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Creta) 섬의 시도니아(Sydonia) 출신인 성 니콜라우스 스투디테스(Nicolaus Studites, 또는 니콜라오)는 열 살 때부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스투디우스(Studius) 수도원에서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11월 11일)의 제자로서 교육을 받았고, 18세에 그곳의 수도자가 되었다. 황제 테오필루스가 성상공경 문제로 박해를 일으켰을 때에는 잠시 유배생활을 하였으나, 842년에 그 황제가 사망하자 귀향하여 원장이 되었다. 또 858년에 황제 미카엘 3세가 성 이냐시오(Ignatius, 10월 23일) 주교를 유배시키고 포티우스(Photius)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자, 그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하여 자발적으로 유배의 길을 떠났던 인물이다. 몇 년 후 수도원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즉시 투옥되었다가 스투디우스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독일의 마인츠 출신인 듯한 라바누스 마우루스(또는 라바노 마우로)는 헤센(Hessen) 지방 풀다(Fulda)의 수도원 학교와 프랑스 투르(Tours)에서 공부하였고, 풀다로 다시 돌아온 후에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특히 초기 교부들과 성서에 대하여 폭넓은 지식을 가졌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81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822년에는 원장이 되어 여러 교회와 수도원들을 건설하였다. 또한 그는 스스로 원장직을 사임하여 지내던 중 71세의 나이로 마인츠의 주교로 임명되자, 교구 사제들에게 수도자와 같은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켜 쇄신코자 하였고, 고트샬크(Gottschalk)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봉쇄하였다. 그는 순교록을 기술하였고 또 유명한 “오소서, 성령이여!”(Veni Creator Spiritus)를 짓는 등 많은 찬미가와 시를 썼다.
성 렘베르투스(Rembertus, 또는 렘베르토)는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브뤼헤(Brugge) 근방에서 태어나 투르홀트(Turholt) 수도원의 수도자로 지내던 중, 성 안스카리우스(Anscharius, 2월 3일)의 부름을 받고 그 성인의 선교지에서 일하게 되었다. 865년 성 안스카리우스의 선종 이후 그는 브레멘-함부르크 대교구의 주교로 피선되어 스웨덴과 덴마크 그리고 남부 독일 지방 교회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또 북부 슬라브인들의 개종을 시도했으며, 성구들을 팔아서 포로들을 속량하였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일과 기도의 균형을 맞출 줄 알았다는 것과 하느님의 현존을 잊어버릴 정도로 외부 일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성 안스카리우스의 전기를 썼다.
아일랜드 추장의 아들인 성 모단은 스코틀랜드의 드라이버그(Dryburgh) 수도원에서 지극히 엄격한 보속생활을 하던 중 자신의 뜻과는 달리 원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수도원에만 있지 않고 스코틀랜드의 스털링(Stirling)에서 포스(Forth)에 이르는 지역에서 순회설교를 실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선교활동을 자주 중단하고, 그 동안에 덤바턴(Dumbarton) 교외의 산중에서 독수생활을 즐겼다. 그는 한 번 그곳에 들어가면 30-40일 정도씩 관상에만 몰두하였다. 이윽고 말년에 이른 그는 아예 그곳에 정착하여 독수생활을 하다가 선종하였다.
프랑스 중부에서 태어난 성 아벤티누스(또는 아벤티노)는 은수자로서 살기 위해 은퇴할 때까지 트루아(Troyes)의 주교 성 루푸스(Lupus, 7월 29일)를 도와 가난한 이들에게 구호물품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였다. 그가 은둔하던 장소는 현재 생아뱅탱(Saint-Aventin)으로 불린다.
1302년 이탈리아의 피렌체(Firenze)에서 태어난 성 안드레아 코르시누스(Andreas Corsinus, 또는 안드레아 코르시노)는 어린 시절 성질이 고약한 문제아였는데, 갑작스럽게 마음을 고쳐먹고 1317년 피렌체의 카르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아주 모범적인 수도자로 변신하였다. 그는 프랑스 파리(Paris)와 아비뇽(Avignon)에서 수학한 후 1349년 피에졸레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직책을 모면하려고 멀리 도망을 쳐서 엔나(Enna)의 카르투지오 수도원에 몸을 숨겼으나 이내 발견되어 결국 주교 축성식을 가졌다. 주교로서 성 안드레아는 분쟁을 조정하는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 때문에 그는 볼로냐(Bologna) 시의 불안을 화해시키는 교황사절로 임명되어 맹활약을 하였다. 그는 1374년 시복되었고, 1629년 4월 29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1737년 코르시니(Corsini) 가문 출신인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는 로마(Rome)의 성 요한 라테라노 성당에 그를 기념하는 성당을 세웠다.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레오니사 출신인 성 요셉(Josephus)은 18세 때에 카푸친 회원으로 서원하고 요셉이란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순종적이었으며 영웅적으로 극기생활을 하였다. 한 번은 3주간 동안이나 물도 빵도 없이 지낸 때도 있었다. 그는 항상 손에 십자가를 들고 설교했고, 끓어오르는 열정을 폭발시키는 듯한 자세로 열변을 토하였다. 1587년 그는 터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부근의 페라(Pera)로 파견되어 수많은 배교자들을 회두시키고 모슬렘들을 상대로 설교하였다. 그 과정에서 두 차례나 투옥되었는데, 두 번째 투옥중에 그는 잔인한 형벌을 당한 후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움브리아 지방에서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하며 40시간 성체조배 신심을 보급한 그는 1612년 2월 4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737년 6월 22일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746년 6월 29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요안나 드 발루아(Joanna de Valois)는 1464년 4월 23일 프랑스 파리(Paris)에서 당시의 왕인 루이 11세(Louis XI)와 왕비 사부아(Savoie)의 샤를로트(Charlotto)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육체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고 더욱이 곱사등이에 마마 자국까지 있었기 때문에 국왕인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매우 냉대하였다.
