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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미술관★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오일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
Patrick J. Buchanan 12/11/01 http://www.theamericancause.org/patwhydidjapan.htm 일본은 , 미국의 산업력의 1/10을 가고서 미국의 진주만 함대들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했나? 그것은 이길 수 없는 전쟁으로 이끈 국가 테러였다. 일본인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나? 아니다. 일본인들은 필사적이었다
일본인들이 왜 공격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제1차 대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베르사이유에서 자신의 전리품 몫을 얻으려고 했을 때, 일본은 완고한 우드로 윌슨과 부딪혔다.
윌슨은 일본이 피를 지불하고 함락한 산동에서의 독일의 양보에의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일본은 영국이 약속했던 것을 부정하면, 회의장을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일본은 엄포를 놓고 있지 않다.”고 윌슨은 경고했다. “우리는 그들이 가져서는 안 될 것을 주었다.” 1921년에, 워싱턴 해군 회의에서, 미국은 영국에 압력을 가하여 일본과의 20년간의 동맹을 끝내라고 하였다. 미국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영국은 충성스런 친구였던 자부심 강한 나라를 격노하게 하고 소외시켰다. 일본은 지금은 고립되어 북쪽으로는 스탈린의 자라나는 제국, 동쪽으로는 흥기하는 중국과 , 남쪽으로는 일본을 싫어하고 믿지 않는 서구 열강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중국에서 내전이 발발했을 때, 일본은 1931년에 완충 국가로서 만주를 점령하였다. 이것은 서구열강들이 자신의 제국들을 키운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서구는 일본이 “침략” 코스를 택한데 대하여 “충격, 또 충격”을 먹었다. “우리가 포커 게임 하는 법을 막 배우자마자 , 그들은 그 게임을 브리지 게임으로 바꾼다.” 일본은 영국이 인도에 창조했던 것-일본을 세계열강에 올려놓을 수 있는 착취할 수 있는 방대한 식민지를 중국에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1937년에 북경 근처의 마르코포로 다리에서의 충돌 후에, 일본은 침략하여 ,4년간의 전투 후에, 해안 도시들을 장악하였지만 내륙은 장악하지 못하였다. 프랑스가 1940년 6월에 항복하였을 때, 일본은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군하였다. 비록 미국은 그 지역에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강철과 파쇠에 대한 금수 조치를 하였다. 히틀러가 1941년에 러시아를 침략한 후에, 일본은 남부 인도차이나로 진군하였고, 루즈벨트는 모든 일본 자산의 동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오일을 끊어 버리기를 원치 않았다. 그가 그의 내각에 7월18일에 말했듯이, 오일 금수는 전쟁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오일에 굶주린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전들을 장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무성 변호사인 딘 애치슨은 일본인이 미국 오일을 구매할 수 없도록 하는 제재를 가하였다. 루즈벨트가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경지가 되었다. 도쿄는 매파와 비둘기파로 양분되었다. 비둘기파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고노에 수상은 주일본 대사 Joseph Grew를 불러서 루즈벨트를 만나겠다고 은밀하게 제안하였다. Joseph Grew에 따르면, 고노에는 미국이 중국과의 평화를 중재하고 오일 파이프라인을 열어주는 대가로 스탈린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해 줄 중국 북부의 완충지역만 제외하고 인도차이나와 중국을 포기할 의사가 있었다. 고노에는 Joseph Grew에게 히로히토 천황은 그의 제안을 알고 있고, 일본의 퇴각을 명령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뮌헨 ”을 두려워한 미국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고노에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히데키 도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쟁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일본에게 절충안을 내놓았다. 일본이 남 인도차이나에서 퇴각하면, 미국은 오일 금수를 일부 해제할 것이다. 그러나 , 장개석은 히스테리컬 하게 되었고, 그의 미국 자문인 Owen Lattimore가 개입하여 그 제안을 유산시켰다.
일본 제국의 사망과 살기 위한 전쟁과의 선택에 직면하여, 일본은 인도차이나의 유전들을 탈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간섭할 수 있는 유일한 군대는 루즈벨트가 편리하게 샌디에고에서 호놀룰루로 옮긴 미국 함대였다. 그래서 일본은 공격했다. 그래서 일본은 박살나고 베트남에서, 중국에서, 만주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그 곳들은 스탈린, 모택동, 호지명의 수중에 떨어졌다.
1941년 12월 7일 느닷없이 하와이 오아후섬에 있는 미국의 육해군 기지에 폭격을 가한 일본.. |
진주만공격과 우리민족
매년 12월초에는 미국 신문이나 TV에서 1941년 하와이 진주만피습사건을 비중있게 다룬다.
미국인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위한 일면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당시 실제로 직면했었던 군인들이
지금까지 생존해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증언도 듣고 추모행사도 거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진주만 폭격은 우리민족 해외동포들이 독립의 꿈을 한층더 불사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41년 12월 7일 새벽 6시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기 위하여 일본 항공모함에서 출격하는 제1진 183대
전폭기들을 송영하고있는 모습. 모자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항모는 하와이로부터 440Km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진주만 포드섬을 중심으로 줄을 지어 정박해 있는 미 전함들이 일본 전폭기들의 공격 목표였었다.
