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건 개 요 1928년 6월 29일 일본인인 성강(盛岡)교사에 대한 배척운동을 송성수(宋聖秀), 김재룡(金在龍), 유상걸(柳上杰), 김윤성(金允性), 나석현(羅碩鉉) 등이 주도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갔는데, 동교의 교사인 최대열이 동맹휴학생들의 행동을 탐지하는 등의 친일행동을 함으로 한국민족으로서의 애국심을 가질 것 등 협박 경고문을 투입하며 활동하다가 피체되었다.
관 련 인 물 송성수(宋聖秀), 김재룡(金在龍), 유상걸(柳上杰), 김윤성(金允性), 나석현(羅碩鉉)
2 광주고보교 맹휴사건 1928년
사 건 개 요 1924년 6월 일본인 팀과의 야구경기시 광주고보 학생들이 안도오(安東)라는 일본의 의사를 구타하고 집단 패싸움으로 시작된 광주고보교 맹휴는 1927년 수학여행시 학교시설 미비와 민족차별교육을 항의하며 2차 맹휴를 감행하였다. 1928년 6월 광주고보교 5학년생인 이경채(李景采)가 친구인 박병하(朴병夏)와 함께 일본제국주의 타도, 무산계급의 단결과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내용의 '선언서' 등 격문을 광주,송송리 거처에 배포하다 경찰서에 발각되었는데 시라이 교장은 재판도 열리기 전에 권고 퇴학시켰다. 그러자 학생대표들은 김영찬(金永燦)의 집에 모여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1928년 6월 26일 1학년을 제외한 전교생의 맹휴를 감행하였다.
관 련 인 물 최규창(崔圭昌), 김기권(金基權), 서재옥(徐在玉), 서재호(徐在皓), 임주홍(林周弘), 정동화(鄭東華), 박세영(朴世英), 변진계(邊鎭契), 이만동(李萬童)
3 보안법 관련사건 1929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된 1차 충돌후 장새성(張載性) 등이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돌입하여 3만명이 시위 행렬에 참여하였다. 광주지역에 국한하는 단순한 시위에 그치지 않고 보다 발전적인 형태의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11월 11일 장재성의 4종의 격문을 작성하고 11월 12일 김안진(金安眞),김삼석(金三錫),김동섭(金東燮),송만수(宋萬洙),김홍남(金鴻南) 등이 격문을 살포하고 김향남(金向南)이 시위 동참을 주도하자 최상을(崔祥을),김동섭(金東燮),송만수(宋萬洙) 등 300여명이 시위에 참여하여 광주형무소로 향해가다 강제해산을 당하면서 190여명의 학생이 체포되었다.
사 건 개 요 학교당국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을 소위 유시퇴학(諭示退學)이라는 방법으로 학교밖으로 내쫓았다. 의식있는 학생들을 교장직권으로 퇴학시키는 유시퇴학에 반발하여 1929년 3월 23일 광주고보 졸업식장에서 유시퇴학을 당한 김몽길(金夢吉), 여도현(呂道鉉) 등이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퇴학조치를 항의하자 많은 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며 동참하자, 시라이 교장이 식을 중단하고 교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하길담(河吉淡) 등이 농성을 벌였고, 교장이 출동을 요청한 경찰에 의해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관 련 인 물 김몽길(金夢吉), 여도현(呂道鉉), 하길담(河吉淡), 김경술(金庚戌)
5 광주고보교 맹휴 반주동자 제재사건 1928년
사 건 개 요 1928년 6월 26일 광주고보교 맹휴후 계속적인 투쟁을 하기위해 맹휴중앙본부에는 참모부,통신부,회계부,경리부,외교부 등의 부서가 있어 맹휴를 조직적으로 지도하고 있었는데, 경비부는 학교주변과 극장, 일본인 교사의 집주변에서 출입자를 감시하고 동태를 살펴 학생들의 본분에 벗어난 행위를 막고 배반자를 색출하고, 비밀누설 등 만일의 가태에 대비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1930년 6월 30일 배반자 학생을 경비대원들이 구타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허진환(許振煥), 조기석(趙璣錫), 김종호(金鍾浩), 정재억(鄭載億), 이강오(李康午), 주재성(朱在性), 이강후(李康厚) 등이 구속되고 경찰이 복격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관 련 인 물 주재성(朱在性), 김종호(金鍾浩), 이강후(李康厚), 이강오(李康午), 허진환(許振煥), 조기석(趙璣錫), 정재억(鄭載億)
6 목포상업학교 시위운동 사건 1928년
사 건 개 요 1928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발하자 학교당국의 감시와 예방조치에도 불구하고 최창호(崔昌鎬), 강영수(姜榮秀), 권영욱(權永郁), 이인형(李麟炯), 이광우(李光雨), 정찬규(鄭燦圭), 오상록(吳上祿), 박종식(朴鍾殖) 등은 11월 7일 김상원(金相元)의 집에서 11월19일 시위를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1학년생 50여명이 박상준(朴相俊), 이인형(李麟炯), 박종식(朴鍾殖), 양재욱(梁在郁), 이재실(李在實) 등과 함께 정명여학교 앞에 모여 '피감금 학생 즉시 탈환',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압박 민족해방 만세' 등을 쓴 큰 목면기를 앞세우고 격문을 뿌리고 시위를 시작하였고, 이광우(李光雨), 정찬규(鄭燦圭), 오상록(吳上祿), 조창섭(趙昌燮), 이재실(李在實), 박사배(朴使培) 등은 송도공원에 모여 시위를 하였다. 11월 22일에도 잡혀간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던 사건임.
