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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인물)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 22)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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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행복 처방전』 중에서
[한시]
허난설헌(許蘭雪軒)
- 정문규(鄭紋圭)
벽공백운작시가 (碧空白雲作詩歌 벽공백운작시가)
견우직녀수심야 (牽牛織女繡深夜 견우직녀수심야)
몽중연군하처행 (夢中戀君何處行 몽중연군하처행)
수구임루남대하 (愁丘霖淚濫大河 수구림누람대하)
- 해석
허난설헌(許蘭雪軒)
- 정문규
푸른 하늘 흰 구름은 시 노래를 짓고
견우와 직녀는 깊은 밤 수놓는데
꿈속에 그리는 임 어디로 가셨는지
근심 언덕에 장마 눈물, 큰 강을 넘치네.
*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본관 양천(陽川). 호 난설헌. 별호 경번(景樊).
본명 초희(楚姬). 강릉(江陵) 출생. 균(筠)의 누이.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했으며, 1577년(선조 10)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작품 일부를 동생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歌辭)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
출처: (제목: 허난설헌 『행복 처방전』 중에서 / 보낸날짜: 2008년 12월 06일
보낸이: "세아모 운영자 " <jmkhonest@hanmail.net> 받는이: “함동진” <hamdong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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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허난설헌의 시
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그녀는 짧은 생에 커다란 아픔 앓이만을 하다가 젊디젊은 나이에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강릉의 명문가에서 두번째 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아버지는 경상 감사를 지냈던 동인의 영수이고(화담 서경덕의 제자), 큰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 예조 판서를 지낸 인물입니다. 임금은 동생 허균을 너무나 아끼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라며 울며 애원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허균은 봉건 사회 타파와, 이상 세계 실현에 실패한 것을 슬퍼하며 죽음을 택합니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 별호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호라고 합니다.(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 22). 그녀는 어릴 적부터 놀라운 글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당시의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을 거부할 수 조차 없었던 사회 속에서의 한을 시에 담아 한탄하며 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閨怨(규원)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그녀는 미쳐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에 '김성립'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 김성립의 방탕한 생활과 기방 출입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반면 김성립은 늘 재주가 빼어난 자신의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늘상 허균의 눈에도 그리 보여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은 우수한 자"라고 매형을 평하기도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고, 시댁에서는 밖으로만 도는 아들과 아들보다 뛰어난 며느리를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설헌에겐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한 해 차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녀는 일찍이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는데, 그녀는 27세되던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서 "금년이 바로 3․9의 수(3×9=27, 27세를 뜻함)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 전해집니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난설헌의 글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여 동생은 모두 태워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가 만일 평범한 가정 속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랑받고 한 집의 며느리로서 대우받으며 자식들을 그리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슴 저미는, 설움 담긴 글들을 우리는 단 한 편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요.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였으나, 아이를 얻지 못하였고 죽은 후에도 본처가 아닌, 후처와 합장하였다고 합니다..
숨막히는 당시 유교 사회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희생당한, 빼어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인 허난설헌의 아픔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얼마 전해지지 않는 몇 편의 시와 그림 속에서 배어 나오는 듯 합니다. 당대의 학자였던 오빠 허봉에게서 '두보의 소리를 네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라는 극찬을 받았던,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천재 허난설헌의 삶은 곧 남존여비, 여필 종부 등의 유교적 사상과 가치관에 희생된, 한 여인의 슬픔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슬픔입니다...
哭子(곡자)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 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출처: "김억 한시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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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설헌, 그 슬픈 생애 국내외 작품집, 최고 여류시인
-정영기 시인의 우리고장 문화유적 답사기 -15
정영기(艸堂)
지난 2001년 5월 13일, 강동문인회에서 시서도예(詩書陶藝) 작품을 만들러 이천 남강도예에 간 일이 있었다. 함께 동행을 한 김충환(金忠環) 구청장이 곤지암을 지날때 왜 곤지암이라 하였느냐고 물었다.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아는체 하였다. 곤지암(昆池菴)이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곧바로 정정하여 주었다. 암자 암(菴) 자가 아니라 바위 암(巖) 자다. 그래서 곤지바위라고도 불린다. 옛날에 곤지바위에 벼락이 내리쳐 쪼개진 바위틈으로 향나무가 자생을 하였다. 그 400년된 향나무와 곤지바위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63호로 보호를 받고 있다.
