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청송백자" 사기대장의 하루/2007년5월2일
매일신문
1. 남희호 작 '불 지핀 사기가마' 2. 청송백자 마지막 기술자 고만경(76) 옹.
[청송백자] (5)사기대장의 하루㈛
'어이!' 안에서 외치는 소리와 함께 수정꾼은 널빤지의 제기 잔대와 사발을 먼저 가마 안으로 들인다. 가마봉이 작은 첫 칸은 주로 작은 기물들을 많이 넣고 뒤로 갈수록 큰 그릇을 많이 넣는다. 또 첫 칸 안에서도 큰 그릇은 가운데 쪽으로, 작은 그릇은 불이 들이치는 살창구멍 쪽으로 쌓는다.
고 대장은 뒤쪽 가장자리 쪽에 제기를 반듯하게 놓고 다시 위에 하나를 뒤집어 맞포갠다. 제기 굽 위에 굽을 맞포개고 그 위는 입과 입이 마주하도록 쟁여 가마 천장에 두어 뼘 정도 남도록 넉 단을 쌓았다. 그리고는 나중에 불길이 쉬이 감아 돌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약간 거리를 두고 사발을 같은 방식으로 쌓아나갔다. 뒤쪽을 다 쌓은 후 앞쪽으로는 종지나 잔을 쌓았다.
가마 안 사발은 불이 새는 것을 막고 불의 소통이 필요한 곳은 원활하도록 쌓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고 대장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재임하며 계속 불길을 구상한다. 얼추 첫 번 칸이 마무리되어 고 대장이 앉은걸음으로 굴 밖으로 나와 허리를 펼 동안 수정꾼 신 씨가 칸문 앞 쌓기를 마쳤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빛바랜 초가 사기움막에서는 ‘쿵~쿵’ 디딜방아 찧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온다. 방아 찧는 잡부들은 그날 빻은 양을 무게 달아 일당을 쳐서 받기 때문에 한시도 쉴 틈이 없다. 휴식이래야 한 번씩 쓰라잡이와 자리바꿈할 때 담배 한 대 태우거나 점심 때 주먹밥 한덩이 먹는 게 고작이다. 후텁지근한 사기움 안에서 종일 방아 찧는 일은 노동 중에도 중노동이기에 땀이 비 오듯 흘러 그들은 몽당바지만 엉치에 걸치고 일한다.
안골댁은 마른 그릇들을 받쳐 들고 묵묵히 가마께 비탈을 오르내린다. 마을과 떨어져 있는 가마터 주위는 인적이 드물다. 가마 여는 날이나 등짐장수들이나 소바리가 와서 북적댈까 평소에는 사람 내왕이 없다. 동네사람들은 사기 만드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을 ‘점놈’이라 부르고 멸시하며 사람대우도 않는다. 더구나 여자들은 잘 얼씬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 셋 딸린 과부인 안골댁은 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을 판이니 사기굴에 날품을 팔러 온다.
때문에 안골댁은 수비(水飛)할 때 질 거르는 작업도 곧잘 해낸다. ‘땅두멍’이란 구덩이에 채를 받쳐놓고 계속 흙물을 퍼넘기는 일은 남자들도 힘들어한다. 아마도 안골댁은 질 밟는 일도 시켜만 주면 해낼 성싶다. 그나마 조금 수월한 일은 유약이 묻은 그릇의 굽과 입둘레를 멍석에다 대고 문질러 닦아내는 일일 것이다.
고 대장은 곰방대에 담배 한 대를 쟁이며 앞으로 일들을 가늠해본다. 이런 속도라면 늘 그렇듯 도석 받으러 간 중늙은이 잡부가 올 때쯤이면 가마재임이 끝날 것이다. 그러면 가마 칸문을 창불 들일만큼 남기고 막을 동안 수정꾼과 안골댁은 불 지필 장작을 나른다.
장작은 이미 쪼개져 바짝 말라 있다. 점주가 흙 준비를 시작하면서 관솔 없는 소나무만 주문해 100여 평을 마련해뒀다. 그나마 이젠 웃화장골 가마 주변은 나무를 워낙 베어내 소나무가 없다. 고개 하나 넘으면 나무야 지천이지만 그만큼 품삯이 많이 든다. 여기도 한두 해 파먹으면 나무가 귀해 더 깊은 산골로 옮겨야 할 듯하다.
