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다 가방
임병식 rbs1144@hanmail.net
내가 한때 애용한 가방 중에는 유독 기억에 각인된 것이 있다. 나일론 제품의 다우다 가방으로 70년대 초에 유행하던 것이다. 이 가방이 애용된 건 무엇보다도 우선 가볍고 질기기도 했지만 가격 면에서 저렴하여 허드레용기로 사용하기가 좋아서였다.
가방의 기능은 일차적으로 물건을 담는데 있다. 그 다음은 용이한 운반수단이다. 한데, 내 생각에 가방을 설명 하는 데는 무언가 좀 부족한 느낌이 든다.
관형격으로 ‘남이 보지 못하도록’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할 것 같다. 그리 생각하는 까닭은,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입구가 열려 있는 쇼핑백이나 여느 봉투도 이러한 가방으로 간주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가방의 유래를 살펴보면 ‘상자나 궤’등을 이르는 중국말의 板(판)이 변해서 생겨났다고 한다. 또 다른 이설로는 네델란드 말의 ‘kabas'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가죽이나 비닐 등으로 만들어 간편하게 들고 다니도록 한 것이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가방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한다.
내가 군 생활을 하던 시기는 새마을운동이 본격화 되던 때로 ‘질보다는 양’이 장려되었다. 그래서 벼도 밥맛이 좋은 농림6호가 있었으나, 그보다는 수확량이 월등히 많은 통일벼가 적극 장려되었다. 그 무렵에 등장한 것이 값도 싸고 질긴 ‘다우다’ 제품이었다. 그 원단으로 허드레옷도 짓고 가방도 많이 만들었다. 당시 만든 다우다 가방은 특징이 있었다. 접으면 핸드백 크기의 소형가방이 되고 뒤집으면 제법 큰 다용도용이 되었다.
그 당시 첫 휴가를 나온 나는 다우다 가방을 하나 준비했다. 광주 돌 고개에서 자취를 하는 동생을 만나보고 그곳에 있는 엿 공장에서 엿을 좀 사가지고 가기 위해서였다. 그 엿 공장은 강엿(조청 상태로 굳혀놓은 검붉은 엿)을 주로 팔았다. 거기서 도매금으로 한판을 샀다. 분량이 꽤 되었다. 그 정도면 소대원 정원이 넉넉히 나눠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마침내 복귀하던 날. 겨울철이긴 해도 남녘에서는 그리 추운 줄 몰랐는데 춘천 역에 내리니 한기가 스며들었다.
대기 중에 대합실에 놓인 연탄난로 옆으로 다가섰다. 아마 그때 너무 가까이에 붙어서 불을 쬔 모양인지 복귀하여 가방을 열어보니 엿이 그만 천에 눌어붙어 있는 게 아닌가. 떼어내는데 애를 먹었다. 그래도 그걸 부대원 앞에 내놓으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제대특명을 기다리던 한 고참병이 빼치카 위에서 배를 깔고 거만하게 엎드려 있다가 몸을 모로 돌리며, 말했다.
“ 어쭈, 엿이나 먹어라 이거지” 하고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순간 위기의식을 느낀 나는 얼른, 자세를 고치며,
“아닙니다. 고향특산품이라 사왔습니다”하고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나는 위기를 느끼고 그런 말은 했지만, 사실 엿이 시빗거리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 다행히 다른 고참병이 나서서,
"야 인마 뭘 그래. 먼 곳에서 맛보라고 가져온 게 가상하지 않냐.” 하며 만류하여 봉변은 면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책 없이 조인트를 까이고 말았을 것이다.
이 다우다 가방을 떠올리면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내 인생일대에 인내의 한계를 시험한 일이기도 했다. 신임시절에 나는 관내에서 가장 방위병 숫자가 많은 지서에서 배치되었다. 그곳은 큰 섬이다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방위병 자원이 월등히 많고 따라서 예비군 중대장도 3명이나 있는 곳이었다.
지서장의 지시로 방위업무를 담당하게 된 나는 인원파악부터 서둘렀다. 한데 단 시일에 파악이 쉽지가 않았다. 저마다 소속이 다른데다 격일제 근무를 하는 탓이었다. 일주일 나마 걸려서 겨우 점검을 마쳤다. 그런데 병력이 장부상 숫자와 일치하지 않았다. 10명 이상의 유령인원이 일보로 잡혀서 봐주고 있었다. 나는 당장 소집에 나섰다. 가까운 곳은 찾아가고 먼 곳의 연고가 있는 사람은 통지서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느닷없이 중대장 3명이 내 거처에 찾아왔다. 대뜸 하는 말이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번 눈감아 달라면서 조그마한 검은 다우다 가방을 내밀었다. 불룩했다.
