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추악한 존재 앞에서 느끼는 ‘구토’
구성; "다만 그 모습은 나의 생각 속에 있는 하나의 가상에 불과했다. 나는 한숨을 짓고, 참을 수 없는 결핍을 느끼며 의자에 벌렁 나자빠졌다."
"드 롤르봉 씨는 나의 협조자였다. 그는 존재하기 위하여 나를 필요로 했으며 나는 나의 존재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그가 필요했다."
"이 곳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읽고, 듣고, 그것들을 느끼는 나의 모든 언어가 단지 이 곳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이 곳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는 진정 잔인한 곳. 무얼 더 바라기에 나는 이 곳을 더럽히지 못하는가. 민첩하게 움직이는 내 손가락에는 체온이 감돌고 있고 시시각각 전해지는 자판의 감촉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왜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못하고 한낱 시녀로 전락하고 마는가. 악취가 풍긴다. 이것이 얼마나 지독한지 그로 인해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가고 있다. 온갖 벌레가 악취의 심연 속에서 기어 나와 나의 살덩이를 아주 조금씩 파먹고 있다. 눈을 뜬 상태에서 썩은 내 살덩이에 구더기가 하나둘 생겨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감각은 부재하고 정신만이 남겨진 자의 참혹함.
"... 생각하지 않을 것, ...나는 생각하기 싫다... 나는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하기 싫다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도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생존을 모색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마저도 두렵다. 내 몸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육체적인 고통이 없으므로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그깟 정신이 소멸해 버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고, 더욱 가혹하게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그것은 무서운 일이다-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소멸해 가고 있는 나를 이 곳에 알리기 위함이다."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소실점이, 바로 이 곳의 생명의 원천이다.
나의의견: 로캉탱 그는 일반적인 철학자처럼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대하고 있는 인간의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등을 통하여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 그러면서 그는 존재의 본래 모습은 아무런 뜻도 이유도 없이 내던져져 있는 상태임을, 즉 존재의 우연성, 무상성, 비정당성을 깨닫는다. 이 나무가 저 돌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일체의 설명은 존재의 본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장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사물을 은폐하려는 기만에 불과하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로캉탱은 18세기의 기인 드 롤르봉에 대한 연구를 포기한다. 과거의 인물을 연구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은 그 인물 자신과는 상관없는 "나의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의 신비로운 존재는 영원히 밝혀질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나무가 우리와 상관없이 설명을 거부하면서 그대로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저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인 인간은 특별한 존재 이유도 없이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성과 무상성은 단순히 허무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나 세계가 이유 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다. 이 실존과 마주서는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는 한편, 이미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로 말미암아 부과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구토"란 바로 이렇게 추악하게 널려져 있는 모든 이유 없는 존재들 앞에서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메스꺼움이다. 사물과의 만남 속에서 존재의 의미가 흔들릴 때 로캉탱이 느끼는 관념적인 증세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의미가 박탈되고 아무런 존재 이유가 없는 이 부조리한 존재성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로캉탱은 일요일의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 속에서, 도서관 앞 광장에 세워진 아카데미 장학관 앵페트라즈의 동상에서, 그리고 도시의 박물관에 걸려 있는 명사들의 근엄한 초상화 속에서 존재의 진상을 감추려는 속한들의 가련한 자기기만을 꿰뚫어 본다.
이 자기 기만은 로캉탱이 매일처럼 도서관에서 만나는 독학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부빌의 시민들보다 더 가련하고 불행한 인간이다. 그들이 세속적인 명예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위안을 찾는다면, 독학자는 지식의 화신(化身)이 되기 위한 금욕적 생활을 한다. 학문에 대단한 신앙을 가진 그는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모든 책을 A로부터 Z까지 샅샅이 읽고 나면 세계와 인간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갖고 산다. 지식의 무체계적인 습득이 곧 삶의 전부하고 믿고 있는 환상가는 한 번도 지식과 삶의 관계를, 자아의 실존적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이다.
이처럼 ‘구토’를 통해 운명과 대결하는 대신에 안이하게 기성의 편견과 관습의 굴레에 매여 살면서 자기 존재를 정당한 것으로 믿고 있는 속한들의 자기기만 행위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캉탱은 진실로 구원의 길은 없느냐는 질문에 마주치게 된다. 그는 우연적이고 정당화될 수 없는 자신의 존재가 필연성을 가질 수 없을까 하는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준비한다. 그는 소설의 첫 부분에서부터 음악이 갖고 있는 세계의 견고한 구조에 반하고 그 속에서 어떤 필연적인 세계의 존재를 느껴 왔는데, 이제 예술 창조야말로 자신을 절대적 경지로 들어서게 하는, 존재한다는 죄악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예술의 세계, 그것은 소리나 말이 필연적으로 이어지고 어떠한 우연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세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