불 땔 준비가 끝나 해가 뉘엿해지면 점주가 제수를 장만해 사기굴로 올 것이다. 오늘은 저녁 준비는 하지 않아도 된다. 점주가 준비해온 돼지머리에 술과 과일, 어물을 차려 가마 뒤편 연고가 없어 묵은 묘에 고사 지내고 나면 너끈하게 저녁을 때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른 저녁을 마치고 6시경부터는 가마 불을 지필 요량이다. 장작은 아궁이에 가득 세워 넣어뒀다. 다른 데서야 아궁이 불을 천천히 오래도록 넣는다지만 우리는 한 아궁이 가득 불만 지피고 나면 옆 창으로 ‘창불’을 때지 아궁이로는 불을 더 넣지 않는다. 수정꾼과 번갈아 가며 내일 새벽녘까지 넣으면 한 가마 굽기가 끝날 것이다. 가마는 나흘 후 영천 5일장에 댈 수 있도록 열 생각이다.
두 번째 굴을 기어들어가며 고 대장은 문득 지난번 가마 열던 날이 생각났다. 중절모를 삐딱하게 걸쳐 쓴 채 말을 타고 온 점주는 물건이 잘 나오자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연방 함박웃음을 터트리지 않던가. 어쨌건 이번 가마도 물건이 잘 나와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잘만 나온다면 사기대장 몫으로 나눠 받는 그릇 1할7부를 팔면 송아지 한 마리 값은 될 터이니…. 닷새 후면 1할5부를 받는 수정꾼 신 씨와 둘이서 고개 너머 죽장 주막집에 가서 거나하게 목을 축일 수 있겠지. 10여 년 세월이 그렇게 하루같이 흘렀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인터뷰)) 청송백자 마지막 사기대장 고만경 옹
-청송백자는 다른 것에 비해 어떤 점이 뛰어난가.
▶무엇보다 사발에 밥을 담아두면 밥맛이 월등히 좋다. 다른 그릇들에 비해 밥알이 들러붙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밥에 물기가 생기지 않고 잘 쉬지도 않는다. 더러는 청송백자가 얇고 잘 깨어진다고 하지만, 오히려 무겁지 않아 쓰기에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릇 만드는 일은 어떻게 하게 됐나.
▶청송 부남에서 어려운 집안의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는 집안에 입 하나 더 있는 게 큰 짐이었다. 그래서 내룡 간이학교를 1년 반 정도 다니다 열다섯 살 나던 해, 사기공방에 들어가 농사일도 거들고 공방 잔심부름도 하면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특별히 가르쳐준 스승이 있었나.
▶영덕 진불 출신의 '남촌 어른'이란 분이 있었는데, '물레에 앉아서 한번 만들어보라.'고 했을 뿐 특별한 지도는 없었다. 처음에는 잔그릇부터 만들기 시작, 모르는 것은 수시로 물어가며 나름대로 터득했다. 나중에는 웃화장 공방에 있는 70세 정도의 '하외 어른'이란 분이 솜씨가 좋았는데 그 분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백자 만드는 일은 얼마나 했나.
▶처음 들어간 데서 3년 있다가 '한소밭골'이란 곳과 '설티' '웃화장'공방 등지를 돌며 1958년 마지막으로 가마문을 닫을 때까지 15년간 했다. 배우고 3년 돼서는 대장 노릇을 했지만 그 중간에는 점주가 밑천이 달려 폐점하고 남의 공방에서 일한 적도 있고 맏형과 같이 직접 공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청송백자 공방이 문닫고 난 뒤는 무슨 일을 했나.
▶1961년 늦게 군을 제대하고 결혼한 후 방앗간 일을 하다가 65년에는 영일에서 화전농을 했다. 71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다가 정미소를 인수했는데 재미를 못보고 팔아넘겼다. 그리고 대구 포항 등지를 돌며 행상 농막일 등을 했다.
-요즘 생활은.
▶마누라가 시력을 잃어 종일 방에만 있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수발해야 한다. 그나마 하나 있는 아들이 커서 결혼해 제 밥벌이하고 손자 손녀도 봤더니만 그만 회사서 일하다가 다쳐 반신불수가 되어버렸다. 대문 밖을 나선 며느리는 소식 끊은 지 오래고 손자 손녀를 데리고 다섯 식구가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금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지금 백토를 조합해 과거와 같은 청송백자를 만들 수 있나.
▶원료 나는 곳이나 조합법은 아직도 훤하다. 눈을 감으면 사기움막 전경이 선한데 어떻게 잊겠는가. 그러나 원료가 똑같을지는 모르겠다. 50년 세월이 흘러 숨이 가쁘고 손기술도 젊을 때 같지야 않겠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최근에는 집에서 조금씩 만들어보고 있는데 물레 차서 모양 잡고 유약 입히는 거야 얼마든지 한다. 그렇지만 그것도 흙값이 만만찮고 만들더라도 돈 들여 굽기도 부담스러운 형편이니….
전충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