또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묘소가 어디쯤 있는지 묻는 사람이 많았다. 광주읍에서 경안천을 따라 내려가면 곤지암천과 만나는 지점에 멋진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고 또 두 번째 다리를 건너면 삼육재활병원이 있다. 병원 뒷산을 넘고 또 고개를 넘으면 중부고속도로 3터널 부근인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모랏골이 나온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섬처럼 고립된 벽촌이었다. 이런 곳에서 우리나라 여성중 최고의 시인 허난설헌이 살다가 묻힌 곳이니 어찌 한 번 가보지 않겠는가?
허난설헌은 1563년 강릉 초당리에서 아버지 허엽(許曄)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계속 승지. 대사간. 대사헌. 부제학 등의 벼슬을 했으므로 한양의 건천동에서 자랐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이름이 없었는데 우리나라 여성중 최초로 명을 초희(楚姬), 자를 경번(景樊), 호를 난설헌으로 부르는 우뚝 선 봉우리였다. 난처럼 청아한 용자에 재예가 비범한 그녀는 1570년 여덟살의 어린 나이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이라 이름이 났다. 그 뒤 작은 오빠 허봉(許封)의 친구인 이달(李達)에게서 동생 허균(許筠)과 함께 시를 배웠다.
1577년 안동김씨 서당 김성립(西堂金誠立)에게 시집을 갔다.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金瞻)과 오빠 허봉이 호당(湖堂)의 동창이었으며 각별히 사이가 좋았으므로 이들 사이에서 혼담이 이루어졌다. 김성립은 신혼 초부터 난설헌을 버리고 한강 서재에서 과거공부를 하였다. 난설헌은 모랏골에서 가슴 가득한 한과 곱게 가꾼 꿈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강가 서당에서 글을 읽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고 신선세계를 상상하면서 계속 시작 생활(詩作生活)을 하였다.
1589년 3월 19일, 화려했던 친정이 몰락해 갔고 사랑하는 아들 딸마저 먼저 보낸 슬픈 나날을 보내다가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은후 스물 일곱 나이로 죽었다. 난설헌은 죽으면서 자기의 시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모라실 경수산 안동김씨 선영에 묻힌 해에 남편은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김성립은 임진왜란때 왜놈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590년 11월 동생 허균이 친정에 흩어져 있던 시와 자기가 외고 있던 시를 모아서 <난설헌집>을 엮었다. 1598년 봄. 정유재란을 도우러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제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외워 주었다. 이 시가 <조선시선> <열조시집>에 실린 뒤에 <난설헌집>이 출판되었다.
1606년 3월 27일 허균이 중국에서 온 사신 주지번(朱之蕃)에게 <난설헌집>을 전해주었다. 난설헌이 죽은후 18년인 선조 39년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1711년 일본에서도 분다이야 지로베이(文臺屋次郞兵衛)에 의하여 <난설헌집>이 간행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1608년 공주목사 허균이 간행한 목판본 <난설헌집>이 최초의 것이 된다. 나라 안팎에서 문집이 되어 나온 것만으로도 우리나라 최고의 여자가 아니겠는가?
난설헌의 시는 시상(詩想)이 세 가지 경향으로 간취(看取)된다. 첫째는 신비주의를 추구함으로써 현실의 환멸에서 초탈하려 함이다. 장편시 유선사(遊仙詞)가 그것이다. 둘째는 궁사류(宮詞類)에서 빈녀음(貧女吟)에 이르기까지 규원(閨怨)과 고독의 상처가 다소곳이 엮어져 한숨으로 얼룩진 여인의 소회(所懷)를 대변한 것이다. 셋째는 곡자(哭子)와 기하곡(寄荷谷) 등에서 뼈저린 숙명의 고뇌를 표출해낸 것이다.
