해 시장 반응을 본 뒤 잘 팔리는 제품만 생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매달 새로운 제품을 내놓을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신제품의 80% 이상을 정상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었고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곤 ‘노 바겐세일’ 정책을 고수하면서 브랜드 명성을 지켜 나갔다.
휠라코리아는 시장 진입 첫 해인 1992년 매출액 150억원을 기록했고 이듬해는 100%의 신장세를 기록했다. 드디어 2000년에는 1470억원의 매출을 기록, 외국 브랜드로는 정상에 올랐다. 10년 만에 회사매출을 10배로 키운 것이다.
"올해는 1800억원 정도를 기록할 것 같네요. 남들이 모두 어렵다는데 저희는 표정관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비결은 다른 게 아닙니다. 원칙에 충실한 투명경영이 나은 결과이지요."
휠라코리아의 전략 중 특이한 것은 대부분 업무를 외부에 위탁하는 아웃소싱. 휠라코리아 본사는 제품 개발과 디자인 정도에만 주력하고 있다. 생산은 물론 영업까지도 모두 외부에 아웃소싱했다. 휠라코리아는 대략 60개 협력업체에서 의류를 공급받는다.
"아웃소싱을 하면 위험 분담효과가 있습니다. 저희는 대신 전문성을 가지게 됩니다. 아웃소싱도 무조건 맡기는 게 아니라 서로 경쟁을 붙이니까 저절로 품질 확보가 됩니다. 협력업체들엔 얼마나 반품(返品)하느냐에 따라 벌금을 매기니까 그쪽에서도 품질에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케팅에선 항공사의 마일리지제도를 원용해 휠라 제품을 많이 구매하면 점수를 누적시켜 각종 혜택을 주고 있다. 덕분에 ‘휠사모(휠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 자발적인 커뮤니티까지 등장했다. 고객관리도 막연하게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사 간 구매층에 집중적으로 광고지를 보내는 등 ‘1 대 1 맨투맨 방식’으로 전환했다.
■미국·유럽 이어 그룹내 매출 3위
휠라코리아는 휠라그룹 내에서 위상도 높아졌다. 1998년 휠라그룹 전체 매출 15억달러 중 약 10%에 해당하는 1억3000만달러를 휠라코리아가 달성했다. 미국과 유럽에 이어 그룹 내 매출 3위였다. ‘매출액 대비 순이익’을 기준으로 하면 휠라코리아는 지난해 휠라그룹에서 1위를 기록했다. 지금도 전세계에 납품되는 휠라 신발의 55~60%가 한국에서 생산되고 있다.
윤 사장을 따라 이탈리아에 가 본 어느 한국 기자는 "한국 내 명성에 비해 현지에서 ‘진 윤’이란 이름이 얼마나 유명한지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휠라그룹의 엔리코 후레쉬 전(前) 회장은 “휠라의 탄생은 이탈리아지만 휠라의 성장은 한국에서 이뤄졌다”며 “전세계 휠라인들은 휠라코리아를 본받으라”고 말했단다. 섬유산업에서 출발한 휠라가 세계 스포츠시장을 주름잡게 된 일등공신은 신발이고, 그 주연은 바로 한국이었던 것이다.
휠라코리아의 성공전략은 스포츠 마케팅에도 있다. 휠라코리아는 한국에선 생소한 스포츠 마케팅에 1993년부터 본격 참여, 매년 수십억원을 퍼붓고 있다. 한국 내에서 벌어들인 이윤을 한국으로 환원한다는 이유 말고도 스포츠웨어 브랜드로서 단순한 광고보다는 이벤트나 선수 스폰서 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 93년 휠라여자오픈골프대회를 시작으로 볼링, 야구, 축구 등 각종 종목에 뛰어들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북한팀도 지원했다.
현재 휠라코리아의 사업 영역은 계속 확장되고 있다. 1997년 휠라 인티모와 휠라 코스메틱사업부, 2000년 2월에는 휠라 키즈사업부를 만들었다. 올해는 골프웨어 전문 브랜드인 ‘휠라 골프’를 시장에 내놓았다. "스포츠웨어, 신발 등 휠라의 기존 제품군(群)은 국내시장에서 한계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속옷, 아동의류, 스포츠화장품, 골프용품 등에서 바람을 일으킬 계획입니다."
그에게 "요즘 휠라는 조폭(組暴)들이 즐겨 입는다는 얘기가 있다"고 물었다. 기분 나빠할 줄 알았는데 윤 사장은 오히려 반색이다. "미국에서도 하류층이나 소외층에서 오히려 유명 브랜드를 즐겨 입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뉴욕의 할렘이나 브루클린에서 패션 유행이 시작되는 현상을 보세요. 상대적 박탈감을 의류 브랜드로 보상하겠다는 심리라고나 할까요. 우리나라도 조폭들이 휠라를 즐겨 입는다면 그것은 좋은 브랜드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주 반가운 소식입니다."
■윤윤수 사장의 스타일
윤윤수 사장은 새벽 5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그는 지각하는 직원을 가장 싫어한다. "지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 전체가 엉망이 된다는 것이 제 신조입니다. 초창기에는 지각하는 직원들은 어김없이 보너스에서 5%씩 깎았습니다. 그랬더니 지각이 많이 줄더군요. 인생이나 직장이나 모두 유비무환(有備無患)입니다. 준비를 해야지요." 요즘도 불시에 지각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
윤 사장은 사무실에 걸려있는 액자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새가 날아다니기를 바란다면 나무부터 심어라’는 의미의 한자성어(漢字成語)가 적혀 있었다. 그에게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면 그 노하우가 무엇인지 공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근성(根性)입니다. 영어나 수학 실력 이전에 근성이 있어야 합니다. 주어진 역경을 이겨내고 바꾸는 근성이 필요합니다. 서울대학교 못나오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도 성공하는 사람은 바로 근성 때문입니다. 자칫 고도의 지식만 있으면 추진력과 대담성이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는 서울고 동기인 소설가 최인호(崔仁浩)씨의 '상도(商道)'를 열심히 읽는다고 했다.
골프를 좋아하지만 나이 50이 넘어 시작해서인지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단다. “아직 잘 쳐야 95 수준입니다. 그렇게 쉽지 않더군요.”
그는 부인 이효숙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부인은 윤 사장이 고생하던 시절부터 바로 옆에서 고생하며 도와준 사업 동반자다. 부인은 투명경영에 관한한 윤 사장보다 한발 더 나간다고 한다. 과거 회사 근무 시절 비리를 눈감아 달라고 돈다발을 들고 온 모 임원을 당장 돌려보내도록 한 것도 부인이었다고 한다.
<윤사장 약력> -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쌍학리(2남5녀 중 차남)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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