“이게 뭡니까?”
“한번만 눈감아 주세요.”
“안됩니다. 당장 가져 가십시오.”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그들은 적잖이 당황하며 돈 가방을 한사코 안기려고 애를 썼다. 옥신각신 소동이 벌어졌다. 그래도 끝내 받지를 않으니 그들은 포기를 하고 일어섰다. 아니,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한데, 나중에 보니 가져간 줄 알았던 그 가방이 방 귀퉁이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화들짝 놀라서 집어 들어 집 밖으로 나서는 그들의 뒤쪽에 던져 버렸다.
그 일이 있고난 후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담당구역에 진출했다가 해거름 녘에 산모롱이를 돌아오는데 몸집이 우람한 한 중대장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손에는 가죽장갑이 끼어있었다. 내가 미처 방어자세도 취하기 전에 그의 주먹이 내 안면에 날아들었다.
“너 같이 인정 없는 놈은 처음 본다. 임마. 세상은 적당히 서로 돕고 사는 거야, 이 자슥아”
순간, 이 말이 들리는가 싶더니 내 얼굴에서 코피가 낭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무작위로 가하는 폭력을 피하면서 그의 허리를 잡고 늘어졌다. 절박한 상황에 어디 구원 요청할 상황도 아니었다.
한동안 엉켜서 결투가 벌어졌다. 한참 후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대충 씻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차석이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놀라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에 즉각 미뤄왔던 병력이탈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지라 나는 가방을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다우다 가방이 떠오른다.
당시 내가 돈뭉치를 받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공직생활을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일은 내가 사는 동안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교적 신임시절인데 그러한 자세를 견지했다는 건 장한 일이 아닌가 한다.
청렴과 소신을 지키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어느정도 따돌림과 모함도 각오해야 한다. 일찍이 이순신장군도 신념을 지키다가 모함과 불이익을 당했다.
발포 수군 만호시절,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객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했다. 이를 거절하다가 모함을 받았다. 나는 당시 내가 한 일을 떠올릴 때마다 단호히 물리친 일을 백번 잘했다고 생각한다. 장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가방. 그 다우다 가방. 나는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가방은 물건을 넣고 다니기에 더없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검은 돈을 담은 용기로 쓰일 때는 문제가 된다. 내 공직생활에서 가장 위기일발의 순간. 그 것을 단호히 물리친 일을 잊을 수가 없다. (2011)
첫댓글 휴가와서 귀대 하던 날
맛있는 갈색의 강엿 담았던
가방이 생각나네요.
못된 고참 병장 "너 나 엿이나 먹으라고... "
김선생님도 강엿을 사갔나요. 저는 그걸 사갔다가 고약한 고참한테 봉변을 당할뻔 했지요.
못된 악질적인 고참 만나
봉변도 당하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45년 전 일이니 격세지감이죠!
사람마다 비슷한 일을 많이 겪는것 같습니다.
거리에서 그리움 속의 가방 이야기를 읽으며 혼자 웃었습니다. 갱엿을 사 가셨다는 것이.......요즘 군인은 아무것도 못 사 오게 한다더군요. 아들이 휴가 나왔다 가는데 뭔가 싸 주고 싶어 물었더니 '엄마, 요즘은 그런 것 못 들고 오게 해요.' 이러더군요.
옛날에는 첫휴가 나와서 무얼 안가가면 괴로움을 당했지요. 남이 휴가나가 귀대때 사온 걸 얻어먹기도 해서 사가게 되지요.
한국수필
가방에 얽힌 두가지 일화를 통해 상반된 쓰임에 대한 얘기를 풀으셨군요. 그렇지요. 도구를 누가 어떤 용도로 쓰느냐에 따라 악하게 쓰일 수도 선하게 쓰일 수 있는 게지요. 돈이 그렇고 칼이 그렇지요. 저도 이런 글을 써보려고 했습니다. 이것도 스크랩!
가방을 통해서 지난 일을 압축적으로 담아보고자 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