난설헌의 원래 무덤은 남편 김성립과 거리를 두고 방향도 달리한 위치에, 가지런히 자리한 자녀의 묘를 앞에 두고 있었는데 중부고속도로 개설로 인하여 고속도로변에 현재의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이숭녕(李崇寧) 박사가 묘비를 짓고 전국시가비동우회에서 시비를 세워 놓았다.
허난설헌의 시비는 경기도 용인군 양천허씨 선산과, 광주 경화여자상업고등학교 교정과, 생가가 있는 강릉시 초당동 솔밭과,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모랏골 묘소 등 네곳에 건립되어 있다. 이들 모두를 답사하고 나서 가장 흡족하지 못한 묘소 앞의 시를 내 나름대로 번역해 보았다. 한 번 비교해 볼 일이다.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꿈에 광상산에 놀러가서
벽해침요해(碧海浸瑤海) 푸른 바다는 瑤海를 담갔고
청난기채난(靑鸞奇彩鸞) 푸른 난조는 채색 난조에 기대어 있다.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 연꽃 3, 9 송이의
홍추월상한(紅墜月霜寒) 붉은 이파리 달빛 속 서리 위에 떨어져 차갑다.
三九朶 : 모든 책과 비에는 한결같이 "스물 일곱송이"라고 써 놓았다. 나는 꿈속에서 연꽃을 3 또는 9 송 이를 본 것으로 주장한다.
곡자(哭子) 자식을 곡하다.
거년상애녀(去年喪愛女) 거년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금년상애자(今年喪愛子) 금년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애애광릉토(哀哀光陵土) 슬프고 슬픈지고 광주의 땅에
쌍분상대기(雙墳相對起) 두 무덤이 서로 대해 일어 있다.
소소백양풍(蕭蕭白楊風) 쓸쓸한 白楊의 바람이여!
귀화명송추(鬼火明松楸) 도깨비 불이 松楸에 번쩍인다.
지전초여백(紙錢招汝魄) 紙錢으로 너의 넋을 부르고
현주전여구(玄酒奠汝丘) 玄酒(물)로 너의 무덤에 차려놓는다.
응지제형혼(應知弟兄魂) 짐작컨데 弟와 兄의 혼이
야야상추유(夜夜相追遊) 밤마다 밤마다 상종하며 놀리라.
종유복중해(縱有腹中孩) 비록 (내) 뱃속에 애가 들어 있지만
안가기장성(安可冀長成) 어떻게 장성하기를 바라리요
낭음황대사(浪吟黃臺詞) 부질없이 黃臺詞를 노래하며
혈읍비탄성(血泣悲呑聲) 피눈물 흘리며 슬퍼 목이 메인다.
黃臺詞(黃臺瓜詞) : 당(唐)의 이필(李泌)이 숙종에게 세자를 의심치 말라며 아뢴 노래니 [오이를 黃臺下에 심었더니 오이가 열어 보기가 좋다. 한 개를 따내니 오이가 좋더니, 두 개를 따내니 오이가 드물어 지고, 세 개를 따낸 것은 그래도 좋으나, 네 개를 따내면 덩쿨만 안고 돌아간다]라 했음. 자식이 자꾸만 죽어가는 것을 슬퍼한 뜻임.
이 글을 쓰기 위해 허난설헌에 관한 책과 논문을 많이도 읽었다. 친구 김옥상(金玉相) 원장이 제1회, 99 허균. 허난설헌 문화제 자료를 모두 보내주었고 모랏골에 살고 있는 안동김씨서운관정공파(安東金氏西雲觀正公派) 종친회 김돈영(金敦永) 이사장과 방배동에 살고 있는 종손 김관호 목사를 만나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고장에서 문학사상 가장 주옥같은 시를 쓰시다 젊은 날에 가신 님을 추앙하면서 한정된 지면에 졸필을 남긴다. 2년여 동안 애독하여 주신 여러분과 도움주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끝> ⊙ 발표문예지 : 2000, 06. 09 [토요저널] 발행인 김병관 (제207호) (2001-12-05 문학의즐거움)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