사 건 개 요 광주지역 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 볼때도 선국적인 학생비밀결사였으며 광주학생독입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진회와 후속단체로 1929년 9월에 조직된 독서회(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관련인물이 85명에 달하고 내용과 관련자가 중복된 경우가 많아 병합심리를 하였으며 1931년 4월 23일 첫 공판이 열린 뒤 6월 13일 판결이 날때까지 7차에 걸쳐 비공개로 열렸다.
사 건 개 요 던주지역 학생운동의 주도적 인물이었떤 장재성의 동생인 장매성은 재학중 1928년 11월에 동교생 장경례, 박옥련, 남협협, 고순례, 이금자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과 여성해방을 목적한 항일학생결사 소녀회를 조직하였다. 박계남, 박채희, 박현숙, 김금연 및 김귀선 등을 동지로 추가하여 항일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남학생들의 가두시위를 도와 활동하다가 1930년 1월 일본경찰에 피체되었다.
관 련 인 물 장매성(張梅性), 박계남(朴繼男), 김귀선(金貴先), 박옥련(朴玉連), 고순례(高順禮), 장경례(張慶禮), 암성금자(岩城錦子), 남협협(南俠俠), 박채희(朴采熙), 박현숙(朴賢淑), 김금연(金錦연)
9 독서회중앙부삼교독서회사건<예심종결문> 1929년
사 건 개 요 1929년 6월 중순 동경중앙대학 예과에 유학했던 장재성이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에 돌아와 광주고보의 김상환, 김보섭, 윤창하, 광주사범의 송동식, 강달모, 광주농교의 조길룡, 김순복 등과 김기권의 집에 모여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하부조직으로 1929년 6월 광주고보독서회, 광주농업학교 독서회, 1929년 7월 광주사범학교 독서회를 결성하여 민족의식을 키우고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활동이 활발이 이루어졌으며, 더욱이 독서회 중앙부가 이를 통일적으로 지도하다 구속된 사건으로 70여명의 예심종결문임.
10 독서회 중앙부삼교 독서회사건 <판결문> 1929년
사 건 개 요 1929년 6월 중순 동경중앙대학 예과에 유학했던 장재성이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에 돌아와 광주고보의 김상환, 김보섭, 윤창하, 광주사범의 송동식, 강달모, 광주농교의 조길룡, 김순복 등과 김기권의 집에 모여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하부조직으로 1929년 6월 광주고보독서회, 광주농업학교 독서회, 1929년 7월 광주사범학교 독서회를 결성하여 민족의식을 키우고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활동이 활발이 이루어졌으며, 더욱이 독서회 중앙부가 이를 통일적으로 지도하다 구속된 사건으로 70여명의 예심종결문임
11 성진회, 독서회해체조직사건<예심종결문> 1929년
사 건 개 요 광주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볼때도 선구적인 학생비밀결사였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진회의 재판은 1930년 10월 20일에 첫 공판이 열렸는데 총 38명 가운데 노근후, 김종선, 송종근 등 3명이 면소되고 장재성 등 35명이 재판을 받은 예심종결문임.
12 성진회사건<판결문> 1929년
사 건 개 요 광주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볼때도 선구적인 학생비밀결사였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진회의 재판은 1930년 10월 20일에 첫 공판이 열렸는데 총 38명 가운데 노근후, 김종선, 송종근 등 3명이 면소되고 장재성 등 35명이 재판을 받은 판결임.
13 나주농업보교·나주보교시위삐라사건<판결문> 1929년
사 건 개 요 나주에서의 시위준비는 학생측과 나주지역의 사회·청년단체의 연결아래 이루어졌다. 광주시위사건에 대해 소상히 전해 들었던 나주농업학교 학생 유찬옥은 나주청년동맹검사위원장과 신간회 나주지회 서기장을 겸하고 있는 박공근과 그와 친분이 있는 박동희, 양영택, 나주농업보습학교 홍민후, 이창신, 이채후 등이 1929년 11월 27일 장날 정오에 두 학교의 학생을 규합하여 격문을 부리고 시위를 하다 검거되었는데 중외일보 기자인 김형호는 면소되고 5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관 련 인 물 유찬옥(柳贊玉), 박공근(朴恭根), 양영택(梁永澤), 박동희(朴東熙), 홍민후(洪敏厚), 김형호(金亨浩
14 광주고보교선전문서 인쇄배포 1928년
사 건 개 요 일본제국주의 타도, 무산계급의 단결과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내용의 '선언서', 건전한 사상의 소지자가 될려고 하는 학생제군에게 고함', 자본주의 계급적 고등충복 제군에게 고함' 이라는 격문을 작성 인쇄하여 이경채, 박병하가 광주, 송정리 각 처와 도내 각 중학교 및 경찰서 등에 배포하다 발각됨.
관 련 인 물 한길상(韓吉祥), 이경채(李景采), 지창수(池昌洙), 강해석(姜海錫), 조칠성(曺七成), 박승남(朴承南), 박병하(朴병夏), 윤해병(尹海炳)
15 경성보성고보교독서회사건 1933년
사 건 개 요 강문영은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시 독서회에 가입 활동하다가 검거되어 복역후 경성보성고보교 3학년에 입학후 독서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1933년 1월 구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