그러나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오를레앙(Orleans)의 공작인 루이(Louis)와 결혼하기로 정해졌기 때문에 성녀 요안나는 12세가 되던 해에 여러 가지 정치적인 정황에 따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오를레앙의 공작은 그녀를 무시하고 혐오했으나, 이러한 모진 대우들을 그녀는 고결한 성품으로 이겨냈다. 후에 루이 12세로 왕위에 오른 오를레앙의 루이 공작은 자신의 결혼은 루이 11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그의 이런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해 주었다. 결국 혼인무효와 함께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 베리(Berry)의 공작으로 봉해진 성녀 요안나는 자신의 영지를 왕국 안에서 가장 지혜롭게 운영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병자와 전염병 환자 구호, 주거 시설 복구, 가난한 일꾼들의 급여 인상, 여자 어린이들의 교육,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 모금, 수도원 개혁 등을 계획에 따라 실천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작은 형제회 회원이자 자신의 고해사제였던 가브리엘 마리아(Gabriel Maria, 8월 27일) 신부의 도움으로 신심 깊은 10명의 여성들을 모아 관상 수도원인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1504년에 가브리엘라 마리아(Gabriella Maria)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궁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녀는 남모르는 고행과 여러 번의 신비로운 종교체험을 한 후 1505년 2월 4일 부르주(Bourges)에서 사망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1742년 4월 21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50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포르투갈 리스본(Lisbon) 출신의 예수회원인 성 요한(Joannes)은 1673년에 인도 선교사로 파견되어 주로 마두라(Madura) 지역에서 선교하였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주민들의 언어와 관습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으나 끝내 죽음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마라바(Marava) 지방의 어느 개종자가 자기 아내들을 포기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곳은 일부다처주의가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박해가 일어났다. 결국 그는 오리우르(Oriyur)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1852년 2월 17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7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성 이시도루스(Isidorus, 또는 이시도로)는 젊어서 그 도시를 떠나 펠루시움 교외 리크노스(Lychnos)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 후 그는 사제가 되어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특히 수도자로서의 의무 수행에 충실하였고 수많은 서한으로써 유명하였다. 약 2천통에 달하는 그의 편지들은 주로 신심적인 권고와 신학적인 교육을 목표로 한 것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한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에우티케스(Eutyches) 이단의 강력한 반대자였다.
영국의 링컨셔(Lincolnshire)의 셈프링햄 태생인 성 길베르투스(Gilbertus, 또는 질베르토)는 부유한 노르만(Norman) 기사인 조셀린(Jocelin)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영국으로 귀향한 뒤에 부친을 계승하여 셈프링햄과 티링턴(Tirington)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링컨(Lincoln)의 로버트 블로엣(Robert Bloet) 주교 관할의 성직자가 되었으나, 1131년에 부친이 사망한 관계로 작위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부터 그는 일곱 명의 젊은 여성들과 남성들이 봉쇄생활을 하는 그룹의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이 단체를 수도회로 육성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얼마 뒤에 그는 프랑스 디종(Dijon) 근처 시토(Citeaux)에 가서 시토회원들이 여자 수도회를 맡아 줄 것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리고 남자 수도회는 자신이 지도하여 교황 성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 7월 8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길베르투스회로도 알려진 이 공동체는 영국에서만 26개의 수도원으로 성장하였으나 헨리 8세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1165년 그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 주교를 지원한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는 120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독일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의 간데스하임(Gandersheim) 수녀원의 로스비타(Hrosvitha)가 쓴 10세기의 라틴어 연극 작품에는 성 테오필루스(또는 테오필로)가 실리시아(Cilicia) 지방 아다나 교구의 주교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는 겸손한 주교였다고 한다.
로스비타가 전하는 다소 전설적인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교회의 직책에서 면직되자 사탄과 계약을 맺고 난폭하게 행동한 어떤 주교였다. 후일 그 주교는 회개하고 성모님께 간청하여 용서를 구하였으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기 가슴에 사탄에게 서약한 증서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더욱 간절히 통회하고 공식적으로 자기 죄를 고백하였으며 그 증서를 교우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웠다. 그런데 사실은 그가 바로 성 테오필루스였다고 한다. 사실 성 테오필루스의 이야기는 후일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괴테(Goethe)가 파우스트(Faust)를 쓰는데 기초적인 소재가 되었다.
이집트 트무이스의 주교이던 성 필레아는 분별력이 있고 또 학식이 뛰어났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감옥에서 그는 알렉산드리아 신자들의 박해 상황을 글로 써 보낸 직후에 순교하였다. 이 때 호민관이던 성 필로로무스(Philoromus) 역시 성 필레아를 배교시키려는 집정관의 노력에 반대하다가 순교하였다. 이 둘은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순교의 길에 동참하였다
이집트 트무이스(Thmuis)의 주교이던 성 필레아(Phileas)는 분별력이 있고 또 학식이 뛰어났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감옥에서 그는 알렉산드리아 신자들의 박해 상황을 글로 써 보낸 직후에 순교하였다. 이 때 호민관이던 성 필로로무스(또는 필로로모) 역시 성 필레아를 배교시키려는 집정관의 노력에 반대하다가 순교하였다. 이 둘은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순교의 길에 동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