1941년 12월 7일은 오늘 처럼 일요일이었었다.
수병과 군인들은 외박 나갔거나 늣잠 자는 날이다.
첫번째 일본전폭기들이 진주만 상공에 나타난 것은 오전 7시 55분이었다.
포드섬 부두에 정박해 있는 오크라호마호 전함이 폭격당해 연기가 솟아나고 있다.
일본 전폭기로부터 톨피도가 투하되어 연기를 뿜으며 전함으로 달려 가고있는 장면.
아리조나호 전함이 화염에 쌓여 폭팔하고 있는 모습을
포드섬에 있는 미해군비행기지에서 수병이 어리벙벙해 하면서 바라보고있다.
곧바로 비행기지에 있던 미해군 전투기 33대가 폭파당했다.
아리조나호 전함이 피격당한 직후 첫번째로 찍은 사진.
검은연기가 하늘로 치솟고있다. 이해할수 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해 하는 미군병사들.
메리랜드호 전함이 연기를 기둥처럼 뿜으며 폭팔하고 있다.
오른쪽에 소방선이 기름바다인 진주만을 헤치며 전함으로 달려 가고있다.
부두에 있는 폭탄저장고가 공격을 받아 폭팔하고 있고 오른쪽은 전함 네바다호가 불길에 쌓여있다.
웨스트버지니아호 전함이 피격당해 옆으로 기울어 침몰하는 중이고 나란히 서있는 테네씨호 전함도
불길에 쌓여있다.
구조보트가 한사람을 물에서 건저 내고있다.
펜실바니아호가 대파된채로 기울어저있다.
일본전폭기의 일방적인 기습공격에 공습은 일본측 대승으로 끝났다.
천만다행인 것은 항공모함 세대 모두 태평양에서 근무 수행중이어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공습이 끝난후
일본측 피해는 하와이 앞바다에서 침몰된 잠수함 한척과 전폭기 360대중에 겨우 29대 만이
격추 되었을 뿐이다.
반면에 미국측 피해는 전함 6척 침몰, 전폭기 164대 소실, 해군 2008명 전사, 육군 218명 전사,
해병대 109명 전사, 민간인 68명 사망, 부상자 1178명이었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인들만 경악 시킨게 아니었다.
평화회담을 하러 워싱튼디씨에 머룰던 일본 대표들도 몰랐었고 일본의 우방인 히틀러도
알지 못했던 초특급 비밀작전이었었다.
진주만공습이 있은 직후 서로 찾아 다니던 육군중사 부부가 무사함을
확인하는 순간.
미일평화회담을 하러 회담장에 들어서는 일본대표들.
일본대사관 직원이 서류를 불사르고있다.
진주만공격 직후 일본천왕 히로히토는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놀란 미국인들은 애국심으로 군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을 치욕의 날"로 선포했고 의회는 3일후에 전쟁을 선포했다.
락히드공장에서 P-38 전투기를 조립생산하는 데 총력을 기우리고 있는 모습.
그 당시 미국인들은 일본이 직접 미본토로 상륙해 처들어 오는줄로 믿고있었다.
쌘프란시스코 패시픽전신전화국 건물앞에 모래주머니로 벽을 쌓고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California's Owens Valley'에 수용소를 짓고 소개시켰다.
그때 한국인중에는 일본인으로 오해 받아 조선인임을 해명하느라고 애먹은 동포들이 많이있었다.
1936년 서울에서 유한양행 주주총회를 마치고(앞줄에서 네번째가 유일한)
일본의 진주만 폭격은 재미한인들에게 일본 멸망의 신호탄이었다.
조국독립을 위해 줄기차게 투쟁하던 동포들은 이제 세계열강 미국과 함께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마주하게 된것이다.
뜻하지 않게 성큼 다가온 조국 광복의 현실은 한인들을 애국심으로 독립운동을 성원하게 만드렀다.
재미 한인 독립운동은 바로 태평양전쟁때 절정기를 맞았다.
진주만 폭격 뒤 재미한민족연합회는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부대를 훈련시켜
줄것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인들은 시민권자가 될수 없었음으로 이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반면 캐리포니아 주 방위군 휴스대령은 한인 중대를 조직하는데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왔다.
이에 나이가 18세부터 64세까지인 한인들 50명이 지원했고 중국인들과 필리핀인들도 가세하여
동양인 대대가 구성 되었다.
이 대대의 이름은 '맹호군'이었고 대대장은 김용성이었다.
맹호군의 정식 인가가 1942년 4월 26일에 나왔고 대대기가 수여되었다.
소년병학교 출신인 백일규와 유일한은 맹호군의 여름 군복을 마련하는데 각기 65달러와 250달러를
희사하였다.
유일한은 여기에 더해서 재미 한민족위원회와 국민회를 위하여 거금 1000달러를 기부하였다.
한창 활동하던 43세의 유일한은 일본이 패망할것을 확신하고 미국 첩보부대에서 헌신한다.
첫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